편집자 주: 이 글은 지난 10월 20일 있었던 “서울시정 문화행정 현황 진단과 과제” 토론회에서 있었던 필자의 발제문 “서울시정의 비판적 진단과 과제 : 허약한 서울시 혁신정책의 뿌리에 대해”를 개고한 것이다. 토론회 자료집 전문은 문화정책리뷰 ‘자료실’ 카테고리에서 다운로드 할 수 있다. 토론회 상세 바로가기
보궐선거의 결과로 오세훈 시장이 등장하자 서울시의 협치/거버넌스/혁신 사업에 대한 논란이 벌어졌다. 실제 오세훈 시장은 후보 시기부터 서울시의 협치/혁신 사업에 대하여 ‘불필요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런데 현재의 논란의 양상은 오세훈 시장과 시민사회단체의 대립으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이다. 선출직 공직자가 시민사회를 적대시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이런 선택을 한다는 것은 적어도 서울시의 행정을 둘러싼 집단적 이해관계 내에서의 정치적 균열을 염두에 두었을 공산이 크다. 즉 오세훈 시장이 문제시하는 것은 시민사회 자체가 아니라 지난 시정부에서 도드라졌던 시민사회의 ‘대표적 권력’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그러니까 오세훈 시장의 주장에 동의하는 그룹과 비판의 대상이 되는 그룹 간의 정치적 갈등, 소위 민주당화 된 서울지역 시민사회의 정치화에 대한 반발이라는 이해도 가능하다. 오세훈 시장이 불러일으킨 갈등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도 이러한 복잡한 양상에서 비롯된다 할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갈등’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유는 첫째, 현상에 대한 냉소적 접근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갈등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에서 멈춘다면 시민사회의 다양성과 역할에 대한 질문을 지운다. 소위 협력적 거버넌스의 파트너로서 시민사회는 실패했는가, 아니 불필요한가? 그렇지 않다면 이는 갱신될 수 있는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 필요하다. 이와 연관하여 둘째, 협치/혁신정책들에 대한 반발이 다른 측면으로는 기존 관료들의 반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함께 해온 사업에 대해 그럴 수 있느냐는 질문과 별도로 서울시의 협치/혁신 사업이 어땠길래 이렇게 행정 내부화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서울시의 협치와 혁신정책은 모두 불확정성이 높아진 현대사회의 구체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방법들이다. 누구의 협치, 누구의 혁신정책이 싫다고 협치 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제는 오세훈의 협치, 오세훈의 혁신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이다. 주체의 배제인가 주제의 배제인가라는 면에서 현재 서울시가 보이는 태도는 2011년 이전으로의 퇴행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현재의 혁신/협치는 2011년까지의 실패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도 정치적 환경의 변화를 이유로 주저 없이 그 전으로의 회귀를 선언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시민 사회의 경우: 사업화된 혁신과 협치
영국의 시민사회 싱크탱크 중 한 곳인 ‘콤파스compass’가 베아트리체 웹 Beatrice Webb(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대표적인 사회주의자이자 경제학자)을 계승하는 ‘빈곤을 생각한다Rethinking Poverty’ 그룹과 함께 펴낸 ‘45도 변화’라는 개념이 있다. 소위 사회혁신과 관련한 정책 실험이 가장 일반적으로 확산된 곳이 영국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45도 변화라는 맥락을 짐작해볼 수 있다. 45도 변화는, 말 그대로 45도의 지향을 가지는 변화를 뜻한다. 그런데 그 지향은 목표의 절충이나 타협이 아니라 이를 달성하기 위해 동원하는 자원의 수준을 의미한다.
다음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변화를 위한 자원은 한편으로는 제도 권력 내의 제도 자원과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 권력 내의 시민 자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때때로 제도와 시민사회의 갈등관계를 중심에 놓는 관점에서는 이 양자의 자원을 동시에 활용하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가능하더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로 여겨졌다. 제도자원은 선출된 대표자들의 독점적인 자원이 되고 행정구조를 통해서 분배된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는 평가를 할 수도 있고 정책형성 과정에 참여를 할 수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옵저버의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특징은 제도 권력이 제도 자원을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시민사회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원으로 기존의 시민사회 자원은 너무 협소하다. 따라서 더 큰 자원이 필요하지만 이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도 경험도 없다. 결국 현재의 혁신정책이라는 것은 행정 측에서의, 시민사회 측에서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새로운 ‘정책 공동생산의 장’에 가깝다.
하지만 그 방식은 특정한 시민사회 영역이 나머지 시민사회 영역을 과잉 대표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위의 그림을 염두에 둔다면, NGO라고 표시된 영역이 여타 시민사회 영역을 모두다 대표한다는 것은 다양성을 해치는 일이 된다. 오히려 45도의 변화는 45도의 사선에 ‘새롭게 형성되어야 할 영역’에 가깝다.
이러한 관점으로 서울시의 민간협치 거버넌스를 분석한다면 특정한 단체가 특정 의제에서 과잉 대표되면서 단체를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권력화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무엇보다 새로운 의제를 발굴한 그룹이 스스로 사업화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시민사회와 견고한 행정자원들의 공진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스스로 사업의 단위가 되는 소위 ‘선행화 모델링’에 갇혔다. 돌이켜보면 혁신사업이 중요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적 경제, 협동조합, 마을공동체 사업들은 모두 중간지원조직을 통한 사업화의 경로로 제도화되었으며 그것을 운영하는 곳은 바로 그 의제의 대표성을 가진 단체가 되었다. 그러다보니 혁신 주제가 제도의 영역으로든 시민사회 영역으로든 확산되지 못하고 독립적인 사업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물론 혁신사업은 그 자체의 속성 상 구체적인 문제 해결의 방법이고 따라서 실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효용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윤영근(2019), "공공문제해결을 위한 공동생산 사례의 유형화 연구", 서울행정학회 추계학술대회.) 하지만 혁신 자체가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으로 강조되면 혁신의 이념화가 발생한다. 이를테면 수단이 목적화되는 것인데, 이런 경우 ‘왜 사회적 경제가 필요한가’라는 질문이 ‘사회적 경제는 쓸모가 있는가’라는 질문을 밀어낸다. 마을공동체 사업에 대해서도, 협동조합에 대해서도 똑같은 질문이 가능하다. 현재의 논란은 협치 자체, 혁신정책 자체 혹은 거버넌스 자체에 대한 논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업화된 협치, 사업화된 혁신정책, 사업화된 거버넌스에 대한 평가에 가깝다. 따라서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정책이 개별화된 사업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주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접근을 해야 다음 질문, ‘사업 실패의 책임’에 대한 문제로 집중할 수 있다.
행정의 경우: 혁신을 외부화하고 성과를 생색내기
최근 논란을 두고 서울시 공무원노동조합에서는 오세훈 시장의 행보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당연히 노동조합은 자체의 의견을 공표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공개된 입장은 그 자체로 토론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말 공무원노동조합이 주장하는 것처럼 행정 자체가 할 수 있는 사업을 지난 시장이 시민단체에 맡겼던 걸까? 그리고 지금 다시 행정이 자체적으로 하면 더 효율이 높아지게 될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 현재의 중간지원조직은 대부분 기존 행정조직의 ‘불능’에서 야기된 것이다. 즉 기존의 행정 조직에서 새롭게 등장한 시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응대할 전문성도 그럴 의무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중간지원조직이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중간지원조직을 없애고도 사업을 유지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긴 어렵다. 역으로 사업을 줄이면서 중간지원조직을 고사시키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만약 공무원노동조합의 주장이 전체 공무원들의 일관된 주장이라면 민간 위탁된 형태는 사라지더라도 사업이 사라지면 안 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업을 없애서 민간위탁을 줄이는 선택을할 개연성이 크다.
왜 그럴까. 그것은 행정 자체가 혁신의 대상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실 박원순 시장 시기의 다양한 혁신정책들이 중간지원조직의 형태로 외부화된 것은 기존 행정조직의 자기 조직 보존의 맥락에서 볼 수 있다. 해야 하는데, 그것을 조직 내로 이식할 경우 줄어들게 되는 직업 공무원들의 내부자원 문제가 생긴다. 차라리 중간지원조직 형태로 떼어내어 외부화하는 것이 조직을 지키기도 좋고 귀찮은 사업을 직접 하지 않아 좋다는 절충의 산물이다. 현재 중간지원조직은 추가된 사업을 외부화하는 행정의 기법에 불과하고, 시민사회의 한계라면 그것을 직접 수행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협치의 ‘공동생산’이라는 원리는 기본적으로 동등성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현재 중간지원조직은 직제의 성격상 특정 과의 과장 하부에 존재한다. 이렇게 되면 애초 정책 수준에서는 종합적이었던 사업의 내용이 특정 과의 단위사업 구조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사실상 혁신정책이 가지고 있는 혁신성이 과 단위 수준으로 포획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는 당연히 행정 내에서의 매카니즘에서 볼 때, 행정조직의 본질을 지키면서도 시장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이다. 때마침 중간지원조직 수준에 만족하는 시민사회 주체까지 존재한다면 위탁사업을 늘림으로써 조직을 지킬 수 있는 선택지가 가장 최적의 해법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보면 공무원노동조합의 주장은 그 자체의 진정성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도리어 왜 행정 자체가 혁신의 대상이어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전국적 의제를 선도했던 대부분의 사례는 이런 ‘혁신의 외부화’를 통해서 달성된 것이지 행정 자체가 고유한 동기를 통해서 만들어낸 사례는 거의 없다. 나아가 중간지원조직 형태를 제외한 민간위탁 사업들, 이를테면 자원회수시설이나 복지시설 그리고 글로벌지원센터 같은 것들을 여전히 민간위탁으로 둘 이유가 없다.
공유자원으로써 행정
이상의 현상들은 시장만 바뀌면 해결될 문제인가? 지금 비판을 받는 이들이 다시 명예회복을 하면 서울시의 혁신정책은, 거버넌스는 괜찮아지는 것인가? 만약에 그렇게라도 계기를 만들자는 생각이라면 아마도 다수의 서울시민들을 방관자의 위치로 몰아넣게 될 것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기에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산하기관, 출자출연기관들은 시민들에게 더 친절했나? 시민들은 공공서비스의 일방적인 고객이 아니라 파트너로서 존중받았던가? 다시 기존과 같은 중간지원조직들이 만들어지고 의제를 독점한 집단이 등장하면 사회적 경제가, 마을이, 협동조합이 다시 활성화될 수 있는 걸까? 아닐 것이다. 그래서 시장을 바꿔서 이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은 문제의 유예가 될 수는 있어도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기 힘들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공격의 포인트가 되는 약점을 보완하고 평가해서 더 튼튼한 협치와 혁신의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엇보다 어이없게 행정에 포획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오세훈 시장 시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을 단순히 오세훈 시장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서울시 행정구조 자체의 문제로 확대해 볼 필요가 있다. 몇몇 개방직 직위를 확대한다고, 중간지원조직을 만든다고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면, 인사에서 조직과 내부 인센티브까지 전면적으로 검토해야 하고 그 계획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출직 공직자가 교체되면 사업의 조정이나 인사문제를 두고 갈등을 반복하는 원인에는 정부 혹은 행정의 자원을 ‘유사-사유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싶다. 공무원들은 대개 행정자산에 대해 ‘내 것’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제도와 규정 사이에 융통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때 많은 공무원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시민들의 욕구나 절실함에 주목하기보다는 ‘내 것을 저들에게 주었을 때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하는 인식이 더욱 크다. 이렇게 사소한 감정일까 싶지만 역설적으로 자신들과 안면이 있거나 혹은 스스로 신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상에 대해서 발휘되는 융통성의 범위를 보면, 이는 행정 스스로 행정자산을 사유재로 인식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측면이 크다. (실제로 행정은 시민에 대해 명령이나 지시를 할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 법적 근거를 제시할 의무가 있다.) 여기에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마치 민주주의의 최선이라고 보는 인식이 자리한다. 단체장과 지방의회의 의원은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대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근대 민주주의의 이념에 따르면 대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없을 때’ 필요한 것이지 시민들의 직접 참여를 대체하거나 배제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구축한 행정 내/외의 경험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전략, 그러니까 구체적으로는 행정 자산을 공유자산으로 접근하는 관점이 필요하다. 현대 국가의 재정은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보자면 국방과 복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개인이 개인으로서 보장하기 힘든 안전의 두 가지 측면을 국가라는 틀을 통해서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 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재정은 전문가의 자산도 선출된 대표자의 자산도 아니다. 왜냐하면 재정이 이들의 안전만을 보장하도록 하는 사유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확장하면 공공시설의 공간들도 그렇다. 도서관의 공간을 여타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행정적인 규칙일 뿐이지 그렇게 창조된 것은 아니다. 코로나19와 기후위기라는 전대미문의 도전 앞에서 오세훈 시장과 구태의 행정 관료들이 벌이는 일은 극히 사소한 일일 뿐이다. 첫 단추를 잘못 껴서 사달이 벌어졌다면 지금이라도 다시 첫 단추를 채우려 노력하는 것이 정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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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연대집행위원. 서울시민재정네트워크 운영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 블랙리스트 이후 문화예술위원회의 혁신을 위한 TF위원,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문화/예술재정과 예술활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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