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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④] 공공미술의 공공성: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

CP_NET 2021. 6. 6. 13:48

 

 

 

2017년 서울역 고가도로를 리모델링한 서울로 7017’의 개장에 맞춰 설치된 조형물 <슈즈 트리(Shoes Tree)> 논란. 가든 디자이너 황지해의 재능기부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서울로 7017’ 위에서 서울역 광장 아래로 폭포수처럼 쏟아지듯이 구성된 것인데, 3만 켤레의 버려진 신발로 구성되었다. 이 작품은 즉각 시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보기 흉하다.” “냄새가 날 것 같다.” 다수 시민들의 반응은 한 마디로 흉물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학자 진중권은 예술이 예뻐야 하나? 흉물도 예술이 될 수 있다라고 옹호했고 미술평론가 반이정도 문화적 소양에는 인내력이 요구된다고 하면서 대중의 관용을 주문했다. 이 작품에 대해 대중은 대부분 부정적 반응을 보인 반면에 전문가들은 대체로 긍정적 지지를 보냈다. 대중은 흉물로, 전문가들은 예술로 본 것이다. 당시 나는 이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제3의 관점을 견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작품에 대해 변호를 좀 하고 싶다. 그것은 이 작품이 여느 평범한 흉물은 아니라는 것. 그러니까 괴물이라는 것이다. 흉물과 괴물의 차이는 앞서도 이야기했듯이 메시지의 전달 방식과 코드의 구조에 달려 있다. 나는 발신자가 단일 코드를 폭력적으로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 흉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각종 기념비를 비롯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환경조형물은 흉물에 해당된다. 그것들은 거대한 권력과 고정관념의 산물로서 우리에게 어떠한 정치적·예술적 상상력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1)

 

나는 이 작품을 실패한 공공미술이자 성공한 현대미술이라고 규정했다. 대중의 호감을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공공미술로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지만 대중의 통념을 위반하고 경계를 넘어서 새로운 감각을 투척했다는 점에서는 성공한 현대미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품을 흉물이 아닌 괴물이라고 말한 것도 그러한 경계성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공미술도 현대미술이지만 그것은 미술관을 기반으로 하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그래서 대중의 시선을 거부할 수는 없다. <슈즈 트리>는 시민들의 외면 속에서 9일 만에 철거되고 말았다. 원래부터 일시적인 작업으로 계획되었다고는 하지만 서울시로서는 뼈아픈 경험을 한 것이다. <슈즈 트리>는 그렇게 짧은 생을 마쳤지만 강렬한 기억과 함께 한국 공공미술의 역사에서 피할 수 없는 물음을 남겼다.

 

 

공공미술의 주체는 누구인가

 

<슈즈 트리> 논란이 남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공미술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이다. 다시 말하면 공공미술의 주체에 대한 물음이다. 공공미술은 사적 미술(private art)’과는 달리 다양한 주체들이 개입되고 충돌하는 장이다, 그것은 공공미술이 누구나 접근 가능한(public access) ‘열린 미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형식적인 정의에 불과하다. 실제로 공공미술과 관련된 주체들은 균일하지도 평등하지도 않다. 공공미술과 관련된 주체는 공급자인 관(), 제작자인 예술가, 수용자인 대중이다. 문제는 이 세 주체들의 공공미술에 대한 이해(理解)와 이해(利害)가 다르다는 데 있다.

 

공공미술에는 공급자인 관 주도의 공공미술이 있을 수 있고, 예술가 중심의 공공미술이 있을 수 있고, 대중이 원하는 공공미술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정치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일치되기는 쉽지 않다. 사실 그동안 공공미술은 주로 관 주도로 이루어져 왔다. 이런 경우 공공미술은 도시 정치의 도구로 이용되기가 쉽다. 가장 나쁜 것은 엘리트 카르텔, 즉 관과 예술가가 결탁하는 것이다. 이 역시 종종 목격하게 되는 경우이다. 한편 한국의 공공미술에서 최악의 영역으로 꼽히는 건축물미술작품의 경우는 대중(건축주)과 예술가의 결탁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미술계와 시민사회의 거듭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아성은 여전히 견고하다.

 

서울시가 2016년부터 추진해오고 있는 서울은 미술관’ 프로젝트2)는 일방적인 관주도 공공미술이나 건축물미술작품과는 다른 방식과 경로로 공공미술을 제공하기 위한 기획으로 알고 있다. ‘서울은 미술관의 접근방식을 보면 공공성과 대중성을 조화시키려는 의도가 보인다. 하지만 앞서의 지적에서 보듯이, 공공미술이 그 이름과는 달리, 실제 현실에서는 얼마나 폐쇄적이고 타락하기 쉬운 장르인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슈즈 트리>는 이러한 문제를 근본적으로 제기하였다. 공공미술은 관과 예술가와 대중, 3자 사이에 벌어지는 고난도의 게임인 것이다.

 

 

공공미술의 공공성,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공공미술은 일단 미술과 공공성의 만남’3)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면 다양한 주체들의 서로 다른 이해(理解)와 이해(利害)가 얽혀 있는 공공미술에서 공공성은 어떻게 찾아야 하나. 그것은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 이 역시 슈즈 트리의 사례가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해준다고 본다. ‘슈즈 트리에서 충돌한 것은 예술가와 대중, 예술성과 대중성이었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평론가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공공미술의 예술성을 강조했다. 그에 반해 대중은 대중적 호불호를 내세웠다. 그리하여 전문가의 관점과 대중의 취향이 날카롭게 충돌했다. 결과는 대중성의 승리였다.

 

그런데 나는 이 사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결과가 아니라 바로 그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날카롭게 충돌하는 예술성과 대중성, 바로 그 사이야말로 공공미술이 파고들어 가야 할 지점이기 때문이다. <슈즈 트리>에서 이러한 문제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더 이상 논의는 진전되지 못하고 끝났다. <슈즈 트리>는 사라졌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슈즈 트리>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의 지점, 거기에서부터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술과 공공성의 만남이라고 할 때의 그 공공성(publicness, Öffentlichkeit)’이란, 원래 서구의 공화주의 전통에서 나온 가치이다.4) 그것은 시민적 덕성(virtu civile)’에 기반하여 공공선(bonum publicum)’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서구적 전통이 결여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공공성이라는 개념은 유감스럽게도 그저 허울 좋은 외재적 관념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적 공공성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미술과 공공성의 만남인 공공미술의 공공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던져진 근본적인 물음은 이런 것이 아닐까.

 

나는 한국적 현실에서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바로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슈즈 트리>에서 날카롭게 부딪친 바로 그것들 사이에서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예술성과 대중성의 대립도, 그중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도 아니다. 설사 전문가들이 손을 들어준 공공미술의 예술성이 인정받는다 하더라도, 반대로 대중의 취향이 승리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예술성과 대중성, 둘 중에서 어느 것도, 그것만으로는 공공미술의 공공성을 보장해주는 절대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공공성은 그 사이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 <슈즈 트리>에는 공공성이 빠져 있었다. <슈즈 트리>의 실패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예술성과 대중성이 아무런 매개 없이 벌거벗은 채 충돌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공공미술에는 바로 이러한, 도시 문화가 추구해야 하는 공공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 빠져 있다. 이처럼 공공성의 매개가 없는 상태에서는 전문가적인 예술성과 생활세계의 대중성은 바로 부딪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술성과 대중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말하기만 하는 것은 너무 관념적이며 무책임하다.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공공성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공공성은 처음부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과정(차라리 공정(工程))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도시 속에서 예술성과 대중성이 충돌하고 교섭하는 곳, 그것이 바로 공공성의 자궁으로서의 공론장인 것이다. 사실 <슈즈 트리>에 공공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슈즈 트리>는 예술성과 대중성이 날카롭게 충돌하는 장을 발생시킴으로써, 사실은 생생한 공공성을 생성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처음부터 공공미술 속에 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공론의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분출되는 것이다. 공공성은 그렇게 도시 정치와 문화 속에서 발생하는 하나의 효과이자 경험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대립과 충돌과 교섭을 지켜보고 인내하는 힘, 심지어는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역능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공공미술 씬에서 보기 드물게 대립하는 가치들이 충돌하는 공공성 생성의 장이었던 <슈즈 트리>의 소란을, 우리가 더 지켜보지 못하고 일찍 막을 내려버리게 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공공미술의 공공성은 공공미술 바깥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공공미술의 육체 안에서의 갈등과 대립과 상처를 통해서 조금씩 새겨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예술성과 대중성은 대립을 넘어서 미술의 공공성이라는 장 속으로 통합되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미적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거꾸로 가는 공공미술

 

팬데믹 상황에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위한 공공 지원 정책이 다각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중에서 예술가들을 위한 문화뉴딜이라는 사업이 공공미술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는 물론 미국 대공황기의 뉴딜 정책에서 대대적으로 시행된 공공미술 사업을 모델로 한 것일 터이다. 그런데 과연 지금 한국 현실에서 예술가 지원 사업과 공공미술의 만남이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이다.

 

한국에서 국가 차원의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처음 선을 보인 것은 2006년의 아트인시티프로젝트였다. 당시 나는 문화관광부 공공미술추진위원회의 사무국장으로서 이 프로젝트의 실무 책임자였다. 이 과업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나는 그때까지 해오던 대학 강의까지 쉬면서 뛰어다녔던 기억이 난다. ‘아트인시티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주민 참여형 공공미술을 시도한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대상지와 작가는 공모를 했고, 추진 과정에서 주민 참여를 끌어내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프로젝트는 2년 간(2006~07) 추진되었고, 이후에는 한국미술협회 주관의 마을미술프로젝트로 전환되었다. 그러면서 예산이나 규모는 확대되었지만, 처음의 실험적인 성격은 퇴색되고 점차 관행사업화 되어간 느낌이 들기도 한다.

 

취지와 성격은 다르지만 문화뉴딜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국가 차원의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사업이 아트인시티마을미술이라는 지난 15년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다. 팬데믹이라는 비상 상황을 핑계로 최소한의 기본 조건에 대한 검토도 없이 급조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 지원 사업과 공공미술을 아무런 매개 없이 일차원적으로 묶어낸 방식에 있다.

 

과연 예술가 지원과 공공미술이 실과 바늘처럼 한 묶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예술가 지원을 단순 시혜성 사업으로, 공공미술을 그저 착한 미술로 이해하는 인식 수준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예술가 지원은 일방적인 시혜성 사업이 되어서는 안 되고 공공미술은 말 잘 듣는 착한 미술이 아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공공미술은 다양한 주체들의 서로 다른 이해(理解)와 이해(利害)가 충돌하는 장이며, 그러한 충동 가운데에서 비로소 공공성을 생성시키는 가능성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은 결코 국가의 일방적인 서비스가 아니며 고분고분한 착한 미술이 되어서도 안 된다. 대신에 그것은 국가와 예술가와 시민사회의 상호작용과 교섭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아트인시티에서 마을미술까지 15년의 성과를 단숨에 무너뜨리고 사상누각으로 만드는 ‘문화뉴딜’ 프로젝트야말로 공공미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공공미술의 주체는 누구인지에 대해 처음부터 다시 질문하게 만든다. 어쩌면 우리를 다시 이런 원초적 물음 앞에 불러 세운 것이야말로 ‘문화뉴딜’의 최대 성과라고 말하면 지나치게 비아냥거리는 것일까.

 

<미주>

1) https://www.huffingtonpost.kr/bum-choi/story_b_16761418.html

2) https://archives.seoul.go.kr/contents/seoulmuseum 참조

3) 최 범 외, <공공미술이 도시를 바꾼다>, 문화관광부, 2006. 22

4) 공공성은 자유롭고 평등한 인민(populus)이 공개적인 의사소통의 절차를 통하여(Publizität) 공공복리(salus publica)를 추구하는 속성이다.” 조한상,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책세상, 34

 

* 이 글은 서울시 주최 제5<서울은 미술관 공공미술 컨퍼런스>(2020. 10. 15.)의 발표문에 최근의 ‘문화뉴딜’에 관한 문제의식을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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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범. 디자인 평론가. 디자인을 통해 한국 사회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한국 디자인 뒤집어 보기외 여러 권의 평론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