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창간 2주년 기념 좌담] 판데믹 이후, 전환을 위한 의제

CP_NET 2021. 8. 24. 22:00

 

 

편집자 주: [문화정책리뷰]는 지난 해 4월부터 “판데믹과 문화정책”을 주제로 판데믹 이후 현장를 기록하고 판데믹으로 드러나는 문화정책의 문제적 지점에 대한 분석을 지속적으로 기획해왔습니다. 이번 좌담에서는 여전히 판데믹의 한 복판에 놓여 있는 현실에서 그간의 논의를 중간 점검해보고자 했습니다. 판데믹 이후, 문화정책 현장과 담론의 변화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의제들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일시: 2021년 7월 7일 (수) 오전 10시
장소: 줌미팅

 

사회: 김소연(사회,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양혜원(문화관광정책연구원 예술정책연구실장)

    김성하(경기연구원 연구위원)

    김상철([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염신규([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참관

    김민규([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김정원([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안태호([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변화는 것, 변화하지 않는 것

 - 낯섦의 익숙함, 익숙함의 낯섦

 - 사회 전분야 시스템의 취약성

 

사회: 판데믹이 시작된지도 1년 반이다. 판데믹이 시작되었을 때 문명적 전환에 대한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만큼 판데믹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 비상상황이 장기화되면서 정말 우리가 어떤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그런 한편 지금의 비상상황이 어떤 점에서는 지속되어온 문제들을 다시 반복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우선 말문을 열기 위해 각자 판데믹 이후 가장 인상깊은 사건이나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연구자, 기획자, 혹은 시민 등 여러 정체성과 입장에 따라 판데믹의 경험이나 충격이 다를 것 같다.

 

염신규: 강도로 보자면 연구자 입장보다 시민의 입장에서 판데믹의 충격이 크다. 일상 자체가 달라진다는 어떤 체감이 크다. 처음에는 마스크를 두고 나오거나 그런 일들이 잦았던 것 같은데 이제 마스크가 몸의 일부가 된 것 같다. 적응하고 있는 거다. 또 다른 인상적인 것은 동네 풍경이 달라졌다. 동네 근처에 작은 휴양림이 있는데 주말에만 사람들이 찾던 곳이 판데믹 이후 평일에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온다.

 

연구자 입장에서는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민하게 되는데, 아직 어떤 인사이트가 쌓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백신접종이 시작되고 다시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막연히 기대하는 분위기가 감지되었는데 다시 감염이 확산되면서 과연 되돌아가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감염 속도 자체가 어떻게 보면 현대문명, 현대도시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인데. 이런 도시화된 삶에 대한 고민 없이 문제풀이식의 접근으로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고민을 하게 된다.

 

김성하: 몇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일상이 더 중요해졌다. 일상의 중요성을 망각하거나 옆에 밀쳐두었다면 이제 일상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구나 확인하게 되었다. 또 중요한 변화는 낯선 것이 익숙해졌다. 그동안 낯설고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현상들이 익숙해지고 있으며 반대로 익숙했던 것들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익숙함의 낯설어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낯섦의 익숙함, 익숙함의 낯섦이라는 두 가지 상반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염신규 소장의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한편에서는 회복, 되돌아가고 싶다는 간절함이 있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왜 돌아가야 하지?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부류도 있다. 현재의 변화와 새로움이 너무 즐겁고 좋은 것이다. 이렇게 상반된 태도, 가치 등이 판데믹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우리가 옳다, 익숙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 무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것들이 전환의 과정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방향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판데믹이 끝나더라도 이 전환의 흐름은 끊기지 않고 계속될 것이고 더 확산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회: 두 분이 연달아 일상을 화두로 제안하셨다. 일상은 문화정책에 중요한 요소여서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와 흐름에 대한 분석은 앞으로 문화정책의 중요한 과제가 될 것 같다.

 

양혜원: 문화정책을 연구한 이래 이렇게 광범위하게 단기적으로 모든 분야에 걸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외부 요인이 있었을까 싶다. 앞으로도 이정도의 영향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코로나19는 많은 것들을 바꿔놨다. 지금 온라인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처음에는 엄청난 부담도 있고 저항감도 있었는데, 어느새 너무 익숙해졌다. 작년에는 중반기, 하반기를 지나면서 코로나19에 대한 날카롭고 공통된 문제의식과 과제들이 이야기됐다면 올해는 다시 이제 기존의 과제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근본적 전환에 대한 모색들이 교착상태에 있는 것이 현재인 것 같다.

 

코로나19 관련 문화정책 연구과제가 많았는데, 주목할 점은 코로나19가 전 사회경제시스템의 근본적 결함을 드러냈다는 점, 문화예술 분야의 취약성을 명백하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문화예술을 다른 콘텐츠 영역과 구별하는 주요한 요소로 원본성, 복제불가능성을 주로 언급해왔지만 비대면 상황에서 온라인 콘텐츠 제작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이러한 구분 기준이 붕괴되는 계기가 이루어졌다. 반면 온라인 콘텐츠만으로 충족시키기 어려운 예술의 현장성(liveness), 관객과의 교감의 중요성이 부각되기도 했다. 문화예술 제작의 특성에서 비롯된 취약성도 지적되었다. 장기간의 준비과정이 필요하고, 국제교류가 많아졌다는 것, 밀폐된 장소에 최대한 많은 관객을 동원해야 수익을 얻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등등이다.

 

예술인들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 수준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이 그동안 많이 이야기되어왔지만 다시 한번 뚜렷하게 부각되면서 예술인복지정책이 주요 정책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예술분야가 심각할 정도로 높은 공공의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에 대한 자성과 위기의식도 같이 느끼게 되었다.

 

담론이라고 할 만한 내용들은 디지털경제, 디지털 전환이 본격화됐다는 것,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의 부상, 문화예술의 회복력(resilience)이라는 가치가 새롭게 재조명됐다는 것, 격리된 생활 속에서 생활문화예술이 또 다른 형태로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것 등이 담론적인 측면에서 특이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면 이게 그렇게, 과거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명백한 담론의 전환이라는 측면은 크지 않은 것 같다. 예컨대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의 경우 초반에 매우 중요한, 새로운 대안처럼 이야기되었지만 전 국민 기본소득이 시행되지 않는 한 예술인 기본소득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는 관점이 점점 설득력을 얻어가는 것 같다. 회복력에 대한 논의도 기존의 예술이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가치의 측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교착되어있다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드는 것 같다.

 

김상철: 한 가지를 꼭 집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판데믹 위기로 가리워져 있던 것이 드러난다고 하는데 여전히 은폐되어 있는 것들이 더 많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이를테면 K팝 시장에서 연습생들이라고 불리는 이들이 코로나 위기 속에서 어떤 변화를 겪고 있는지 듣게 됐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그동안 연습생을 육성하기 위한 비용을 공연수익으로 충당해왔는데 공연이 불가능해지면서 안 그래도 열악했던 K팝 시장에서 보이지 않는 연습생 구조가 깨지는 거다. 기존 7년 계약방식이 유지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위기가 터지면서 화려한 K팝 신을 만들었던 토대 자체가 무너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가 인지하고 있는 변화라는 것이 피상적일 수 있겠다. 지난 1년 간 체감하고 있는 변화라는 것이 현실을 바꿔내는 힘으로서의 물질적인 변화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 보면 관념적 변화에 불과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주목하게 됐다. 우리가 체감하고 있는 변화에 비해서 더 공고하고 더 변하지 않는 것들, 그것들은 왜 변하지 않는가, 위기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문화정책, 지원방식의 견고함은 변화하지 않는가 하는 거다. 여전히 은폐된 것은 은폐된 채로 우리는 피상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오히려 더 주목해야 되는 것은 변한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싶다.

 

 

 

모든 정책수단을 동원하여 최선을 다했지만,

- 수단의 적절성과 시의성

- 예술현장의 정부 종속 심화

- 문화정책 영역의 협소함

 

사회: 판데믹이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지만 이 변화가 과연 전환이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 이야기해주었다. 위기를 솔루션으로 접근하는 데에 대한 우려(염신규), 돌아가고 싶다와 돌아가고 싶지 않다의 갈등(김성하), 전환의 교착상태(양혜원), 은폐된 채 변하는지 않는 것(김상철) 등에 대한 지적이다. 벌써 쟁점이 좁혀진 것 같은데, 문화정책 대응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듣고 싶다. 판데믹 관련 문화정책 대응에 대한 분석과 평가 부탁드린다.

 

양혜원: 성과를 먼저 짚자면 다양한 정책들이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기존 창작준비금제도의 가치가 크게 부각되고 융자사업도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긴급지원금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지원이 이뤄지고 고용보험제도의 도입도 큰 성과라 본다. 창작지원과 관련하여 그동안 발표 중심 지원방식이었다면 리서치나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에 대한 지원으로의 전환이 시작됐다는 것을 중요하게 보고 있다. 여러 가지 한계도 분명히 있겠지만 온라인 비대면 콘텐츠 제작에 대한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시작됐다는 것들도 중요한 성과라고 보고 특히나 이번 코로나19 대응 관련 기존 복지정책, 고용정책, 중소기업정책 등 타 분야의 정책과 연계된 지원정책이 시도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문화예술분야의 위기대응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전국 차원에서 방역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하는 질병관리청은 있었지만, 문화체육관광부 차원에서는 그러한 대응시스템이 여전히 만들어지지 않았다. 특히 국공립문화예술 시설과 관련된 경직된 운영정책은 -물론 일부의 지자체는 매우 전향적으로 시설을 활용된 사례가 있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다. 좌석 간 거리두기로 최근에는 공연들이 진행되고 있지만, 일반 자영업, 호프집이나 음식점에 적용되는 방역지침과 공연장의 방역지침을 비교해 봤을 때 공연이나 전시가 상대적으로 더 안전할 수 있다는 목소리를 강하게 내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아쉬움이 있다. 예컨대 외국에서는 공연장에서의 감염에 대한 여러 실험을 통해 공연의 안전성을 보여주기 위한 캠페인을 시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러한 시도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구체적인 정책 수단과 관련해서는 시의성과 수단들이 정말 적절했느냐에 대한 논란들은 계속 남았던 것 같다. 관람료 지원사업은 처음에 발표됐을 때부터 많은 우려가 있었고, 우려대로 사업의 중단과 재개를 여러 번 반복했다. 사스나 메르스 사태 당시의 정책실패를 통해 관람료 지원사업이 이런 위기 상황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대한 정책학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예술뉴딜 프로젝트라고 이야기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발표되었을 때 우려가 컸고 여러 한계를 드러냈다. 사업절차의 혼란, 특정 집단에 지원이 집중되었던 점,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사회구성들과의 논의 과정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사업에 대한 이해 부족 등이 드러났다. 결과물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완성도나 질적 수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인력지원사업의 경우에도 현장 의견은 훈련되지 않은 인력들이 오면서 오히려 관리 부담이 커지고 정부에서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색내기 이상 되지 못한다는 지적들이 있었다.

 

온라인콘텐츠제작 지원이 대폭 이뤄지는 것처럼 발표는 됐었는데 실제로는 소액다건으로 진행됐었다. 주로 제작비 지원 방식을 취했고, 제작스튜디오, 촬영인력, 기술인력에 대한 컨설팅 등 인프라가 없다 보니 결국 소액의 지원금이 기술지원업체에게만 가고 예술분야의 창작자들한테는 실제로 가지 못했다는 그런 비판들도 여전히 많다.

 

김상철: 사실은 맞다. 정책의 다양성이 많이 만들어졌고 과거 같으면, 예술인 특혜논란이 있을 수 있었던 정책들이 어쨌든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수용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고민스러운 것은 그런 판데믹 대응 정책 과정에서 정부와 예술 간의 관계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는 것이다.

 

여전히 정부는 중립적이고 일종의 근대적 의미에서의 후원자의 위치에 놓여 있고 예술가는 이 위기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 혹은 도움을 통해서 생존해야 되는 대상, 그래서 오히려 예술정책의 대상화라는 것이 더 강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꽤 있다. 그것에 대한 리트머스라고 할까, 진단지표가 이 정부 초기에 블랙리스트 문제를 통해서 예술계에서 만들어지는 공통 감각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자유로운 예술생산 혹은 예술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장르를 벗어나서 공통감각으로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게 코로나 위기의 지원정책을 경유하면서 다시 장르별, 개인별로 파편화되고 있는 상황을 겪지 않았나 하는 고민이 있다.

 

예술과 정부가 맺었던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으므로 해서 다시 과거와 같이 직렬화되는 지원구조로 회귀하고 있다는 두려움이 있다. 현상적으로 놓고 보면 공공미술프로젝트 같은 경우 사업의 옳고 그름을 떠나 다양한 사회적 담론이 만들어질 수 있는 사건이 있고 그래서 많은 논쟁과 토론들, 이후의 정부의 예술지원정책에 대한 변화를 촉발시킬 수 있는 계기들이 있음에도 지나치게 조용히 넘어가고 있다. ·군구 단위로 4억 정도 사업비가 단기간에 지원되는 사업은 유례가 없는 지원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사회적으로 바라보는 관점, 혹은 토론이 너무 없다는 것이 의아하다.

 

그런 점에서 긴급구제정책이든, 사회적 솔루션이든 기본적으로 정부-예술() 간의 관계를 변화시켰느냐 했을 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부라는 전제가 아무 성찰 없이 작동하고 있고 예술은 어떤 형태든 간에 정부 종속성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예술생태계, 민간의 자율성 등은 왜 만들어지지 못했는가 고민이다.

 

논쟁적으로 이야기하면 블랙리스트 이후 계속 중요한 담론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예술인 권리보장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활 생존 등 위기를 표집하는 것과는 격차가 있는, 추상적 담론은 아닌가, 생활이나 창작이라는 구체성을 탈각한 예술운동담론이 갖고 있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이다. 뭔가 틈이 굉장히 벌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사회: 무엇과 무엇 사이에 틈이 벌어졌다는 것인가.

 

김상철: 이를테면 예술인 복지정책이라는 것이 주목받는 계기는 예술인의 삶인데, 예술인복지정책이 확장되면서 아주 구체적인 예술인 개개인의 삶이나 혹은 그런 특징들을 드러내기보다는 표층에 떠 있는 느낌이 든다. 구체성을 정책 안으로 넣으려면 그 구체성을 바탕으로 하는 예술단체운동이 있어야 한다. 예총에서 진행됐던 실태조사를 제외하고, 예술계에서 자체적으로 조사했던 실태조사가 있었는가. 이상하다. 왜 없었을까하는 고민이 든다. 정부와 예술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퇴행된 것 아닌가 하는 고민이다.

 

사회: 양혜원 님은 중앙정부의 판데믹 대응 문화정책을, 김상철 님은 정책의 파트너 내지 당사자라고 할 예술인과 예술현장에 대한 진단과 분석이다.

 

염신규: 예술인 정책은 문화정책의 일부고 문화정책은 그 대상이 훨씬 넓다. 지난 해 판데믹 대응은 현재 정부가 할 수 있는 거의 최대치를 했다고 본다. 아쉬움은 공공이 포괄하고 다뤄야 되는 영역이 훨씬 더 복잡하고, 정책이 다뤄야 할 삶의 단면들이 굉장히 많은데. 한국사회에서 어느 때부터, 전통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사실 문화정책이라기보다는 예술정책과 문화향유정책에 머물러 있다. 그 이상의 문화정책 솔루션이라든가 방법론 영역이 안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판데믹 상황에서 예술인들이 힘들고, 제 주위에도 힘든 예술인들이 많지만, 그 못지않게 문화적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시민들이 훨씬 더 많은데 시민들의 문화적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어떤 방법론이라든가 시도라든가에 대해서 상상을 하기도 힘들고, 어디서부터 상상을 해야 될지에 대해서 논의의 장도 없다. 대략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문화정책의 확장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과연 정책의 대상이라든가 영역을 넓혔는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판데믹에서 이 점에 대한 논의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인정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한국사회에서 예술인정책이라든가 문화향유정책 등이 케인즈주의 시대 전통적 복지사회 담론에 머물러 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그와 같은 수정자본주의 시대의 사회복지모델이 위기를 맞고 있다. 물질적 한계(예산의 한계)와 사회적 참여를 포함한 시민 주도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 담론을 넘어선 다른 형태의 복지라든가 사회적 해법 대한 단편적 의견들은 나오고 있는데 전환에 대한 고민은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한국정부와 공공이 판데믹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것은 맞지만, 전통적 복지사회 안에서의 최선이라고 느껴진다.

 

이 사회체제 자체가 판데믹과 무관하게 계속 90년 후반부터 위기를 맞고 있다. 판데믹 상황에서 각국이 겪고 있는 사회문제들, 문화예술뿐만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이 이런 사회적 변화가 왔을 때,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여기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방법론이 충분히 갖춰지지 않았다는 측면이 있다. 한국 사회 역시도 비슷한 길을 따라가고 있는 상황에서 현재의 방법론에 대해서 당연히 고민하고 디테일을 다듬어야 하는 문제도 있겠지만, 전통적 복지국가 체제 이후의 사회적 변동을 조망하면서 문화정책·예술정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라는 다소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김성하: 낯섦의 익숙함, 익숙함의 낯섦, 이 과도기적인 과정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현재의 상황이 교착일 수도 있고, 실타래가 풀어진 또 다른 새로움을 향한 단초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느 곳으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을 구분하자는 의견에 굉장히 공감한다. 나 역시 오래전부터 주장했던 바다. 물론 문화와 예술을 구별하는 것과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을 구별하는 것은 다르다. 대부분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을 구별해서 정책적으로 접근할 때는 문화와 예술이 다른 것인가하는 질문이 나온다. 문화와 예술은 다르다. 그러나 한편으로 문화와 예술은 다르지 않다.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문화정책의 확장성과 연결하여 생각해본다면, 과연 한국에는 진정한 문화정책이 있었는가하는 의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문화정책이 없어서가 아니라, 문화정책이라고 시행된 많은 것들이 실은 예술정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문화정책은 예술정책을 포함한 보다 확장된 의미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인위적으로라도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을 구별해서 별도로 접근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문화정책은 무엇에 집중해야 할 것인가라고 했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문화와 예술이 본질이며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을 수단으로만 생각함으로써 정책의 본질적인 부분을 간과한 측면이 크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진흥이라는 표현을 예로 들어보면, 진흥이라는 말이 문화와 예술을 수단화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흥발전이라는 개념은 결국 양적 접근을 유도할 수밖에 없다. 발전과 진흥을 해야 하니 격차가 보이고, 목표를 세우고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곳이 보이는 것이다. 또한 그걸 점검해야 하는 문화부에서 실태조사하고 문화지수 만들고 지역과 문화발전에 대해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문화정책이 그런 것인가. 물론 다름과 격차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격차를 정책적으로 드러내고 이를 해소해서 문화예술 혹은 지역문화를 진흥시키자는 그 관점 자체가 이제는 다른 관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 이것이 앞서 이야기했던 판데믹을 통해서 우리가 익숙함이 낯섦으로 가는 것, 그리고 낯섦이 익숙함으로 오는 것의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관점의 변화는 어려운 일이다. 변화가 낯설고,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세대 간 차이도 있다. 물론 세대가 같다고 동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평균적으로 본다면 지금 50대 이후의 세대는 이미 단체생활에 익숙해 있다. 조직이라는 것. 단체라는 것은 중심이 하나일 수밖에 없다. 하나의 중심에 모든 것이 꿰어져서, 질서 정연하게 맞춰 돌아가는 구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런 것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판데믹 상황이 굉장히 힘든 것이다. 그래서 자꾸 과거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사람도 못 만나고 비대면이라 어색해지기만 한다. 반면에 지금 젊은 세대는 판데믹과 무관하게 온라인 디지털 환경에서 자라온 세대이다. 이들에게는 온라인에서 접촉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반면 기성세대들은 판데믹 이후 문화예술정책의 가장 큰 변화가 무었이냐 물으면 디지털이라고 한다.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것은 비대면이라서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부터가 한계다. 온라인은 비대면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또 다른 대면이다. 우리가 지금 줌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 역시 또 다른 대면이다. 같은 공간에서 어떤 매개 없이 직접 접촉하는 것만을 대면으로 생각하는 사고, 가치관이 바뀌어야 된다. 앞서 하나의 중심만을 익숙하게 생각하는 관점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를 정책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면, 정책 설계자, 입안자, 실행자가 정책 대상자들을 수혜자로 보는 중앙집중적이고 하향적인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또한 문화민주주의, 문화자치, 포용정책 등 여러 개념들이 문화정책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도 돌아봐야 한다. 예를 들어 문화자치라고 하면 그에 대한 이해나 충분한 논의 없이 시행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문화자치라는 의미가 무색하게 여전히 중앙집중적이고 하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판데믹과 관련한 문화부 정책사업들의 경우도 결국은 다 하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것들이 바로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들이다. 이러한 관점의 변화는 문화정책을 예술정책과 분리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첫 번째 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판데믹이 드러내는 문화정책의 한계

 

사회: 판데믹 대응 정책을 진단하면서 현재 정책환경의 한계, 정책의 경직성, 문화정책 담론과 시선의 협소함 등을 지적했다. 이러한 진단들은 판데믹 이전에도 논의되어오던 것이다. 문화정책의 이러한 문제적 지점들이 판데믹 상황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특히 문화정책의 확장성과 연관하여 이야기를 이어달라.

 

염신규: 문화예술정책이 무엇인가, 혹은 문체부가 어떤 일을 하는 부서인가, 문화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가, ‘진흥하는 부서인가 아니면 사회정책을 펴는 부서인가에 대한 고민이 늘 있다. 문화예술정책이라는 게 문화와 예술을 진흥하는 정책인가, 아니면 사회적 규범을 조정하는 사회정책의 영역에 속하는 것인가 고민을 하는데, 문화정책이 어느 시점을 지나서는 사회정책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는 집중적인 고도성장사회를 거치면서, 한국사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이런 과정을 거친 사회들이, 문화정책이 진흥정책이라든가 발전을 위한 방법론으로 인식되는 측면이 있다. 국민국가가 수립되는 시점에 대부분의 지도자들이 국민국가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문화를 강조한다. 그런 점에서 발전단계에서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이제 한국사회가 그런 단계에서 벗어나야 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문화를 발전의 수단, 도구로 보는 시선이 강하다. 판데믹과 관련하여 다양한 문화적 변동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보면 지금 일어나는 문화적 변동은 코로나 이전부터 진행돼 왔던 것들이 판데믹에서 더 명료하게 드러난 것인데, 이에 대한 공공적 대응이라든가 고민이 별로 없다는 거다. 판데믹을 맞닦드리고 나서야 문화정책을 통해 지금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사실 불이 나야 불을 끄지 않나. 판데믹은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상황이고 원하지 않는 상황이지만, 이 상황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사회정책으로서의 문화정책 역할이라든가 지향에 대해 지금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이때를 놓치면, 이 상황이 익숙해지면, 또다시 이야기하기 힘들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양혜원: 문화정책이 협소하다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문화정책 영역은 예술정책 외에도 문화 일반을 아우르는 문화정책 영역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부서관장도 되어 있다. 문제는 부서 사이에 연계나 통합적 관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문화도시 사업도, 제안되고 진행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문화예술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문화정책이 맞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현장에서는 다른 분야와 다양하게 연결하고 융합하고자 하는 시도들도 많이 이뤄지고 있다. 그래서 확장성이 현안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김상철 : 논의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의 미끄러짐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 그거는 주어진 조건이 아니라 만들어낸 구성물인데, 그게 정부나 몇몇 관료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정부의 움직임과 문화예술계라고 하는 민간이 서로 손바닥을 마주쳐서 만들어낸 거다.

 

그러면 바뀌지 않는 것은 대체 뭐냐라고 했을 때, 단순히 정책을 수립해서 집행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흥체계가 유리했던 예술생태계 구조를 좀 봐야 할 것 같다. 왜 변화라는 것이 현실과 박리되냐는 거다.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변하지 않는 견고함이 드러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싶다.

 

첫 번째는 문화정책이나 예술정책의 구분과 관련해서 구체적 분석이 필요하다. 좀 더 직접적으로 정책 혹은 지원체계 내에서의 기득권 구조나 엘리트 구조가 있는 것 아니냐,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담합구조가 있는 것 아니냐, 특히 예술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아카데미를 통해 만들어지는 예술생산구조가 사실은 이 지원체계의 핍진함, 아주 몇 개 안 되는 그 지원구조의 생태계와 딱 붙어서 사실 그렇게 자생적으로 발전돼 왔던 진흥체계가 존재하는 것 아니냐 하는 질문이다. 이 지체, 혹은 박리에 대해,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 좀 더 미세하게 해부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온택트라고 불리는 디지털 기술이 수용이 아니라 강제라는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예술을 수용하는 태도, 예술을 생산하는 과정에서 디지털 문화, 새로운 과학기술과 관련해 논쟁이 시작도 안 되었다. 어떻게 하면 예술생산을 과학기술을 접목해서 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수용하는 시민들은 어떻게 과거와는 다른 예술경험을 할 것인가 등등의 논쟁이 시작도 되기 전에 강제된 상황이다. 지금쯤 필요한 건 다시 돌아가서 좀 더 균형 있는 대면과 비대면의 관계를 만들어 주고, 이것에 대한 사회적 논쟁들을 할 수 있는 여지를 줘야 되는데 지금은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전환, 혹은 변화라고 하는 것은 강제하는 힘이 더 센 것 같다. 다수의 예술인들이 공룡처럼 멸종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손쉽게 세대문화 등으로 접근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술창작 혹은 예술생산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 측면에 조금 더 주목해서 그것들이 새로운 과학기술의 변화나 이런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어떤 시간을 만들어야 되는 것 아니냐 하는 고민이 있다.

 

그러면서 좀 더 논의들을 구체화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건데 한 가지 단서는 이런 거다. 예술이나 문화라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논쟁이 됨에도 불구하고 왜 각 지역에 있는 도시들은 문화도시를 하지 못해 안달일까? 왜 예술인들이 때때로 기획자가 돼서 그런 개발사업에 등장하고 있을까. 노골적으로 지적하지 못하는 소위 담합구조라는 것이 그 이면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고 싶다.

 

김성하: 김상철 님이 지적한 담합구조에 일견 동의하면서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보고 싶다. 예술인 혹은 예술창작활동 지원사업들에 참여하는 예술인들만을 예술인으로 볼것인가? 이러한 질문이다. 예를 들어 예술인기본소득을 살펴볼 수 있다. 예술인기본소득에 대해 연구하고 토론하면서 끊임없이 이야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예술인기본소득은 궁극적으로 국민기본소득을 지향하는 하나의 과정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완결된 정책으로 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예술인을 한국에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즉 예술인 기본소득의 첫 번째 논의 주제가 예술인에 대한 정의이다. 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증명을 근거로 예술인을 규정할 수 있다는 주장은 행정적으로 간명하고 법적으로도 문제없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예술인기본소득을 시행한다고 할 때 예술인기본소득의 취지에 적합할 것인가라는 물음에는 예라고 대답하기 어렵다. 현장 토론에서 확인되는 바다. 담합구조 안에 들어와 있는 예술인도 같은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담합구조에 들어와 있지 않은 다른 예술인들, 다시 말해 이를 하나의 울타리라고 본다면 울타리 바깥에 있는 예술인들은 정책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술정책에서의 확장성은 이런 울타리, 즉 담합구조를 넘어가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상철: 담합구조는 명시적인 것은 아니다. 다만 장르별로 집단화되어 있는 구조들인 것 같다. 공공미술프로젝트 같은 경우도 사실 미협이라는 특정한 단체 지부를 통해서 전달체계를 구축한 거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년 판데믹 위기 상황에서 지원정책 역시도 가장 제도화된 장르별 협·단체 지원체계를 그대로 답습했던 측면이 있다. 그게 김성하 님이 말씀하신 울타리라고 부를 수 있는 거고 좀 더 노골적인 표현으로는 담합이라고 했던 거다.

 

 

 

국가와 예술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

 

사회: 앞서 판데믹 이후 공공정책 의존이 높아지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어느 때보다 예술과 국가정책, 현장과의 관계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가 중요한 의제가 되었다.

 

김상철: 문화정책의 확장성이라고 할 때 가장 큰 딜레마는 변해야 할 대상이 그 확장성을 만드는 주체이기도 하는 역설에 있다. 작년 올해 문화예술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논쟁을 보면 결국 변화의 당사자가 곧 변화를 이야기하기도 하는 역설이 있다. 자기 변화의 가능성 계기들이 사실은 행정영역에서든 생태계 내에서든 촉발이 돼야 하는데, 지금은 거의 때와 장소에 따라 변신하는 형태로 대응하고 있다. 오늘은 예술인이 아니라 이런 입장에서 이야기하겠다는 변신이다. 주체들 스스로도 이 과정에서 좀 더 총체적 종합적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선택적 태도를 취한다.

 

국면의 전환이 필요한데, 문화예술인() 스스로가 왜 정부의, 혹은 공공의 자원을 바탕으로 해서 이 예술창작활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해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해명이 취약하다. 현장에서는 그런 것까지 구구절절 설명하며 지원받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공공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당화의 과정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설명을 해야 한다. ‘네가 그걸 왜 받아야 해?’ 할 때 해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해명하는 것 자체가 구차해라고 해버리면, 대화가 안 되는 거다.

 

지금 문화정책의 확장, 공공예술정책의 전환이라고 했을 때 예술생태계 내 주체의 자기해명, 자기 정당화의 필요성을 좀 더 강조하고 싶다.

 

염신규 : 몇 가지 말씀드려야 오해가 없겠다. 일단 제가 앞서 쓴 확장성과 김상철 님이 말한 확장성은 서로 조금 다른 의미인 것 같다. 예술지원의 영역을 넓혀야 한다, 울타리를 깨부숴야 한다는 측면의 확장성을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예술정책이 문화정책에 포함되어 있지만, 문화정책은 더 많은 부분을 이야기해야 함에도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양혜원 님 의견에 대해서는, 정부에서 다양한 영역의 문화정책을 개발·발굴하고 있는 것 알고 있다. 다양한 연구, 다양한 정책 시도하고 있다. 문제는 중앙정부는 굉장히 다양한 영역을 다루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정책이 집행되는 현장으로 갔을 때는, 전통적인 예술정책이나 전통적인 문화행정으로 환원이 되어 버린다는 거다. 물론 전통적인 방법을 쓰면서도 새로운 정책적 지향을 담을 수도 있는데, 그것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가 라는 고민이다. 결국 양혜원 님이 지적한 연결성, 관계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정부에서 생각하는 것만큼, 다양한 정책 목표가 정책이 집행되는 단계에서는 담기고 있지 못하다. 분명히 고민해 봐야 할 부분이다.

 

담합구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국가와 예술가란 존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있다. 후원하는 자와 후원을 받는 자의 관계가 있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근대 국가와 근대 예술가는 존재론적 측면에선 매우 불편한 관계이기도 하다. 국가가 강제하는 이데올로기 측면에서 예술가는 단순히 예술품을 만드는 게 아니라, 예술이라는 작업을 통해 (어떤 면에서 보면) 국가와 근본적으로 불화할 수밖에 없는 측면도 존재한다. 이런 것들은 사실, 기존 예술정책영역에서는 포섭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하다. (극단적) 예를 들어 1960년대 프랑스 상황주의자들의 문화적 액션은, 국가라는 이데올로기 장치와 완전히 대결하는 방식의 예술을 상상했다. 물론 꼭 그런 예술, 그런 예술가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와 국가가 갖는 스팩트럼이 현재의 문화정책에서 주로 상상하는 지원-수혜의 관계 이상으로 복잡한 것은 분명하다.

 

현재의 문화정책에선 국가와 공공이 예술, 예술가의 넓은 스펙트럼 중 일부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그런 식으로 예술가를 인지하는 것이 고착되는 것에 우려가 있다.

 

양혜원 : 정책수단이 다양하다는 것과 정책수단이 적실하지 못하다는 것, (정책은 만들어졌지만) 전달과정 상에서 변질되는 것은 각각 다른 문제다. 공공미술프로젝트 같은 경우 대표적 실패사례로 꼽고 있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코로나로 인한 위기상황에서 시각예술 분야에 큰 재원을 투입해서 구제한다는 긴급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가이드라인을 간소화해서 예산을 지역으로 투입했던 것이다. 그런데 지역 현장에서 자율성으로 남겨두었던 영역이 부정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됨에 따라 정책실패가 발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김상철 님 지적과 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정부정책이 완성도 있게 설계되지 못했고 급하게 실행되었다. 위기 대응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아쉬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 문화예술계가 처한 위기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한 (중앙정부 이외의) 민간-현장-지역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과연 민간 영역이 제대로 작동했는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면 무엇이 문제인지, 이런 질문도 해볼 필요가 있다.

 

민간에서도 물론 다양한 대응이 있었다. 자치규약처럼 방역 매뉴얼을 만들고 온라인 포럼도 많이 진행되었다. 다양한 담론들이 제출되고 논의되었다. 문제는 그런 여러 이야기들이 너무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좋은 의견,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었었지만, 공중으로 흩어져 버렸다. 하나의 응집된 목소리로 정책에 와 닿지 못했다. ·관 합동으로 비상관리위원회를 만들자, 위기대응시스템을 만들자, 자조적 공제조합 만들어보자 등이 초반부터 이야기됐었지만, 제안 이후 답보상태다. 지금의 교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민간의 실천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문화예술활동에 대해서도 이것이 생계이고 직업이라는 접근도 필요하다. 좌석 간 거리두기 정책 등에 대해 정부가 해결해야 할 점이 있다. 또 하나는 인프라와 관련된 것들이 중요할 것 같다. 기존에는 시설조성사업이 인프라 사업으로 거론되었다면, 온라인 컨텐츠나 기술융합과 관련한 인프라 조성사업들이 필요하다. 영세한 예술단체들도 이용할 수 있는 제작스튜디오나 공간들을 도처에 마련해서 시설이나 장비들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기술 관련 교육을 제공하고, 전문가를 매칭시키는 등, 이런 부분들이 국가나 공공이 제공해야 할 인프라가 아닌가 한다.

 

김민규: [문화정책리뷰] “삶의 양극화인가, 희망의 양극화인가에서 판데믹이 사람들의 일상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살펴보았다. 10년 간 여가문화, 문화생활 데이터를 살펴봤다. 데이터의 한계가 있지만, 판데믹 이후 여가문화생활의 변화가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으며 갭이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보였다. 경제적 상층에서는 큰 변화가 없으나 하층에서는 위축되고 있다. 삶의 양극화가 문화생활의 양극화로 더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하층은 체념에 가까운 상태로 가는 거다. 문화산업 포함 예술시장의 규모로만 보자면 큰 변화가 없거나 오히려 더 증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내부에서는 이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구간을 나눠서 볼 때 문제가 심각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 안전망, 복지정책 틀로 문화정책을 보는 것의 한계나 여러 문제가 있지만, 판데믹에서 많이 논의되었던 사회적 안전망처럼, 문화적 안전망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이제 정말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에서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을 화두로 고민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생산이든 유통이든 수용이든. 이와 관련하여 문화예술에서 매체를 좀 다르게 접근해 보는 것-디지털, 기술적 측면 등-도 문화예술정책과 관련해 필요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정책 소통의 채널문제는 (굉장히 오래 전부터 이야기되어 왔는데도) 여전히 잘 안 되고 있다. 우리가 지난 1020년 동안 무엇을 해왔나 싶다. 도대체 현장과 행정의 소통문화제는 20년도 훨씬 전부터 이야기되어왔던 거다. 그간의 과정을 반성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인프라 관련해서는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SOC 고민해나 하나 싶다.

 

 

 

취약한 거버넌스 구조

 - 기후위기와 디지털 환경,

 - 공적영역 vs 사적영역,

 - 판데믹은 위기인가

 

사회: 지금까지 판데믹 이후에 대한 여러 진단을 이야기했다. 그간 기획해온 특집: 판데믹 이후, 전환 위한 의제는 새로운 미래를 어떻게 구성할까 보다는 판데믹이 드러낸 우리의 현재를 어떻게 이해할까에 가까웠다. 여전히 우리는 판데믹 한복판에 있다. 아직 우리는 조망하는 위치에 있지 않다. 오늘의 이야기도 그와 같은 맥락인 것 같다. 공공정책에 대한 의존의 심화와 관련하여 국가와 예술, 국가와 시민, 문화정책에서 국가의 역할 및 현장의 역할 등에 대한 논의를 이어주어도 좋겠다.

 

김상철: 이런저런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입장에서 말하자면, 결국 거버넌스는 자임과 관련된 영역이 있는 것 같다. 행정 쪽에서는 거버넌스 하고 싶어하는데, (중요한 것은) 파트너들이 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더 현장이야기 많이 들으세요라는 식이다. 그러면 행정에서는 도대체 그 현장이 어디 있습니까’. ‘당신들이 게을러서 모르는 거지. 찾아보세요.’ 이렇게 해 버리면 돌고 돌아 결국에는 행정의 주도성으로 나타나는 역설이 생기는 것 같다. 이것이 각각의 영역에서 대표성을 가지고 정책과정에 참여하는 예술인들한테는 일종의 면책구조가 된다.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이미 관행화된 취약한 거버넌스 구조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기존의 협·단체 구조를 비판하는 것은 쉬운데, 그것을 벗어나는 현장의 대표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부분에서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일단 자임을 하자는 것이다. 정책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각자가 얼마만큼의 대표성을 갖고 있냐의 문제가 아니라,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는 공적 책임을 자임할 필요가 있다. 꼭 강조하고 싶은 점이다.

 

공공부분 예술지원정책, 특히 위기상황에서 정책의 변화라 했을 때, 좀 주목해 보고 싶은 것은 공동재원을 만드는 방식이다. 외국의 코로나 대응 정책을 보면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게 공동재원을 만드는 방식이 우리와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만 하더라도 연방예술기금의 총액을 늘리는 방향의 예산논의를 연방의회에서 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한국은 예산논의 방식이 여전히 장르별로 지원정책을 나열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동의 자원을 더 만드는 방식으로 이 위기에 다른 지원정책이나 내용들을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해 봤으면 좋겠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경우 워낙 장르별 지원체계가 공고하다. 지역에 있는 각각의 문화/공연시설도 복합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장르별로 칸막이가 있다. 어떻게 하면 그런 공간들을 공유자원화 할 것인가 하는 전략들도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사회: 김상철 님은 일관되게 정책에서 현장이 어떻게 주체로 개입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양혜원: 판데믹 이후 전환 의제를 꼽는다면 환경인 것 같다. 민간에서 좀 더 다양한 활동들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정부 문화정책으로 환경에 대한 움직임을 담아내려고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까지는 매우 부족하다. 한국형 뉴딜사업에서도 그린뉴딜에 문화예술 쪽은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기후정의, 탄소제로, ESG(기업의 비재무적 요소인 환경(Environment)·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 관련 논의들을 지원사업에 하나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는 등 적극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기술과의 융합과 관련하여 디지털 격차(divide)가 향유자 관점에서만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창작자들의 디지컬 리터러시, 디지털 접근성 제고를 위한 인프라 조성 등에서 정부 역할에 대한 공감대가 넓혀져 지면 좋겠다. 기존 균특회계(국가균형발전특별회계)의 인프라 조성이 문화시설 지원이었다면, 디지털 인프라에 대한 재정지원도 중요하게 고려가 되어야 할 것 같다.

 

민간 또는 예술 부문에서 MZ세대, 굳이 MZ세대로 한정할 필요는 없겠지만, 넷플릭스, 유튜브 등 디지털 매체로 소통하는 이들에게 예술의 메시지, 예술적 표현들을 어떻게 그들의 감성에 닿을 수 있게 할 것인가에 대한 좀 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 표현들이 좋으니까 알아서 봐줄 거야, 이런 접근은 안이한 생각일 수 있다. 좀 더 전략적이고 기획적인 부분들에 대한 고민들이 좀 더 많이 진행되어야 할 것 같다.

 

심리치유, 마음치유, 혐오와 갈등의 해결 등 문화예술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여전히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다. 예술치료가 아니라 치유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그보다는 치료의 전문성을 더 접합하면서 타 분야와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확장시켜가는 자세와 전략이 필요하다.

 

사회: 판데믹 이후 논의의 교착상태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에 대해서도 좀 더 이야기해달라.

 

양혜원: 민간 영역에서 다양한 논의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다양성을 정책으로 응집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정책은 뭐든지 해내야 되는 상황이다. 판데믹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정부는 계속 대응책을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다. 이때 합의된 응집된 목소리가 정책(정부 씬)에 와닿는다면 정부는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합의된 목소리로 와닿지 않는다는 게 가장 안타깝다. 앞서 김성하 님도 이야기했지만, 이 교착상태가 새로운 전환을 위한 준비기, 과도기라 생각한다. 과도기가 전환으로 이어지는 데에 민간과 현장의 움직임이 중요하다. 민간과 현장의 움직임이 없다면 전환은 절대로 오지 않는다 라는 두려움과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염신규: 조금씩 결이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고민인 것 같다. 현장의 공공의존성의 문제는 문화정책이 해결해야 할 주요한 과제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사업을 만들어서 예산을 투여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로 기획된 방법론이 적용되어야 한다. 누가 답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고민해야 한다.

 

다만 이런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까지 공공과 민간,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이야기할 때, ‘공공을 곧 정부민간을 곧 시장으로 보는 시각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문화정책 환경을 봐도 정부만 공공영역인 것도 아니고 민간에 시장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은 문화 안에서 굉장히 복잡하게 섞여 있다. 상호침투 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공공의존성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다. 공공을 정부-그것이 중앙정부든 지방정부든-로 인식하면서 다른 공공영역에 대한 상상조차도 이루지고 있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정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너무 많은 부분을 정부가 책임져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오롯이 시장의 질서에 의해서만, 거래에 의해서만 모든 것이 결정되는 시스템이다.

 

전세계적으로 1990년대 후반부터 국가는 완전한 존재인가라는 회의가 제기되고 있다. 사회적 경제라던가, (복지국가 모델 이전에 존재했던) 자조적 방법론들이 다시 서구사회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이런 것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적 경제가 한국 사회에서는 지나치게 기능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본래는 단순한 솔루션 혹은 기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공공성의 영역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을 전제해야 유의미하다.

 

한국사회 문화정책의 영역에서 (김상철 님이 언급했던) 거버넌스 문제 등은 당사자성 내에서 공공성을 형성하는 계기 없이 정부에 계속 의존하는 구조로 간다면 현장이 바라는 건 많고, 정부는 다 해 줄 수 없는 이러한 교착상태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공유에 대한 민주적 룰을 당사자 스스로 만드는 것을 전제로 한 공유재, 공유자원을 형성하지 않는다면 지금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사회적 변화에 거버넌스의 불화가 쉽게 사라지기 어렵다고 본다.

 

거버넌스에서 대표성에 대해 집착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나 생각한다. 과연 누가 누구를 대표할 것인가. 어떤 협·단체가 우리를 대표할 것인가. 대표성을 가지고 접근하는 순간, 거버넌스 활성화의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지금 상황에 맞는 거버넌스는 서발턴 등 이야기하지 않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로를 거기서 찾아야 한다. 오히려 대표성보다는 소수의 당사자성을 강조하는 쪽으로, 결국은 거버넌스나 이런 것들도 뭔가 전체를 아우르겠다는 것이 아닌 다른 시도가 필요하다. 물론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전체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겠지만, 그런 방식이 강조되다 보면 결국은 이게 거버넌스인가라는 회의가 들 수밖에 없다. 결국은 작은 거버넌스를 여러 개 만드는 방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한다.

 

그래서 문화정책의 주도성, 문화부가 책임지는 부분이 크게 존재한다면 그 구조를 쪼개는, 그래서 작은 단위들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작은 단위들이 위기 대응력이라든가, 자기책임성의 문제라든가 등에서 조금 더 원활한 구조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 당장 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논의는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회: 의견이 갈리는 것 같다. ‘전환을 위한 통합적 관점(목소리)이 필요하다’(양혜원), ‘대표성은 없다(염신규)’ 이렇게 나뉘는 것 같다.

 

염신규:대표성이 없다기보다 대표성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하면 안 된다는 의미로 수정하겠다.

 

김성하: 지금 정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 사업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한국에 정책은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정책을 기획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사업을 기획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이다. 판데믹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판데믹과 관련한 사업은 많았으나 과연 판데믹 관련한 정책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정책이란 것은 무엇인가. 판데믹 상황이 왔을 때 모두 문화예술계 위기를 이야기했고, 위기상황을 맞아 위기극복을 위한 사업들을 준비하고 시행해 왔다. 사업에 대한 평가는 있었지만 판데믹 상황에 대응한 정책에 대한 평가는 있었는가?

 

정책적 접근이라면, 판데믹 상황이 과연 우리에게 위기인가 아닌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진단할 것인가에서 정책이 출발하고 그에 따라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업이 기획되어야 한다. 그런데 과정 없이, 사업-정책 구별 없이 정책이 사업이고 사업이 정책이 된 상황이다. 판데믹은 위기다라고 진단을 해버리고 그에 따라 어떤 지원사업을 만들자, 이런 식으로 전개되어 온 것은 아닌가?

 

판데믹이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 상황이었다고 한다면, 기존과는 다른 정책적 시각이 이야기되고 논의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결국 정책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사업의 변화만 있었다. 와인을 와인병에 담는데, 와인 색이나 맛에 대한 고민보다는 와인병만 바꾸려고 한 것은 아닌가? 전환이라고 한다면, 사업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업과 정책을 근본적으로 재접근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말 판데믹이 위기인가에서부터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앞서 낯섦의 익숙함, 익숙함의 낯섦을 거론하며 과도기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위기라고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분명히 뭔가 변화가 오고 있다. 그렇다면 판데믹이란 상황은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집단의 중심이 느슨해지고 개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 다자에서 소수자로 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시점이 판데믹 상황에서 더 부각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서부터 정책적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과연 위기로만 볼 것인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판데믹이 기회가 될 수도 있는 것인데 위기로만 보고 있었다. 판데믹 이후 전환 의제는, 이러한 정책적 접근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두 번째는 (앞서 이미 이야기가 나왔지만) ‘발전과 진흥의 개념에 내재하고 있는 격차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지역문제도 결국 격차의 시선으로 지역을 나눠놓고 지역 간 격차 발생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격차가 없는 곳이 어디 있는가. 개인으로 예를 들어 보자.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은 격차가 있다. 오늘 아침과 지금, 오늘 저녁 사이 격차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격차가 아니라 다름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다름을 격차로 이야기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문화정책을 이야기하며 다름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격차를 이야기한다. 격차가 아닌 다름을 문화정책에 반영한다면, 문화진흥이 아닌 다른 개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문화에는 격차가 아니라 다름이 있는 것이다. 문화는 그 자체가 문화인 것이다. 담론 차원이긴 하지만 판데믹 상황에서 이러한 전환 의제가 다루어져야 한다.

 

담론차원의 이야기를 하나 더 하자면, 현재 문화정책에서 등장하고 있는 포용이라는 개념에 대한 검토이다. 문화에서 포용이라는 개념이 적합한 것일까? 포용 incluslve’에는 중심적 주체가 내재되어 있고, 중심적 주체가 대상들을 보듬어 안겠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정책으로 이야기하자면 그 주체는 국가, 중앙정부가 된다. 중앙정부가 주체이고 나머지는 정책대상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정책대상들을 바라보면서 이 대상들을 어떻게 지원해야 할까?’, ‘지원해서 극복시켜야겠네같은 피해자 구제와 같은 접근을 하게 되는 것이다.

 

거버넌스 논의와도 연결된다. 거버넌스의 대표성, 염신규 님이 한발 후퇴하셨는데 그러실 필요 없다고 본다. 대표성representation은 이미 20세기 초반에 종결이 난 개념이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21세기 초에 아직도 대표성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한국사회가 아직도 얼마나 뒤처져 있는가를 반증하는 사례라고 본다.

 

거버넌스와 관련하여, (행정은 더 적극적인데) 현장 참여자들의 유보적인 태도가 문제라는 의견이 있었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현장에 가서 들어라이런 얘기를 했을 때, ‘더 이상 어떻게 더 현장에 가느냐라고 행정이 답을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면 행정은 현장에 잘 가지 않는다. 현장에 있는 대표성을 가진 사람들을 행정영역으로 불러들여 이야기를 들었으니, 현장의 이야기를 들었다라고 한다. 그런데 현장에서 행정영역으로 온 사람들은 진정한 대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진정한 대표성은 현장 그 자체에 있지 않을까? 그러므로 행정은 현장으로 직접 가야 하며.. 현장에 가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의견을 들어야 한다.

 

앞으로 이러한 변화가 필요하다. 거버넌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거버넌스를 잘못된 시각으로 구성하고 꾸려가는 게 문제다. 한 예로 경기도에서 문화자치조례를 제정했다. 4년 전부터 준비해서 올해 발표가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계속 의원, 행정영역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불러들이지 말고 현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추진 과정에서, 설익고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현장으로 가는 상황들을 많이 만들었다. 그래서 경기도 시·군 현장에서 활동하고 계신 분들과 만나 4번에 걸쳐 회의를 하면서 작업을 해나갔다. 행정에 계신 분들의 자세가 전과 달라진 것을 엿볼 수 있다. 불러서 듣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가서 듣겠다는 자세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문화정책에서 자기중심적인 관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정부가 그래야 한다. 모든 것은 중앙에서 계획하고 지방(현장)으로 내려보낸다, 그러고서 중앙에서는 현장이 뭔가 적극적이지도 않고 자율적이지도 않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시각이 변화해야 한다.

 

 

거버넌스 주도성, 현장 대표성의 새로운 구성

 

사회:판데믹은 위기인가라는 질문이 인상적이다. 판데믹 이후 전환과 관련하여 현장의 대표성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전환을 위한 의제만큼이나 전환의 동력에 대한 고민이 깊은 것 같다. 전환 동력 자체가 의제이기도 하다. 계속 이어서 이야기해보았으면 한다.

 

양혜원: 이미 어느 한 단체가 대표성을 가지고, 논의의 장에 참여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는데 모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100인이 이야기하고 100인의 의견이 모두 달랐을 때, 정부정책은 어떤 의견에 따라야 하는가. 다양한 의견들을 어떤 방식으로 모야내야 하는가 이다. 이에 대한 논의로 나아가야 하는 시점인 것 같다. 이에 대한 의견이 궁금하다.

 

김상철: 김성하 님 이야기를 들으며, 한 편으로는 통쾌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동의되지 않는 점이 있다. 뭐냐 하면, 김성하 님이 이야기한 현장으로 가라혹은 행정은 단한번도 현장에 온 적이 없다등은 현장 예술인들한테 가장 많이 들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역으로 왜 행정이 현장에 와야 하는지 모르겠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 행정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통쾌하기는 하나, 거버넌스의 주도권을 행정에 주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양혜원 님의 이야기를 이어가면, 결국에는 행정이 유능해지길 바라는 것보다, 현장을 잘 이해하는 행정이라든가 1~ 2년이면 보직이 바뀌는 행정의 변화를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논의 자체를 민간이 주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예 주도권 자체를 찾아오는 방법들이 훨씬 더 중요한 고민인 것 같다. 왜 그것을 행정에게 요구하는가가 아니라, 그것을 우리 쪽에서 어떻게 주도권을 갖고 올 것인가하는 논의로 가는 것이 훨씬 더 맞다라는 생각이다. 쟁점이 굉장히 많아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좀 정리해서 글로 좀더 정치하게 토론을 해 봤으면 좋겠다. 특히 문화예술정책 생산 관련한 거버넌스 구조는 이후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다.

 

한 가지 덧붙이면, 소위 대표성은 부정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대표성이 구성되는 원리다. 지금처럼 대표성은 없어라고 해 버리면 거짓말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국회의 권위나 지방의회의 권위를 벗어나면서 정책이나 사업이 가능한가. 왜 작동되지 않는 가상의 가치를 가지고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중요한 점은 대의적 대표성을 압도할 수 있는 현장의 직접적 대표성을 새롭게 구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논의를 조금 더 정치하게, 조밀하게 전개했으면 한다. 지금은 조금 더 구체적인 미시적인 전략들이 필요하다. 논쟁으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사회: 거버넌스의 대표성 문제는 쟁점이 많다. 한두마디 첨언으로 쟁점이 정돈될 주제는 아닌 것 같다. 좌담을 마무리하려니까 뜨거운 쟁점이 등장한다. [문화정책리뷰] 하반기 특집 주제로 다루어야겠다. (웃음) 오늘 이야기의 흐름은 문화정책 의제보다는 문화정책의 구성과정에 대한 관심이 더 큰 것 같다. 거버넌스 대표성도 과정에 대한 쟁점인 것 같다.

 

염신규: 여하간 100명을 모으느냐, 200명을 모으느냐 즉 규모의 문제도 아니고, 현장으로 가느냐 현장이 오느냐 등도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시점을 어떻게 갖느냐의 문제다. 김상철 님의 이야기도 시점에 대한 이야기라고 이해했다.

 

소위 정부라는 것, 국가라는 것이 문화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이제는 점검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최근 드는 생각이) 우리가 그 동안 공공이건, 정부건, 문화운동이건 당연하게 금과옥조처럼 인용하곤 했던 백범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말한 문화국가론, 도발적으로 말하자면, 이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국가론에 사로잡혀서 정부와 국가가 문화예술 분야의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문화국가론이 계속 반복되는 것 자체가, 문화사회로 가는데 오히려 제한요소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오늘 판데믹을 주제로 이야기해왔지만, 블랙리스트 사태가 보여주듯이, 물론 어이가 없는 여러 상황들이 있지만, 공공에서의 지원, 진흥, 내용적 개입·관여가 사실 떨어질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단순히 하나의 작품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문화정책 전반에 있어서 국가라는 하나의 절대권력이 책임지고 관장한다는 점에서 문화정책의 개념뿐 아니라 공공의 개념들을 좀 더 확장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전제하에서 국가(지방정부)의 역할을 재정비하는 작업들이 앞으로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한다.

 

사회: 예상했던 결론은 아닌데, 전환 의제에서 민간의 역량, 민간의 주도성, 민간의 책임이 아니라 주도성 회복으로 관심이 모아지는 것 같다. 물론 이 결론은 지금 좌담의 결론이지 판데믹 상황에 대한 진단은 아니다. 아직 우리는 판데믹 전체를 조망한다기보다는 판데믹의 와중에 머리를 맞대고 현재를 더듬더듬 진단하고 있다.

 

오늘 좌담이 도착한 이 자리를 출발점으로 삼아 앞으로도 판데믹과 문화정책 전환 의제에 대한 논의를 계속 이어가겠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 있게 지켜봐주시고, 논의에도 계속 참여해주시기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