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사태가 우리 사회에 준 교훈을 새삼스럽게 떠올려본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박근혜 정부가 허무하게 무너졌던 사유 중 하나다. 문화예술에 대하여 국가권력이 개입하는 것이 얼마나 사회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지를 보여줬다는 것은 너무도 지당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정치에 대한 문화적 통제가 반민주적, 반역사적인 것이 지당한 얘기임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론 최근 얼마간, 길게 잡아서 1987년 민주화 이후 30여 년을 제외하고는 늘 당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봉권 왕조시대나 식민지 시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대한민국 개국 이래에도 늘 문화는 국가가 통제하는 범주였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문화는 검열과 탄압의 대상이었고 ‘보편적 국민 정서’는 문화예술의 다른 취향을 가로막는 만능 키와 같은 잣대로 활용되곤 했다. 이것은 비단 정치적 주장이나 행위만을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다. 권력 집단에 불편한 그 어떤 문화적 행위는 “불온한” “반목을 조장하는” “저열한” “무질서한” 행위로 묘사되며 제재를 받아야 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유신정부가 대중가요에 대한 검열을 제도화했을 때 금지곡으로 묶였던 노래들을 살펴보면 의외로 정치적 불온함보다 감성적 불순함을 문제 삼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검열관 자신들도 스스로 근거를 구체화시키지 못해 엉뚱한 이유를 가져다 붙이곤 했다. “창법 저속” 같은, 지금 들으면 황당한 이유들이 지금 기준으로 이해가 될까?
그런데 이런 황당한 통제와 금지의 시기가 공식적 예술지원정책의 출발과 거의 동시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모든 것들이 공식화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1973년 한국문화예진흥원, 1976년 공연윤리위원회가 만들어졌다. 두 기관은 지원과 통제라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문화에 대한 국가의 관리를 전담하는 공식 기구이다. 그렇다고 그 이전에 지원과 통제가 없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만 그 이전에는 공식적인 기구를 동원하는 방식이 필요 없을 정도로 문화에 대한 국가적 통제가 오히려 더욱 직접적이거나 전쟁의 흔적으로 인한 강력한 이데올로기의 통제가 존재했다. 1970년대 문화 부문에 대한 국가주의적 통제 장치가 만들어진 것은 오히려 이런 지배자들의 통제를 넘나드는 문화적 다양성이 커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먹고사는 것에 대한 기본적 문제가 조금씩 해결되기 시작했고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 고등교육을 받은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무엇보다 문화적 표현을 매개하는 매체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한국사회에 소위 중산층이 등장했던 것이고 그에 걸맞은 공공 문화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통제이건 지원이건 간에 말이다.
깊게 뿌리박힌 문화행정의 종속구조
왜 이 시점에서 40년도 더 지난 1970년대의 상황을 복기해야 하는가. 이유가 있다. 2010년대 중후반에 벌어진 블랙리스트 사태가 1970년대 중반 잔인하고 억압적인 문화통제 시도들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시도는 당대의 비판적 지식인, 예술가들의 반발에 부딧치면서도 상상력의 심연까지도 통제하는 검열 장치로 확실히 작동했었다. 당시 『창작과 비평』과 같은 비판적 문예지를 만들었던 이들의 후일담을 들어보면 직접적인 검열의 피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 이전에 스스로 숱한 자기 검열을 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래서 당대에 지면을 통해 발표되었던 작품들에, 편집자들의 자기검열에 의한 완곡한 수정이 가해진 경우가 적잖이 있었고 “세상이 조금 좋아진 이후”에야 필자가 본래 썼던 버전으로 다시 고쳐서 출판하기도 했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2010년대 중반의 통제는 어떤가. 일단은 통제의 수단이 달랐고, 대상도 달랐다. 과거의 검열이 직접적인 금지나 압수, 심지어 창작자에 대한 형사처벌 같은 형태로 이뤄졌다면 근자의 통제는 주로 지원금을 통해 이뤄졌다. 통제라기보다는 배제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상도 달랐다. 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지목되었던 예술인들의 명단은 기실 그들의 예술적 작업이나 문화적 표현 때문에 만들어진 명단이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에 관련된 성명에 참여했던 이들, 특정 정치인들에 대한 지지의사를 표현한 예술인들이 명단에 올랐다. 거창한 국가 조직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리스트 자체는 매우 졸속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 이명박 정권 시절에 존재했다고 알려진 “문화권력균형화 전략”에서 시작된 이와 같은 일련의 행위들은 스스로가 내세우는 거창한 명분이나 ‘권력의 남용’ 등 현행법에 저촉되는 범죄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하면서 치졸함에 헛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과연 한국사회에서 정부가 사회의 문화를 통제한다는 것이 2010년대의 시점에 가능한 것일까?”라는 본질적 질문을 던지게 하는 막장극이 아니었을까? 공공의 정보와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영민한 관료집단과 권력이 이런 막장극에 이른 것은 그 출발 자체가 “좌파들이 문화권력을 틀어쥐었다”라는 매우 황당한 의제설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최소한 1990년대 이후 문화 분야에 대해 국가의 개입이, 통제이건 지원이건 간에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 대하여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지배 집단을 형성해온 우파들은 매우 이념적인 대결구도로 해석하려 했다.. 참여정부 내내 보수 언론에서 떠들어댔던 문화권력 이동에 대한 주장이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남았을지 모르겠지만 “홍위병” “점령군”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쓰며 좌파 문화집단이 정치의 힘을 빌어 문화권력을 장악했다고 떠들어댔다. 얼핏 그런 악의에 찬 마타도어를 이끌어낸 빌미가 존재하긴 했다. 문화부 장관에 당시 진보 성향 문화단체에서 추천했던 이창동 씨가 들어갔고 몇몇 주요 문화기관의 기관장에 민예총 등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 임명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정책 논의 테이블이 “다소” 넓어졌다. 내내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들 외에 민예총, 문화연대, 혹은 또 다른 집단들의 인사들이 참여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어떤 문화권력의 주도권이 이동했으며 권력을 행사했는가? 이동할만한 문화권력이란 것이 과거로부터 민간영역에 있긴 있었는가?
회고해 보면 공공적 문화행위, 즉 문화정책이나 문화행정의 주도권은 내내 “관”이 틀어쥐고 한 번도 놓아본 적이 없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예총으로 대표되던 보수성향의 문화예술계 역시도 권력 밑에 줄 서있는 수혜 대상이었지 문화행정 혹은 문화통치에서 주도권을 가져본 적이 없다. 단적으로 1960년대 후반 예총 산하 장르단체 사무처에서 일했던 이의 회고에 따르면 “월 말이면 군 장교 출신의 예총 사무국장이 장르협회 사무처 간사들을 모아놓고 일장 훈시를 하고 협회 상근자들의 월급을 나눠주었”다고 한다. 참여정부 초창기에는 이렇게 오랫동안 깊게 뿌리내린 문화행정에서의 관-민의 수직적 구조를 위로부터 조금 바꿔보려는 시도였지만 충분히 성공적이진 못했다. 참여정부 안에서도 그나마 협치의 시도가 존재했던 것은 이창동 장관 시기 정도였고 정권 중후반을 넘어가면서 “성과 평가”를 앞세운 신공공관리 행정의 속도전을 빌미로 대부분 관주도 행정으로 복귀해버렸다. 그나마 이것도 중앙정부에서 벌어진 것이고 대부분의 지방정부에서는 거의 아무런 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거나, 그냥 허위의 기표로만 존재하는 문화권력의 이동이란 별 무의미한 일에 가까웠다.
권력의 포장지이거나 관료의 성과주의에 매몰되거나
문화행정 분야는 본질적으로 중앙정부 주도, 관치행정의 틀을 견고하게 유지하며 참여정부-이명박 정부-박근혜 정부 그리고 심지어 현재의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지고 있다. 정권이 이렇게 저렇게 바뀌어도 달라진 것이 본질적으로는 크게 없다. 정권의 대외적 프로파간다에 따라 좀 더 강조하는 사업이 존재하기도 하고, 블랙리스트 사태 같은 저열한 막장극이 시도되거나 말거나 하는 차이는 있지만 현실의 변화를 추동하는 정책의 큰 줄기가 변화한 적은, 장담컨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거칠게 얘기해서 거의 똑같은 AA 정책에 대해서, 민주당 버전과 국민의 힘 버전이 존재했고 그 정책에 붙는 수사적 표현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앞으로 4,5개월 선거의 계절이 펼쳐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문화정책이 논해지고, 그 개입의 가능성을 찾기 위한 시도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미 발 빠르게 움직이는 이들이 있고 그 시도 자체는 공공선을 추구하기 위한 선의라고 믿는다. 하지만 과거의 경험으로 봤을 때 그런 선의의 시도들이 권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보기 좋은 포장지처럼 쓰이다가 이후에는 내팽개쳐지거나 문화관료들의 성과 올리기를 위한 맥락 잃은 사업으로 소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게 솔직한 우려다. 그래서 이 시끄러운 선거의 시간에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정책이 선거에 등장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선에서의 문화 공약들과 그것들이 어떤 맥락에서 만들어져서 어떻게 현실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반성적으로 회고해보려고 한다. 이 시도가 대선 이후에도 어떻게든 문화현장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을 위해 더욱 필요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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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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