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②] 1992년 14대 대선- 정책선거와 문화공약의 시작

CP_NET 2021. 12. 16. 04:35

대통령 선거에서 문화 정책의 비중이 비약적으로 커진 것은 199211월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였다. 이것에는 확실한 이유가 있었다. 1980년대까지는 대통령 선거에서 문화가 큰 비중을 차지하기엔 현실적으로 사회적 빈곤이 너무 심각한 상황이었다. 198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서야 경제 성장이 비약적으로 가시화되며 대중들의 문화적 수요가 늘어났고 문화정책에 대한 수요도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80년대, 경제성장과 민주정 선거의 기본틀을 갖추다

 

한국에서 본격적인 문화정책은 컬러텔레비젼이 보급되고 중산층들이 승용차를 구입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국풍81> 로 대표되는 관제 축제가 만들어졌고, 3S정책이란 강한 비판을 받긴 했지만 대중문화산업에 대해서도 유신정권 때보다 한층 개방적인 태도를 취했다. ‘예술의전당이나 국립현대미술관등 국가대표(?) 급의 문화시설을 조성한 것도 1980년대에 시작된 일이었다. 지방자치단체마다 문화예술회관을 조성해야 한다는 방침이 세워진 것도 5공화국 때의 일이었다. 물론 그 방침이 만들어지고 근 40여 년이 흐른 지금 까지도 문예회관이 없는 지자체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역설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또한 문예진흥원(현 예술위원회)의 직원 채용 시스템도 공채 제도로 바뀌었고 공채 세대 문예진흥원 직원들과 조성이 진행 중이던 예술의전당 공채 직원들을 대상으로 이뤄졌던 교육연수과정은 한국의 공공정책에서 이뤄진 최초의 전문적 문화매개, 예술기획인력의 양성과정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1980년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공식적인 문화예술정책의 여러 가지 시스템이 배태되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선거는 문화정책을 주요하게 다루고 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이유는 놀랍도록 간단하고 분명하다. 제대로 된 민주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808월과 19812월에 치러진 두 차례 선거(11, 12)는 군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폭도 전두환을 대통령으로 공식적 명함을 달아주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 선거의 결과에 대해서는 모두가, 심지어 동네 국민학생(초등학생)이라도 알 수 있을 만큼 뻔하디 뻔한 비극적 희극, 혹은 희극적 비극의 쇼였을 따름이다.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투표로 이뤄진 제11대 대통령선거는 후보자도 무소속 전두환 1인이었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40명 중 2,525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단 한 표의 무효표를 제외한 2,524표가 전두환을 찍은 망신스러운 선거였다. 이듬해 유신헌번을 개정하여 만든 제5공화국 헌법에 따라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로 치러진 제12대 대통령 선거에선 형식적으로 야당인 민주한국당(민한당)이 존재했고 민한당 총재인 유치송도 출마하긴 했으나 민한당이란 당 자체가 전두환 정부의 안기부 지원으로 만들어진 관제야당이었고 사실상 한국이 민주국가인척 위장하기 위한 허수아비 정당에 불과하다는 것을 대부분의 국민들이 알고 있었다. 전두환은 역시 90% 정도의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유치송은 7.7% 정도의 지지를 받았는데 역시 그냥 요식행위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런 선거 쇼에 정책이니 공약이니 하는 게 딱히 필요도 없었거니와 설사 있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별 의미가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19876월 항쟁 이후 벌어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1980년대 초반 정치 규제에 묶이거나 감옥에 보내졌던 김영삼, 김대중 등 제대로 된 야당지도자들이 돌아와서 치러진 그래도 비교적 정상에 가까운 선거였지만 (물론 여전히 전두환 정부에서는 안기부를 포함한 각종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선거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에 역시 완전히 정상적인 선거였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정권 연장을 통한 안정적 국정 운영을 내세운 노태우와 정권교체를 통한 군부독재시대의 종식을 주장한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자의 3파전에서 대결구도는 민주 대 반민주가 핵심이었다. 구 여권(3, 4공화국) 인사인 김종필까지 포함한 4자 구도로 확장해서 보자면 지역대결구도가 선거에서의 더욱 중요한 (그러나 부정적인) 이슈였다. 정책 이슈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다만 보통사람의 위대한 시대라는 역대급으로 성공한 프로파간다와 KAL기 격추사건이라는 희대의 변수가 기억될 뿐이다.

 

 

지역문화, 문화향유, 문화복지의 기본틀 구성

 

14대 대통령선거는, 물론 3당 합당이란 다소 불편한 과정이 존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가 비교적 정상적인 형태에 가까워지고 치러진 첫 번째 대선이었다. 이미 1980년대 이후 문화정책의 수요가 생겨난 상황에서 정치 상황 역시 비교적 정상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자들도 각종 분야별 공약을 내세우며 국정 운영에 대한 내용적 차별화가 시작된 지점이기도 했다. 물론 현재와 같은 수준의 방대하고 디테일한 공약이 나온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단순한 구호 수준에 머물던 그 이전의 대통령 선거들과는 달리 분야별 각론을 다룬 대통령 공약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대통령 출마자는 총 7명이었는데 (본래 8명이었으나 1명 사퇴) 이중에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바에는 무공약이 공약이라는 것을 앞세웠던, 남장여성 정치인으로 유명한 김옥선을 제외하고는 모두 나름대로 공약을 내세웠다.

 

대통령에 당선되어 집권했던 김영삼 후보의 문화부문 공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민주자유당의 김영삼은 깨끗한 정치, 강력한 정부를 내세우며 77가지 공약을 내놓았다. 이중 문화분야는 국정과제로 ““품위 있는 민족문화를 내세우며 3가지 공약을 내세웠다.

 

<14대 대통령 선거 김영삼 후보 문화분야 공약>

70. 예술인 창작여건을 개선하여 자긍심 높은 민족문화를 창달한다.
. 문화창조자의 창작여건 개선과 예술인 복지지원을 확대한다.
. 전통문화의 전승창달로 문화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문화민족의 자긍심을
고양한다.
71. 지방문화를 활성화하여 문화혜택을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한다.
. 지방화시대에 맞도록 지역문화 공간을 대폭 확충한다.
. 문화시설의 사회교육기능을 내실화하고 국민 누구나 쉽게 문화예술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확대한다.
72. 선진방송기반을 구축하고 자유와 책임이 조화된 언론환경을 조성한다.
. 선진 방송기반을 구축한다.
. 자유와 책임이 조화된 건전한 언론환경을 정착시킨다.

 

챵작여건 개선과 예술인 복지지원 확대는 3030여 년이 흐른 지금도 본질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고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하에서 딱히 뚜렷하게 개선이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지금 시각에서 특이한 것은 당시까지도 전통에 기반한 민족문화의 정통성을 살려내겠다는 프레임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정통성 있는 민족문화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들다가도 당시가 오히려 국제 사회로의 개방이 매우 가속적으로 이루어질 때이고 소위 세계화 담론이 형성되던 시대인 것을 감안하면 묘한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

 

문민정부에서 정책으로 구현된 것은 71번 공약에서 다루고 있는 지방문화와 문화복지 공약이다. 지금은 지역문화란 표현으로 대체되어 거의 안 쓰는 표현이 된 지방문화를 쓰고 있다는 것이 눈에 띈다.. 이런 정책 기조 하에 문화의 집사업 같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생활권 문화공간 사업이 만들어졌고 1996년에는 문화복지기획단이 설립되고, ‘문화복지 중장기 실천계획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문화복지 기본구상이 수립되는 등 실질적 정책 추진이 이루어졌다.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나온 계획과 구상에는 기본권으로서의 문화권 보장 생산적, 예방적 복지 참여활성화에 따른 복지공동체 형성을 문화복지의 기본적인 정책방향으로 설정했다. 또한 생활권단위의 문화기반 시설 확충 및 경영능력 증진, 문화도시 건설 및 지역문화 활성화, 국민들의 평생문화 학습환경 조성사업 등을 중요하게 강조했다. 물론 이것은 공약 단계에서 나온 것은 아니고 김영삼 대통령 집권 이후 공약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왠지 굉장히 낯익다. 바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부분의 공공문화정책, 특히 문화향유와 문화복지의 기본 프레임이 이 시기에 71번 공약을 근거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흐름은 이명박 정부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일관되게 흘러왔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당시 간발의 차이로 낙선했던 김대중 후보자는 총 100개의 중점공약을 내세웠는데 문화분야는 김영삼 후보와 내용적으로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지만 공공조직 개혁, 시민문화 활성화, 남북문화교류 등이 제시되고 있다. 작은 차이 같지만 기본적인 관점의 차이를 볼 수 있는데 비교하자면 김영삼 후보가 공급 위주 문화정책을 좀 더 세련되게 만드는 것을 지향했다면 김대중 후보는 문화부문 공공조직의 관료적 시스템을 개혁하고 시민주도형 문화조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초보적 구상이 깔려있었음이 발견된다. 물론 이런 김대중 후보자의 구상이 차기 대통령 당선 이후 제대로 실현되었는가는 좀 다르게 살펴볼 필요가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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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