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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③] 1997년 15대 대선 – IMF, 세계화, 그리고 문화예산 1%

CP_NET 2022. 2. 11. 09:52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①] 권력을 위한 보기 좋은 포장지가 되지 않으려면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②] 1992년 14대 대선- 정책선거와 문화공약의 시작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외환위기, 이른바 IMF사태 직후에 치러졌다. 한국 현대역사에서 IMF가 어떤 의미였고 그것이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여전히 입장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때로는 서로 상반된 견해들이 존재한다. 외부로부터 밀어닥친 일시적인 경제 위기였고 그것을 잘 극복해냈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 반면에, 한국 사회에 신자유주의적 사회 개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여하간 외환위기 상황은 국가 부도 사태로 표현될 정도로 한국 경제에 위기 국면을 몰고 왔던 것은 분명했다. 그 와중에 군부세력과의 일정한 밀월관계로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회 해체를 통한 군부 정치세력화 가능성 봉쇄, 금융실명제를 통한 경제개혁, 지방자치제도의 본격적 시행, 권위주의 타파, 그리고 부분적이지만 사회민주화를 추진했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는 그 역사적 공보다는 나라 경제를 파탄에 몰아넣었다는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다. IMF사태가 단지 문민정부의 실정이 원인이 된 것이 아니라 정경유착을 통해 형성된 문어발식 재벌구조 등 훨씬 복잡한 산업적, 경제적 원인의 축적과 외부로부터의 압력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국의 일차적 책임은 집권세력에 쏠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5대 대통령선거는 국가적 위기상황을 돌파하는 한편 IMF의 구조조정 요구 등을 수용한 국가 체제 개편이 주요한 어젠다로 부각되었으며 기본적으로는 정권심판론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15대 대통령 선거에는 총 7명의 후보가 경쟁했는데 집권 세력이었던 신한국당은 통합민주당과 합당을 통해 한나라당을 만들며 문민정부에서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법조인 이회창을 후보로 선출했다. 판사 시절부터 청렴하고 중립적 법조인 이미지로 부각되었던 이회창 후보는 특히 문민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내면서 대통령에게 할 말 하는소신 있는 인사라는 인물로 주목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보 사태와 외환위기를 통해 주도권을 잃은 김영삼 대통령과 그 주변으로부터 집권당의 헤게모니를 가져올 수 있었고 집권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심판론의 민심에 부합하는 후보로 비쳤다.. 한편 가장 유력한 야당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였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는 오랫동안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고 민주화의 상징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박정희 정부 시절부터 형성된 영호남 지역정치구도에 휘말려 고배를 마셔오다가 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구 보수세력과 충청권 민심을 쥐고 있던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후보와의 단일화, 소위 DJP연합을 형성하며 치열한 경쟁구도를 형성했다. 여기에 “3김 청산으로 대표되는 세대교체론을 내세우는 이인제 후보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독자 출마를 했는데 사전 여론조사에서부터20%대를 육박하는 유의미한 지지율을 보이며 새로운 정치 지도자에 대한 국민적 갈망을 보여줬다. 이런 아래로부터의 변화에 대한 갈망은 단지 인물론에 그치지 않았으며 그 이전의 선거에서 백기완 후보를 통해 일부 드러났던 독자적 진보정치세력화에 대한 구상은 임의적 진보정당 국민승리21로 모아졌고 민주노총 위원장이던 권영길을 후보로 선출하여 독자노선을 선언했으며 이 흐름은 이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양한 흐름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1997년 대선의 흐름은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요약될 수 있다. 관치경제를 통해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경유착이라는 오랜 악습, 비대해진 위계적 관료사회의 문제점, 기성정치권의 퇴행적 악습 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정치문화와 행정구조, 대안정치 세력에 대한 요구가 급격하게 요동치던 것이 1997년 대선을 앞둔 풍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요한 후보들은 문화정책에 있어서 어떤 어젠다를 꺼내놓았을까?

 

 

문화예산 1%와 미래 먹거리

 

15대 대선 문화공약에 대한 기록을 찾기 매우 어렵지만 당시 기사를 통해 몇 가지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화 분야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너무 미약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주요 후보들이 비슷하게 공감하며 문화예산을 확대하겠다는 내용을 내놓았다. 당시 문체부 예산 중 체육 부문을 제외한 문화예산이 0.62%에 불과하고 특히 순수문화진흥예산은 총예산 대비0.1%에 불과하다가는 것을 지적하며 열악한 문화예산을 끌어올리고 문화산업을 국가의 기간 산업화하고 검열제를 중심으로 한 각종 규제를 철폐하고 문학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겠다는 내용들을 공통적으로 꺼내놓았다. 우선 이회창 후보는 한국의 문화예술관련 예산은 문예진흥기금, 기부금, 공익자금, 국고보조금을 합쳐도 6백억~7백억 수준인데 이는 이탈리아가 1986년 음악 분야에 투자한 5천억원(한화 추산)10%에 불과하다”라고” 지적하며 “2003년까지 현재의 20배 수준인 1조억의 문화예산을 조성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또한 21세기를 문화의 시대로 규정하며 문화에 대한 투자는 경제와 미래에 대한 투자라는 전제하에서 문화산업과 관광산업을 국가전략산업으로 중점 육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그밖에 문화예술정보센터 설립과 기업메세나 모델 등을 제시했다. 우리 문학의 해외진출을 위한 번역원 설립을 공약하기도 했다. 한편 김대중 후보는 당시까지 정부의 문화정책을 위로부터 설비(시설)중심의 전시행정이었다고 비판하며 관주도의 문화정책이 아닌 민간중심의 정책을 펼칠 것을 천명했다. 또한 1980년대 구미 선진국들이 문화예산 1%를 넘어섰다는 점을 사례로 들며 ““정보문화 선진국 건설을 위해 문예진흥기금 5천억 원, 문화산업 특별자금 3천억 원, 영화진흥기금 5백억 원을 조성하여 문화산업의 대외 경쟁력을 키우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았다. 또한 이외에도 검열제 철폐, 성인영화 전용관 도입과 완전등급제, 조형예술과 디자인산업 집중 육성 등을 공약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또한 노벨문학상 예비후보 선정위원회 신설을 공약에 담기도 했다. 이인제 후보는 지자체는 문예진흥에 1%이상 예산을 쓰고 있으나 중앙정부는 그렇지 못한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며 역시나 예산 확충을 약속했고 일본문화 개방 추진과 우리 문화 수출의 기반 마련을 강조했다. 또한 대중문화교육의 정규교과화와 문화재 관리 및 연구인력 육성을 공약했다.

 

간단하게 분석해보자면 각 후보마다 차이가 있지만 문화예산을 대폭 확충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것은 공통적이었다. 물론 이중에 가장 임팩트 있게 주목을 받았던 것은 김대중 후보가 내세운 문화예산 1% 공약이었다. 그런데 이회창, 이인재 후보도 워딩이 정확하게 그렇게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 내용적으로는 비슷하게 문화분야의 대규모 예산 확대를 내세우고 있다. 또한 이들 후보가 예산 확대의 주요 근거로 내세우고 있는 것은 공통적으로 문화가 국가경쟁력이 되고 있는 시대에 발맞춰 문화예술의 산업적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국가의 새로운 먹거리로 삼기 위한 경제적 투자 관점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IMF 상황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 문화에 대한 투자의 정당성을 경제논리에서 찾고자 했던 흔적이라 하겠다. 이와 함께 문화시장을 개방하는 한편, 역으로 산업적 경쟁력을 만들어 수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겠다는 이야기들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다.

 

사반세기가 지나 K컬쳐란 표현이 어색하지 않아 진 현재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후보자들의 기본적 방향은 실현된 것이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이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다양성이나 무형의 가치들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축소되고 산업적 논리가 중심축으로 자리 잡았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국립 한국문학관(문학박물관)이나 예술경영지원센터(문화예술정보센터), 한국문학번역원과 같이 이후 설립이 추진되거나 본격화되는 기관들에 대한 논의가 발견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것은 한국 문화 부문 공공정책이 필요로 하는 사업의 양과 종류가 훨씬 많고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개혁, 민간화, 신공공관리 행정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대폭 늘리고 산업화하여 경쟁력을 갖추겠다는 점에서는 주요 후보들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디테일에서 다소 간의 차이도 발견된다. 이회창 후보가 주로 국가 주도의 성장을 염두에 둔 계획이었다면 김대중 후보는 무엇보다 민간자율성에 힘을 싣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전통적인 보수세력과 민주화의 흐름을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한다는 입장의 차이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 단지 국민의 정부” 5년 간이 아니라 이후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아주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민간화가 또 다른 관점으로 해석되며 공공문화기관의 성격을 변화시켰다는 점은 깊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기관의 민주화라고 해석되었지만 결국은 상당히 다른 결이었던 신자유주의적 행정구조 개편, 소위 신공공관리 행정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고 문화기관들이 경영평가 중심의 운영구조 개편의 주요한 논리로 자리 잡았다는 점 말이다. IMF 상황에서 개혁이라는 하나의 이름 안에 이질적인 지향들이 뒤섞이며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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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