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④] 제16, 17대 대선- 문화정책 격변, 전진과 후퇴의 시대에 대한 회고

CP_NET 2022. 2. 23. 16:26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①] 권력을 위한 보기 좋은 포장지가 되지 않으려면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②] 1992년 14대 대선- 정책선거와 문화공약의 시작

[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 199715대 대선 IMF, 세계화, 그리고 문화예산 1%
 

 

국민의 정부(김대중 대통령) 시절은 한국 문화정책 환경이 상당히 빠르게 격변했던 시기였다.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통해 들어선 최초의 민주 정부라는 타이틀은 사회정책 전반의 변화에 대해 적극적일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적 상황은 한국전쟁 이후 오랫동안 강력한 반공 이데올로기와 권위주의적 군사독재라는 현실 조건 속에 오랫동안 매우 억압적인 환경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민주화에 따른 이런 변화는 매우 시급하고 당연한 것이었다.

 

 

2002년의 문화정책 상황

 

물론 개방과 자유를 향한 변화의 조짐은 이미 이전 정부인 문민정부(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시작되고 있었다. 예컨대 진보성향 예술인들의 연합체로 1980년대 후반 출범하여 정부에 의해 적지 않은 탄압을 받던, 비합법 예술인단체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하 민예총)을 문화부 산하 사단법인화하여 제도권으로 끌어들인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그러나 문민정부의 여당인 민자당이 3당 합당이라는 민주체제로서의 불완전함을 갖고 있었고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정치적 공격을 받았던 1995년 전후한 시점부터 급격히 보수화되며 개혁이 다소 흐지부지 되었다면, 그에 비해 비교적 완전한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IMF라는 사회전반의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국민의 정부는, 출발선부터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한편으로는 훨씬 강하게 개혁의 드라이브를 걸 수 있었고 또 다른 한편에선 피치 못하게 경제주의적 관점이 강하게 작동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문화정책 개혁에 있어서도 방향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가 문화정책에서의 민주적 가치 실현이라면 다른 하나는 문화의 경제적 부가가치 증대였다. 그런 기조 하에 소위 팔길이 원칙이 문화정책의 기조로, 최소한 명시적인 수준에서는 문화예술분야에 대한 다양한 규제를 철폐, 완화하는 것이 진행되었다. 규제 철폐의 또 다른 이유는 문화산업에 대한 집중적 지원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 영상물등급위원회 발족, 공연자등록제 폐지, 공연장 설치 허가제의 등록제 전환, (영화를 제외한) 일반 공연의 사전신고제 폐지, 각본 사전심의제 폐지, 공연의 정지, 중지명령권 폐지 등이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1973년 출범했던 영화진흥공사를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로 개편하여 관치행정 위주가 아닌 민간 위주의 영화 지원체계로 전환시킨 것은 상당히 획기적인 조치였다. 2001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하며 당시까지 서울과 중앙정부 중심으로 추진되어왔던 문화정책의 방향을 지역 관점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것도 유의미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국민의 정부가 보여준 이런 문화정책의 전환은, 물론 디테일에 있어서는 찬반양론이 격돌하는 측면이 있었지만 그럼애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문화예술계 전반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물론 오랫동안 반공 이데올로기와 군사독재정권이 만든 체제에 최적화되었던 집단들에서는 반발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소수이거나 시대를 역행하는 주장인 경우가 더 많아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진 소멸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영진위 전환 초창기에 주도권 경쟁을 벌이다가 물러난 김지미(배우), 정진우(감독) 등 충무로 구세대 영화인들이 보여준 퇴행적 행태가 그런 옛 기득권자들의 대표적 행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6대 대선 주요 문화공약

 

문화예술계의 급변이 이루어지던 2000년대 초반 벌어진 제16대 대선에선 총 6명의 후보가 맞붙었다. (기호 7번인 장세동 후보는 사퇴했다.) 한나라당에선 이회창 후보가 대선 재수에 나섰고, 새천년민주당에선 변화와 개혁의 이미지를 앞세운 노무현 후보가 나섰다. 일부 보수세력이 모였던 하나로국민연합에선 이한동 후보가 나섰고 국민승리21의 연장선에서 진보연합정당으로 만들어졌던 민주노동당에선 또다시 권영길 후보가 나섰다. 청년진보당 등으로 이어진 PD계열 운동권들의 일부들은 민노당에 침여하지 않고 독자적인 정당인 사회당을 만들어 김영규 교수를 후보로 내세웠다. 궁예를 연상시키는 포스터와 TV토론 중 내뱉었던 제가 당선될 리가 없겠습니다만이라는 자포자기식 멘트가 화제가 되었던 호국당의 김길수 후보도 있었다. 이들 중에 그래도 어느 정도 체계적인 집권 플랜을 내세웠던 주요 후보들의 문화분야 공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노무현 후보는 당당한 대한민국 떳떳한 노무현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4대 비전, 20대 기본정책, 150대 핵심과제를 내세웠다. 20대 기본정책 중 문화정책이 포함된 것은 13번째인 수준 높은 삶의 질”이다. 노무현 후보 측은 수준 높은 삶의 질을 위해 최상의 복지, 쾌적한 환경, 다양한 문화생활을 내세우며 의료, 복지, 환경, 문화를 한데 묶어 공약으로 제시했다. 150대 핵심과제 중 문화에 대한 내용은 2개이다. “13-8. 지역문화기반 시설을 확충하고, 국민의 생활 문화활동을 지원하며 국민의 문화향수권을 증진시키겠습니다“13-9. 문화예술인의 창작활동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창작스튜디오와 공연공간을 확충하는 등 문화예술 창작여건을 개선하겠습니다였다. 앞선 15대 대선에서 후보들이 문화의 산업적 가능성에 좀 더 주목하며 대대적인 인프라 투자를 강조했다면 노무현 후보 측은 산업적인 측면에서의 문화적 성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는 전제 하에 대국민 문화향유 확대를 통해 문화의 사회적인 힘을 좀 더 기르겠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어젠다는 프랑스의 미테랑 집권기에 이루어졌던 국가 주도 문화정책을 통한 문화민주주의 실현을 한국적인 상황에 맞게 적용해 보겠다는 것이었다. 노무현 후보는 실제 집권 후 창의한국”, “새예술정책등 한국에서는 종래에 시도되지 않았던 문화정책비젼 작업을 통해 이 공약들의 디테일들을 채워나갔다.

 

국가, 정확히는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문화향유 중심의 사회문화정책은 문화복지, 문화예술교육 등을 통하여 문화를 통한 사회운영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는 긍정적 측면과 정부 개입이 너무 과도한 공급형 정책에 머물렀다는 부정적 측면이 모두 존재했다. 그런 양면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정책에서 큰 폭의 변화를 가져왔고 그것이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광주문화중심도시를 제시하며 문화도시정책의 도입을 예고한 것도 노무현 후보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지역표를 의식한 전략적 접근이었고 이게 이후 문화도시 개념이 정착하는 과정을 어렵게 만든 역작용이 있었다는 비판적 시각도 뒤따랐다.

 

한편 또 한번 고배를 마시게 된 이회창 후보는 정책기조를 문화국가 건설로 정하고 문화예술인 복지제도 도입 국제문학교류센터 건립 예술인회관 완성 전통문화예술의 진흥 지방 문화육성 등을 주요한 공약으로 내세웠다. 전반적으로 문화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해석과 역할을 부여하려 한 노무현 후보에 비하여 다소 협소한 이해를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이것은 문화에 대한 해석이 좀 더 옛날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공약개발이 이회창 후보가 내세운 정치적 어젠다 속에서 유기적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특정 단체의 몇몇에게 공약을 맡긴 탓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결과적으로 예술인회관 완성과 같은 특정 단체의 이해관계를 전면에 내세운 공약이 돌출적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인 복지제도 도입과 같이 이후에도 꾸준히 화두가 되는 정책이 담겨있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측면이 있다. 한편 당시 화두로 떠올랐던 WTO협상에서 문화분야 양허안을 통한 개방압력에 관해서는 노무현, 이회창, 권영길 후보 모두가 양허한을 철회하여 문화주권을 지키겠다는 입장이었는데 권영길 후보는 전면적인 재협상을 주장한 반면,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는 전면적 시장개방은 하되 문화분야에 대해서만 철회를 요구하겠다는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후 한미FTA협상으로 옮겨진 이 문제는 노무현 정부가 결국 개방압력을 수용하면서 대선 당시의 불완전한 타협 정서가 그대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였다.

 

 

참여정부 문화정책 개혁, 시도와 좌절의 명암

 

참여정부분권과 자율을 매우 중요한 국정원리로 내세웠으며 문화부 역시 자율, 참여, 분권기조에 맞추어 민간 전문가들을 모아 <문화행정 혁신위원회>를 구성하여 15개 분야의 TF팀을 조직하여 문화부 조직체계를 정비하는 등 역대 어느 정부보다도 적극적인 문화정책의 변화를 시도했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창의한국> 등 종합적 문화정책를 만들고 이에 대한 세부적 추진을 진행했다. 이 시기의 대표적 유산은 문화부 산하 기관이었던 독임제 한국문예진흥원을 민간 위원회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로 전환하고 문화예술교육 정책의 본격화, 문화향유 사업의 양적 확대, 예술의 산업화를 통한 자립성 강화였다. 그러나 이것은 대부분 정권 초창기 이창동 장관 시절의 일들로 후임인 정동채 장관이 들어서자 문화관광레저스포츠산업 강화에 편향된 <문화강국(C-Korea) 2010> 프로젝트를 발표하며 문화산업으로 정책 중심이 급격하게 이동한다. 초창기에 집중했던 문화사회로의 변화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정책이 되어버렸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2006년 발표되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거론하지 않는, 완전히 사장되어버린 문화헌장이다. 문화부에서 조직한 문화헌장제정위원회(위원장 도정일)가 꽤 오랜 토론과 숙의의 과정을 거쳐 만들었던 헌장이지만 이 헌장은 발표가 되는 동시에 거의 사장되는 수순을 밟았다. 아직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이전이었던 2006년에, 자신들이 조직한 위원회에서 만든 문화헌장에 대해서 이미 문화부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우선 하나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정동채 장관 이후 문화부의 기조가 성과를 만들기 좋은 문화산업에 치중하며 문화의 사회적 역할 같이 성과도 안 나고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별로 관심이 안 가는 일에 대해서는 손을 놓아버린 탓이 직접적이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화부는 집권 초기에 외부의 문화운동이 개입하여 제기된 사회적 기능을 중심으로 한 문화부의 개편에 대하여 반발과 피로감을 함께 갖고 있었고 그걸 내용적으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관료들이 거의 없었다. 그냥 집권 그룹이 정한 방향성이니 따라하는 척했을 뿐 이념적으로는 경계하고 실무적으로는 귀찮아하는 관료들이 대다수였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런 성향이 강한 문화부 관료들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케이스가 나중에 문재인 정부에서 정권에 대한 노골적으로 시비 걸기를 하다가 옷을 벗은 모 고위 관료라 하겠다.

 

내부적으로 문화부 관료 일부의 개혁에 대한 앞뒤가 다른 입장이 있었다면 보수언론 등에서는 좌파 문화권력에 대한 과도한 부풀리기를 통해 문화를 빙자하여 정권을 정치적으로 공격하는 프레임 형성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뤄지기도 했다. 실제 예술계에서 구 기득권층이거나 일부 자유주의 세력들이 문화미래포럼 같은 우파성향 문화정책집단을 만들어 노무현 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비판을 가하기도 했는데, 모든 이념적 공격이 거의 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들을 움직였던 동인이 결코 이념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진보성향으로 분류되었던 영화평론가 일부가 문화미래포럼에 가담했던 과정을 관찰해보면 영진위 등 지원기관에서 주도권 유무 같은 자리싸움 과정에서의 감정 다툼도 있었고 더 본질적으로는 한예종 영상원이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따른 사립대 영화과 교수들의 반발심과 그에 따른 이해관계의 측면이 훨씬 더 직접적인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여하간 참여 정부 초창기의 비교적 개혁적인 문화정책 추진은 내외부의 견제와 공격, 그리고 무엇보다 집권집단 자체의 정책적 이해 수준이 떨어지고 추진 의지가 부족했던 탓에 성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이렇듯 사회 개혁의 좌절과 피로감과 다방면에서 사회 전반에 드리워지는 시점에 강하게 반향을 일으킨 것은 개발에 대한 향수와 경제 제일주의였다.

 

 

제17대 대선, 다양한 가치 담고자

 

이런 상황에서 치러진 2007년 제17대 대선은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 정도를 제외하고는 문화 공약의 차별성이 특히 떨어지는 선거였다. 그 선거 직전 웹진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발행)에서 진행했던 대선 후보들의 문화예술정책 공약 분석 평가(참석자 : 강무성, 나호열, 염신규, 이원재, 전효관)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으로 자세한 서술을 대신하려고 한다. 당시 시각으로는 차별성이 떨어지는 측면을 주로 비판했지만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다양한 가치들을 문화정책에 담으려는 시도가, 후보를 막론하고 존재하던 시기였다는 재평가가 가능한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후에 벌어진 퇴행의 결과를 우리는 또 한 번 눈앞에서 뼈저리게 보고 있다.

 

(원문은 https://www.arko.or.kr/zine/artspaper2007_12/pdf/042.pdf 에서 볼 수 있는데 어떤 이유 때문인지 웹진 아르코의 검색 기능으로는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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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