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판데믹 이후, 전환을 위한 의제⑩] 도착하지 않은 편지에 대하여

CP_NET 2021. 6. 6. 13:56

 

 

 

일상적인 상황이 갑자기 깨지고 변화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에 매우 힘들게 다가온다. 아무리 평소에 우리가 자신의 일상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고 있다고 하더라도 실상 그 관성적인 반복에 상당히 익숙해져있으며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변화가 닥치면 그 변화의 방향이나 내용이 어떻든 간에 일단 적응하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그런데 그 힘듦을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다면 새로운 상황에 대한 적응력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그 전까지 익숙함 때문에 무심하게 지나쳤던 일상의 어떤 미세한 부분들을 갑자기 발견하게 된다. 관성이 주는 지루한 편안함, 혹은 무의식적 노력에 의해 지켜지는 삶의 일상적 감각에 균열이 가고 강요된 낯설게 보기는 삶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한다. 그런 면에서 코로나19가 가져온 판데믹 상황, 그것이 초래한 우리 일상의 변화와 균열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놓았을까?

 

발 빠른 이들은 벌써부터 포스트코로나와 뉴노멀을 이야기하며 설레발을 치고 있는데 아주 솔직하게 지금의 진단들은 마케팅 수단이거나, 일단 지르고 보는 지식인들의 강박적 허세이거나, 뭐라도 일단 꺼내놓아서 우리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이런 전망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하는 관료집단들의 자기 대책에 가깝다. 시기적으로 봐도 그렇고 각종 전망이나 대책에서 논의되는 내용이나 수준을 보고 있으면 이게 그렇게 가혹한 평가는 아니란 확신이 든다. 아직 변화의 조짐이 있고 일상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단초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몸통은 아직 수면 아래 있다. 지금 코로나 이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처음 코끼리를 만졌을 때의 우화와 같이 피상적인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문화예술정책 역시도 마찬가지다. 당장 방역이 그 무엇보다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만남을 전제하는 예술활동이나 문화프로그램들이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러다보니 예술가들과 문화인력들의 활동과, 이와 결부된 생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지경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오히려 각종 긴급지원 프로그램으로 인해 기존의 지원 트랙을 잘 활용하던 집단이나 개인들은 평소보다 오히려 더 풍족한 자원들을 얻어내었다는 곱지 않은 시선의 이야기들도 들려오고 있지만, 그런 일들이 뭐 문화예술계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본래 환란의 시기가 오면 모두 다같이 어려운 것 같지만 전쟁통을 틈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 금붙이를 들고나오는 이들은 어디서나, 어느 시기에나, 어느 영역에나 존재했었다. 그나마 긴급지원 성격의 프로그램들의 혜택이 더 많은 이들에게, 더 공평한 방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간단하게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기관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정책 설계를 통해서 풀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다. 아니, “긴급이란 단어가 말해주듯 섬세한 정책의 해법을 기다릴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코로나 상황에서 진행된 문화예술 분야 긴급지원 프로그램들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평가가 필요하다. 이것은 단지 앞으로 언제 또 닥칠지도 모를 환란의 시기에 대한 대비 때문만이 아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정책은 그 속성상 목표나 과정, 대상이 비교적 잘 구획되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정책 연구의 샘플로서 가치가 분명하고, 긴급상황에서 서둘러 진행된 일들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평소의 문화예술지원사업의 구조를 보다 간명하게 드러내보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화예술지원 구조의 공정성이나 효율성만을 얘기해서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코로나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멈춤과 성찰의 기회를 통해 관행의 효율적 개선을 시도하는 것도 유의미하겠지만 관점 자체를 틀어서 다시 보는, 시선의 전환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공성 담론이 배제하는 가치들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일상으로서의 문화에 대한 해결과 전환을 위해서는 다양한 문명사적인 고민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런 고민들에 앞서 눈앞에 놓인 문화예술정책에서 한번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은 현재 우리의 문화예술정책사업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범위가 과연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알다시피 우리의 문화예술정책은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예술인들의 복지에 관한 책임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고 국민들의 문화향유권도 보장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그러나 실제 각각의 영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업들을 들여다보면 현실적으로 그 정책의 수혜 대상은 지극히 협소하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서 극히 일부의 예술활동을 지원하고 있으며 극히 일부 예술가들이 복지사업의 혜택을 받고 있다. 향유지원도 마찬가지다. 현재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진행하고 있는 향유 사업에서 추산하고 있는 수혜 대상에 상당한 허수가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국민의 10%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체감적 진실은 당장 주변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 이웃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예술활동이나 문화생활은 사적인 일상활동에 있지 정부나 공공기관의 문화프로그램을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의 양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관련된 예산을 무한대로 늘릴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예술활동이나 문화생활의 근간이 되는 개별적 욕구를 규범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공적 프로그램이나 기획으로 해소시킬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상식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문화정책의 공공성을 어떻게 다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술 행위나 문화의 과정이 상당히 사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정책이 공공정책으로 자리잡아온 것은 그 총합적 가치의 지향이 갖고 있는 사회적 성격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의 공공 문화정책은 가치보다는 영역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그 범위는 매우 협소하기 짝이 없다. 그러면서 압도적으로 더 넓게 퍼져있는 사적 영역으로서의 예술활동이나 문화를 정책에서 배제하는 모습을 취해왔다.

 

이 대목에서 공과 사의 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볼 여지가 등장한다.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과 사의 구분은 명확해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 이것은 공과 사의 개념이 사회적 조건이나 학자들에 따라 얼핏 보기엔 조금씩, 그러나 내용적으론 상당히 많이 차이가 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공을 관습적인 방식으로 퍼블릭(public)으로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좀 더 확장하여 커먼즈(commons)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따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사적인 영역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양철학자 김계환의 중국적 공사 관념론의 근현대적 전환에 관한 시론(2011, 동양철학연구회 Vol68) 같은 논문을 보면 고대의 중국과 현대의 중국, 그리고 일본이나 서구 사회가 각각 공사개념에 대해 명백하게 차이가 나는 접근을 하고 있다. 특히 한나 아렌트의 분석과 같이 서구 사회에서 사용되어온 공사 구분이 영역에 따른 구분이라면 중국 등 전통적으로 아시아에서의 공사 구분은 다분히 가치지향적이라라고 지적하고 있다. 문제는 공과 사의 관계가 그 어떤 측면에서건 아주 오래전부터 매우 위계적인 함의를 가지고 형성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런 공사개념의 전통적 위계성에 대한 발견과 해석은 특히 젠더 연구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서구적인 의미의 범위로서의 공적인 영역이건, 아시아적 개념에서의 가치로서의 공적 지향이건 기본적으로 남성들이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더 연구에서 발견된 공사개념의 위계성은 당연히 권력의 문제이며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이것에 대한 문제 제기, 시비 걸기, 전복하기 등에 대한 정치가 필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 과정을 통해서 공사 관계가 기존의 위계적 질서가 아닌 상호작용의 측면으로 재해석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정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앞에서 언급했듯 현재 공공의 문화예술정책에선 예술행위와 문화향유가 갖고 있는 개별성의 사적 속성을 대놓고 무시하거나 상당 부분 배제하는 방식을 취해 왔다. 젠더문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성을 둘러싼 문제들이 공적 담론화에서 자주 장벽에 막히는 것처럼, 예술가와 시민들의 문화적 행위가 가지고 있는 사적인 속성이나 욕구를 담은 주장이 표출될 때마다 정책의 주류 질서나 담론 구조는 개인의 문제로 되돌리며 외면하는 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특히 근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 사용되고 있는 공의 개념은 서구에서 가져온, 다분히 영역적 의미이기 때문에 지극히 협소하게 구획된 공적 영역 바깥의 문제에 대해서는 방관하는 것에 매우 익숙해져있다. 정작 훨씬 더 그 범위가 넓고 많은 예술가들과 시민들의 문제들이 퍼져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개별화된 행위나 욕구들에 대하여 정부 등 공식화된 공공장에서의 반응은 대부분 추상화된 다수의 목소리로 포장된 보편 질서의 강요이다. 쉽게 얘기해서 그런 개별적 문제들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할 일로 단정하거나 국민들의 보편적 문화생활과 관련된 것에 집중하겠다는 답을 관성적으로 던지고 있다. 그런 답을 내놓을수록 정작 더 많은 예술가, 시민들과 공공 문화예술정책은 상관없는 일이 되어갈 뿐이다.

 

코로나 상황이 보여준 것의 일부겠지만 우리 공공 문화예술정책의 범위는 개념적으로는 굉장히 포괄적인 것에 비해서 실제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매우 협소하다. 단적으로 지자체에서 축제를 한 해 건너뛴다고 해서 그 영향을 받는 시민들이 얼마나 있는가? 자기 지역에서 축제를 하는지 안 하는지 본래 모르던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계속해서 영역으로서의 공공의 개념을 기계적 적용한다면 공이 가지고 있는 가치지향적 측면이 간과되며 문화예술정책이 사회의 다양한 담론장에서 고립되는 현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의 정책사업들을 개선하는 것 이상으로, 예술과 문화가 품고 있는 사적 국면에 대한 배제를 넘어설 수 있는 정치의 과정이 기획되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배제되고 있는 다양한 미적 취향, 문화 욕구들을 공적 가치지향과의 상호관계성으로 이끌어낼 필요가 있다. 한 줄로 정리하자면 문화예술정책의 공공성은 지금의 협소해진 영역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담아 전면적으로 수정 보완되어야 한다.

 

이것은 아직 수면 밖으로 충분히 나오지 않은 코로나 이후 세상에 보내는 병 속의 편지라 하겠다. 도착하는데 꽤 시간이 걸릴 것이며 그 대답도 일조일석에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써 보낼 수 없는 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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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