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전문가 위원으로 참여했던 경인아라뱃길 공론화위원회가 종료되었다. 이 공론화위원회는 명칭 그대로, 매우 잘못 추진되었던 경인아라뱃길 사업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가를 공론화시켜 그 방향을 잡는 것을 목적으로 환경부 주관 하에 만들어진 위원회였다. 이명박 정부 시절 약 2조 7000억원의 국가재정을 투입하여 대대적으로 진행한 경인아라뱃길 사업이 추진 당시 기대효과로 주장되었던 물류 운송 등의 기능에서 예상대비 8% 정도 수준에 이르는 아주 미미한 효과밖에 거두지 못하고 있는 반면, 하천 수질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공론화위는 물환경생태, 물류, 관광레저, 거버넌스의 4가지 분과로 이루어졌으며 2년이 넘는 기간동안 매월 1회에서 2회의 회의가 진행되었다. (코로나19 상황 이후에는 온라인을 통한 화상회의 형태로도 진행되었다.) 개인적으론 문화 분야와 간접적으로 관련된 관광레저 분과위원으로 참여했었는데 지난 2020여 년간 주로 문화정책과 예술기획 분야의 틀 안에서 활동을 해왔던 입장에선 상당히 낯설기도 하고 논의를 따라잡는 게 쉽지 않았으며 특히 수질환경 같은,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다소 고생을 했었다. 여하간 공론화위원회는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숱한 회의와 연구기관과의 협업, 설문조사 등을 통해 최적 대안을 몇 가지 버전으로 도출했고 이를 다시 다수의 불특정 지역 시민들이 참여하는 공론화 워크샵을 거쳐 권고안을 채택하여 정부에 제출한 상태다. (해당 내용은 언론을 통해 소개되었고 검색 가능하다.)
다소 뜬금없는, 토건세력의 무분별한, 명백히 실패한 국토개발 사업의 뒷수습을 감당해야 했던 공론화위원회 활동을 언급하며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이번에 참여했던 위원회 활동을 통해 얻었던 공공정책 공론장의 경험을 문화정책 공론장 활성화를 위한 의제 형성에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란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몇 가지로 구분지어 논의해보자.
명료하고 구체적인 의제, 다양한 당사자들의 참여
우선 문화정책 공론장에서 의제 기획(세팅)을 어떻게 할 것인지의 문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중요하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공론장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정책의 대상과 주체의 이해관계와 입장이 구체화될 수 있도록 의제를 간결하지만 분명한 지향을 담아 구체화시켜야 한다. 아라뱃길 공론화위의 의제는 크게 두 가지, 기능전환과 지난 정책과정에 대한 반성적 성찰로 구체화되었다. 우선은 이미 만들어졌으나 당초 건설 당시 엄청나게 높은 경제성이 있을 것이라 과대 포장되었던 물류 수송의 활성화 가능성이 거의 무의미한 수준이란 게 현실로 입증된 아라뱃길의 기능을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가 가장 중심에 있었다. 또 한 가지는 바로 이런 비현실적인 국가 단위 토건 사업이 도대체 어떤 의사결정 과정을 통해 추진되었는가를 검토하여 이후 이런 비정상적인 사업의 추진을 줄일 수 있는 사회적 경험을 축적해보자는 것이었다. 비교적 뚜렷하게 정책적 과오가 현실로 입증된 사업이었기 때문에 의제 설정 자체는 분명한 방향성을 가질 수 있었다.
이는 문화정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공론장 형성이 요구되는 의제는 일단 매우 현실적으로 체감되면서 구체적으로 해당 정책의 관계자들을 당사자로 호명할 수 있게 짜여져야 한다. 협치가 강조되기 시작한 참여정부 이후 문화정책 분야에서 사회적 공론장의 필요성이 줄기차게 주장되어 왔지만 막상 판을 깔아놓아도 생산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거나 동어반복적인 원칙 확인만 반복하는 경우들도 적지 않았다. 이런 실패들은 전문행정관료 집단들이 공론장(혹은 공론화)의 비생산성을 은연 중에 당연시 여기며 정책결정을 독점하고 공론화의 과정을 아주 형식적으로 처리해버리는 알리바이로 작용하기도 했다. 실제 이명박 정부 시절 관료들은 자주 참여정부 시절 각종 민관위원회들이 소모적이었다는 식으로 발언하며 정책 독점이 효율적인 것으로 포장하곤 했다. 물론 이런 일부 전문관료 집단들의 정책독점에 대한 잘못된 인지 자체가 근본적으로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문화정책 공론장이 이런 교묘하고 비열한 공격에 대하여 생산적인 결과로 반박을 하기 위해서는 공론화 초기에 의제를 구체화하는 데에 훨씬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코로나 상황에서 침체되는 예술 활동의 위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고 치자. (뭐 실제 숱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이다.) 매우 자명하고 단순해보이는 문제이지만 여기서 예술활동이나 활동주체인 예술인, 이를 향유하고 있는 시민, 정책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관이나 공공기관들에 와닿아있는 문제는 각각 조금씩 결을 달리한다. 게다가 여기 감염병 상황에서 공공보건의 안정성을 포함하여 예술활동을 둘러싸고 있는 다른 사회적 상황의 문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방역을 위한 거리두기로 예술활동이 침체되고 있으니 대안적인 공공정책의 방향을 모색하자는 식으로 뭉뚱그려버리면 뭐라도 사업을 만들어 돈을 때려 부으며 "열심히, 잘하자!" 식의 두루뭉수리하면서 하나마나한 결론 외에는 답이 나오기 어렵다.
지난 해 문화부가 시작해 진행하고 있는 문화뉴딜사업 같은 게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그런 식으로 셋팅된 공론장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정책관련된 주체들의 당사자성이 호명된 상태로 참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인들이 도대체 이런 공론장에서 뭘 할 수 있겠는가? 정부와 공공기관에서 만들어지는 지원사업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는가? 그리고 사실 그것은 코로나 상황 이전에도 언제나 그래 왔다. 이것은 의제를 만들기 위한 상황적 조건이지 의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코로나 상황이 표면화시켰지만 예술활동의 위기는 예술가들에게 상수로 존재해왔다. 일반적 시장경제의 논리구조에서는 도무지 해결되기 힘들다는 것이 자명하게 증명되었고 결국 공공이 만드는 지원사업구조에서 활동의 지속성이 간신히 연명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지원사업에 달라붙어 있는 각종 대사회적 명분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예술활동의 분방한 가능성에 대해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같은 부정적 영향을 끼쳐고 온 것이 사실이다. 요컨대 예술인들이 자기주도적 예술활동을 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매우 어려운 구조라는 것이다. 코로나 상황에서의 예술활동의 위기에 대하여 단순히 비대면 공공사업을 늘리고 공학기술적 솔루션 도입을 활성화하자는 것은 위기의 원인과 메커니즘을 깊이 있게 따져보지 않은 것으로 특히 직접 당사자들의 다양한 입장에서 출발하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의제 셋팅에 대해서 뭘 어떻게 주도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라는 것인가? 공학기술적 솔루션의 발전은 정부 등 공공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시장에서 알아서 경쟁적으로 잘하고 있는 분야다.
의제의 명료한 구체성이 공론장 형성의 우선적 조건이자 활성화의 원동력이라면 공론장의 형성을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가 뒤따른다. 현재까지 대부분 한국 문화정책의 공론장은 그 자체를 정부와 기관에서 주도하고 있다. 의제에 대한 초기 아이디어는 외부로부터 비롯되지만 그것을 정리하여 형식화된 공론장으로 제시하는 것은 대부분 정부이거나 정부 산하 국책연구기관이 주도하고 있다. 뭐 그런 과정이 당장은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공신력을 갖고 의제를 만들어 주동할만한 민간 플랫폼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며 지속적으로 논의를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곳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형성된 문화정책이 실제 제도와 예산으로 반영되어야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하지만 현재 정부와 공공기관이 공론장을 운영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첫째, 의제 셋팅의 초기 과정이 지나치게 관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논의에 "또 다른 시각"이 들어오는 것과 좀 더 심도있게 진전되는 것을 제한한다. 둘째, 공론장에 참여하는 이들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편협한 전문가주의나 형식적 배분 논리가 작동한다. 셋째, 상당수의 경우 참여하는 이들의 토의를 뒷받침할 정보와 자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고 있다.
첫 번째 문제는 행정 관행의 전면적 수정이 필요한 것인데 짧은 지면에서 자세히 파고들기 힘들기 때문에 이후 다른 기회에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두 번째 문제와 세 번째 문제에 대해서 일단 논의해보자. 다른 공공정책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정책 분야에서도 공론장이 공식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관련 협단체 등의 정책담당자들과 관련 분야 학자들로 짜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 그나마 청년이나 젠더 등의 의제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약간의 다양성이 생기고 있지만 그것도 대부분 그런 다양성이 반드시 필요한 의제일 경우이거나 형식적 배분 논리에 의해 끼워넣기 식으로 참여시키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정책 당사자들의 참여는 여전히 낮은 비중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는 현재 예술계의 협단체들이 분야에서의 대표성을 제대로 획득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와 연관된다. 특히 논의의 전문성과 객관성을 명분으로 학자, 노골적으로 얘기해서 관련 학과 교수들을 다수 참여시키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학자나 교수라서 문제라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해당 의제에 대해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교수(학자)라면 충분히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 수 있다. 그런데 현실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이와는 좀 다르다. 주로 관료나 기관과의 친소관계로 유지되는, 도무지 잘 업데이트되지 않은 협소한 전문가 풀에 의해 자주 등장하는, 하나마나한 훈수를 두고다니는 교수들도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현실을 밑받침하는 엄청난 착각은 교수, 좀 더 넓게 봐서 아카데미 학문 권력 입장이 중립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대부분 경우 학문 권력의 경우도 해당 분야의 이해관계를 어떻게든 반영하려고 한다. 다만 논리화의 과정을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보이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제를 형성하는 하나의 조각으로서 입장이 존중될 필요는 있지만 중립적인 판관이나 결론을 좌우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 파국을 해결하는 그리스 비극의 극작술)로 역할이 부여되서는 안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공론장이 때때로 필요로 하는 고도의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한 옵서버로서의 참여로 어느 정도 역할이 제한될 필요도 있다.
오히려 논의의 전문성과 심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해당분야 전문연구기관의 역할이 필요하다. 아라뱃길 공론화위의 경우에도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한국문화관광연구원 등의 연구기관에서 위원회의 논의 방향에 따라 지속적으로 필요한 연구들을 꾸준히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위원들이 가지고 있는 상식선에서의 선입관이나 평면적 입장에서의 주장들이 해결되는 경우도 있었고 단순한 오해에서 비롯된 판단의 오류를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론 연구집단과 위원들과의 격렬한 토론을 통해 연구 방향의 문제점들이 (주로 부처의 입장이 반영된 경우가 많았다) 개선되기도 했다. 생산적 공론장을 위해서는 논의를 뒷받침하기 위한 꾸준한 연구와 조사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그냥 위원회에서 이 의제에 대해 학술용역을 만들어 발주하고 나중에 결과물을 형식으로 확인하는 수준에 그쳐서는 제대로 된 정책대안 마련이 불가능하다.
투자, 인내 그리고 시민적 상식에 대한 신뢰
마지막으로 공론장의 생산적인 활성화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보다 개방적인 참여 기회 확대와 절대적인 시간의 투자, 숙고를 위한 인내와 시민적 상식에 대한 신뢰이다. 공식적인 공론장에 참여하는 이들을 아무리 섬세하게 세분하여 확대한다고 해도 의제를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모두 반영할 수 없다. 결국은 회의 테이블에서 만들어지는 몇 가지 정책적 선택의 방향을 무수한 당사자들에게 알리고, 논의하게 하고, 결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의사결정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정책의 공론화 과정을 통해서 당사자들은 정책에 대한 기본적 이해를 키울 수 있고 자기 입장과 전망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전제되어야 정책이 좀 더 실효성을 갖고 현장의 문제를 바꿀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하게 된다.
하나의 잘못되었던 사례를 들어 얘기하자면 현재 문화 분야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법제도인 문화기본법이 만들어졌던 과정을 꼽을 수 있겠다. 박근혜 정부 당시 대통령 공약 사항으로 추진되었던 이 법은 그 자체가 국민들의 문화권리와 정부의 문화정책의 기본적 입장들을 폭넓게 규율하는 법임에도 불구하고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거의 공론화를 거치지 않았고 주무부처 주도로 일방적으로 추진되었다. (형식적으로는 의원입법 법안이었지만 실상 문체부가 만든 법안이었다.) 그 결과 문화기본법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문화예술계에서도 매우 존재감이 없는 법이 되어버렸고 내용적으로도 문체부의 업무를 법적으로 설명하는 수준에 그쳐버렸다. 이런 오류를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절대적인 시간과 인내, 평범한 당사자들의 시민적 상식에 대한 신뢰이다. 모든 공론장은 지난한 과정을 통해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경제적 효율성만을 따지는 입장에선 그 작은 대안을 위해서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자원을 소모할 필요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답은 “충분히 있다”이다. 획기적인 대안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할 때 가져올 수 있는 파급효과는 훨씬 크며 대안 그 자체 내용 못지않게 그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정책과 현장의 공감을 통한 합의야 말로 판을 바꿀 수 있는 힘이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의 시민적 상식에 대한 신뢰에 대해서는 역시 아라뱃길 공론화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대부분 이런 공론화위가 그렇듯이 아라뱃길 공론화위도 중간 지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의사결정 방향에 대하여 위원회 내외부의 이해관계자들의 개입이 암암리에 존재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과대포장된 경제효과를 이유로 예산을 소모한 대규모 토목사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고 하천환경의 생태적 개선이 우선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로운 경제효과로 포장된 사업구조를 어떻게든 끼워 넣으려는 시도들이 해당 지역 지자체를 둘러싼 정치권과 사업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해당 지역 주민과 이해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공론화 워크샵의 결과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많은 걱정을 했었다. 지역 여론이라는 것이 지역 권력의 입장에 따라 왜곡되는 경우를 많이 봤고 한국 사회 시민 담론장이 기본적으로 개발과 성장의 논리에 강하게 잠식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일부 다른 목소리도 존재했지만 더 많은 시민과 지역관계자들을 공론화위의 목표했던 지향에 근접한, 아니 더욱 적극적으로 환경과 공존을 우선시하는 선택을 희망했다. 의사결정을 위한 충분한 정보와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 전제된다면 현장의 당사자들은 행정가나 기획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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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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