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까지도 유행이 식지 않았지만 ‘거버넌스(governance)’라는 용어가 붙지 않는 정부문서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가 있었다. 대중가요 가사처럼 점 하나 가지고 님이 되었다가 남이 되는 그런 지경은 아니지만 정부의 일하는 방식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govern’이라는, 어근은 동일하지만 같은 부모 아래 새로 태어난 형제같은 존재들이 민관의 관계가 빠져 있는 교착상태를 마법 같이 해결해 줄 것처럼 생각했다.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보자.
Government: 통치를 하는 권위, 기관, 아니면 기능 그 자체.
Governing: 자기 자신에 대한 통제 혹은 지배.
Governance: Governing 행위. 즉 정부가 사회의 기대를 반영하여 리더쉽을 행사하는 것을관리 하는 과정 및 그 과정을 포함하는 의사결정.
이것을 읽고 보면 거버넌스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만큼 파격적인 용어가 아님에 실망하게 될 것이다. 거버넌스는 같은 부모 아래 유전적으로 확연히 다른 돌연변이도 아니고 부모의 자리를 찬탈하는 패륜아도 아니다. 통치의 주체가 통치 대상에게 약간의 문을 열어주어서 피통치자가 참여 혹은 참여의 느낌을 통해 스스로가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이다. 그렇다. 다소 가혹하고 극단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문을 몇 개나 열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정하는 것은 통치자일 가능성이 크고 문을 열어 놓아도 들락날락 할 수 있는 사람도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현실적이다.
촛불혁명이라는 유례없는 참여적 민주주의를 목격했고 그러한 정신이 정부의 변화와 혁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모두 기대가 컸다. 하지만 이론에서 말하는 정치행정이원론이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때는 공익을 지키는 영혼이 없어서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어떤 때는 사회 변화의 큰 물결을 감지하는 영혼이 없어서 기계적으로 일을 하는 것인지, 정책을 하는 관료제도에는 일말의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2019년 2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분야별로 살펴보기 위해 기획한 『한국의 문화와 정치: 국가주의 문화정책의 결과(Culture and Politics of Korea: Consequesnces of Statist Cultural Policy』 는 우연히도 이렇게 변화 없는 관료주도적 문화정책의 와중에 출간이 되었다. 사실 이 책은 촛불정국 직전인 2016년 여름에 기획이 되어 그 당시 비공식적으로 무성하던 문화예술에 대한 탄압의 분위기를 학문적 차원에서 풀어보려고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제도의 뿌리는 깊고 유구한 것이어서 유례없는 정치적 경험 이후에도 관료주도적 정책은 그대로이다 못해 더욱 단단해지고 있다. 이 책은 국가주의적 문화정책을 가능하게 하는 요인에 대해 다양한 학문적 이론기반을 적용하여 과거의 사례들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다소 고답적이다. 하지만 각 논문들은 문화정책의 개별적 현상을 다루면서 해당 분야가 안고 있는 혹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구조(즉 이론적 측면)를 설명한다.
문화행정의 관료주의의 뿌리는 어디인가를 논하는 필자의 첫 번째 글은 한국 관료주의 자체의 뿌리가 너무 거대하고도 깊어서 이것이 과연 어떻게 극복될 수 있을까에 대한 회의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A historical trajectory of cultural policy in Korea: transforming cultural politics into cultural policy ) 혹시 이 글을 잘못 읽으면 관료주도적 문화행정의 근원을 찾은 것으로 생각하고 흡족해 할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행간의 의미는, 문화정치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기 때문에 사실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라는 점과 이것을 영속시키기 위해 예술을 그 도구로 차용했다는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국가관리의 체계에 따라 문화행정의 제도를 만들어 운영했고 신분제도 때문에 사실상의 전문가들은 모두 관리체계 내에서 하위구조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런 경직적인 제도하에서조차 나름대로 예술을 아는 전문가를 등용해서 정책분야의 내용을 챙겨보려는 최고통치자가 있었고 (그 의도가 어떠하였든) 이것이 문화예술분야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수백년이 흘러간 지금에도 여전히 현대판 과거제도를 통해 문화관료를 등용하고 문화예술을 시시때때로 정치적으로 활용하며 예술가들은 사회적 위상이 약간 나아졌을 뿐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각각의 논문이 다루고 있는 논의와 오늘의 현실을 대비해 보면 현재 우리를 둘러싼 정책의 모습이 어떠한가가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노승림은 남북의 음악정책 형성 과정 비교를 통해 정치적 이념의 요소와 정책을 담당하는 관료들의 지향성이 어떻게 남북한 두 체제의 음악정책의 내용을 만들어 냈는가를 보여준다. (Cultural policies for national music in South and North Korea: a comparative study) 사회주의에 기반한 북한의 전통음악은 민속음악을 채택하여 이를 서구적 스타일로 재구성하면서 자신들이 지향하는 정치이념을 담는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낸다. 즉 계급적 렌즈를 통해 민속악에 대한 정치성을 부각하고 서구적 방식을 차용한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남한은 엘리트 관료와 전문가들의 합의에 의해 한국의 궁중음악과 서구의 클래식음악으로 한국음악정책의 내용을 구성해낸다. 이러한 제도적 전통은 상당 기간 지속되어 남한의 경우 민속악이 정책적으로 배제되는 상황을 유발하였다.
박소현•김항은 유사한 맥락에서 한국의 박물관들이 설립되는 논리를 설명한다.(Democratization and museum policy in South Korea) 박물관정책의 확장이 광주항쟁과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의 공간을 만드는 논리와 담론을 수용할 수 있는 여건에도 불구하고 올림픽이나 IMF금융위기와 같은 시장적 요소들을 중시한 결과 박물관이라는 제도의 본래적 의미를 잠식해 버리고 시설물로서 확산되는 상황을 만들고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육주원의 글과 장웅조•이다연의 글은 문화분야가 직접적인 정부의 손이 아닌 수많은 관련 공공기관에 의해서 때로는 문화정치 때로는 프로파간다의 도구로 움직일 수 있음을 논증한다. 육주원은 영화분야를 예로 들어 형식적으로는 영화정책을 위한 독립적인 기구를 설정하였지만 결국은 이들을 통해 블랙리스트가 집행되었던 것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 원칙적으로 ‘자율’을 위해 설립된 기관들이 정부로부터의 자율성을 갖지 못한 이유를 불완전한 민주주의에서 찾고 있다. 즉 문화정책의 실패는 제도 운영의 실패에도 원인이 있지만 이를 둘러싼 정치제도의 실패에서 바라보고 있다.(Cultural censorship in defective democracy: the South Korean blacklist case) 정치제도의 실패는 필연적으로 그 제도를 운영하는 참여자들의 실패를 의미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장웅조•이다현 역시 정부조직이 아닌 공공문화기관들이 명목상의 비영리조직일 뿐으로, 국가주도적 패러다임 안에서 모든 것을 정부에 의존하고 있는 심지어는 재정적 안정성을 위해서라면 자율성을 타협하는 태도를 보이는 특이성을 지적한다.(The nonprofit arts organization concept and its transformation in Korea)
이혜경(The new patron state in South Korea: cultural policy, democracy and the market economy)과 정종은(The neo-developmental cultural industries policy of Korea: rationales and implications of an eclectic policy)의 글은 한국 문화정책이 시장경제와의 관계 속에서 그 특징을 구성해 나가는 것으로 분석한다. 전통적인 문화정책은 시장경제에서 열위에 있는 순수예술을 기준으로 정책의 특성이 만들어지는데 한국의 경우 한류나 문화산업과 같은 시장 영역이 적극적으로 포섭되는 새로운 종류의 후원국가의 모습을 보인다든지, 신발전주의적 패러다임을 문화에서도 실현해 보이는 국가로 설명한다. 전자의 경우는 시장의 위기보다는 기회의 측면(문화시장의 확장)을 더 크게 인식하는 가운데 발현되고 후자의 경우는 시장의 위기(경제위기) 측면에서 발현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어느 경우에든 문화-국가-시장의 상호 유기적 관계에 주목하고 있는데 관료제도는 경우에 따라 장애가 되기도 하고 디딤돌이 되기도 한다.
김세훈•김세준은 지방자치 단위에서 일어나는 정부주도적 개발현상에 대해 문화적 도시공동체 재생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Rethinking culture and development: the culture-led community development project in South Korea) 정부가 사회발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지향점이 있지만 이를 직접적으로 하기보다는 상징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경향을 띤다고 지적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적 지역개발에서 다양한 참여가 보장되는 제도적 환경의 유무에 따라 어떤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가를 예측할 수 있다.
아무래도 기획의 주제가 관료주도적 문화정책의 모습이 어떻게 다양하게 드러나고 그 결과가 무엇인가에 중점이 있기 때문에 정책의 또 다른 주체인 예술가나 시민을 분석하는 부분이 부족하다. 그런데 거의 모든 글에서 명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재정적 안정성과 예술적 자율성의 타협에 흔들리는 예술가들의 모습이 새나오기도 한다. 블랙리스트의 집행은 시장을 대체하는 정부의 재정권력이 작동했음을 모르지 않는 상황에서 이러한 모습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사실 관료주도적 정책틀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는 문화예술분야뿐만 아니라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운영되고 있다. 너무 시간과 품이 많이 들고 문을 열어주는 사람 즉 궁극적으로 거버넌스의 운영과 조율을 해야 하는 관료들 자신의 책임성이 증가하기 때문에 제도의 운영이 정체되어 있을 뿐이다. 이러한 구조가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공복으로서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매우 번거롭고 소위 ‘모양이 빠지는’ 일일 것이다. 다시 되돌아가서, 봉사를 해야 하는데 봉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뽑는 방식을 쓰지 않고 무엇으로써 봉사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성찰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을 문화행정가로 선발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관료 충원 방식은 문제를 야기한다. 수 세기 전과 같은 방식으로 문화예술행정에 종사하는 사람을 충원하는 것으로 어떤 발전을 바랄 수 있는지 궁금하다.
통치성이 통하지 않고, 모두가 동일한 생각을 할 때 다른 생각을 해도 비난 받지 않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효율성을 연습하지 않는, 관계와 소통을 연습할 수 있는 유일한 장인 문화예술은 그래서 어쩌면 민주주의의 가장 큰 연습장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주주의가 문화보다 먼저이면서도 문화로 민주주의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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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기원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문화행정학과 교수.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연구 작업을 하고 있다. 권위주의와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주제, 예술의 자존과 자생을 만들어 낼 수 있어 보이는 모든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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