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학이나 정치학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전통적인 거번먼트는 관료체계를 통한 효율과 효과를 정당성의 자원으로 삼는다. 하지만 사회가 복잡해지고 다양한 국가의 문제–재정문제나 정당성의 한계 등-로 인해 정당성의 위기가 발생하고 당연히 알아서 할 것이라 생각했던 정부 기구의 기능이 문제를 일으킨다. 블랙리스트의 작동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원적인 반헌법적 불법행위라는 관점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합법의 영역에서 작동된 ‘정상적이라 생각한 바로 그 기능’의 결과로서 고려할 때 더 많은 사실들을 드러낸다. 이를테면 공적 재원인 재정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창작을 지원한다고 할 때, ‘어떤 기준에 의해 지원할 것인가’라는 분배의 원칙을 필요로 한다. 재원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누구는 지원을 받고 누구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일차적으로는 지원을 받는 입장에서의 충분성이 이야기될 수 있겠으나 본질적으로는 지원을 받지 못하는 입장에서의 이해나 납득이 관건이다.
실제로 한국의 문화재정은 문화 체육 관광 분야 총계로 2019년 7조 2천억 원 수준인데 이는 전체 예산 469.2조의 1.5%에 해당되는 규모다. 부서 예산으로 보면 2019년 문화체육관부 예산은 5조 9,233억 원이고 문화예술 부문은 1조 8,853억 원으로 전체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에 31.8%에 해당한다. 문화예술 부분에서 문화가 있는 날이나 문화가 있는 주말프로그램 등 문화향유 사업, 공공도서관, 작은도서관, 문화원 등 건립비용, 통합문화이용권 등 문화복지 사업을 빼고 예술인 창작지원에 대한 항목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통한 창작 지원사업과 예술경영지원센터 등을 통한 해외 진출 및 예술인력 양성 사업들로 한정되고 이 규모는 기관운영비를 포함하더라도 2천억 원 내외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의 3.3% 정도인 셈이다. 한국 예술창작지원 정책의 문제, 블랙리스트가 작동하는 토양이기도 한 문제는 매우 한정된 예산규모이고 이로 인해 예산배분의 정당성을 둘러싼 갈등이 첨예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한다.
하지만 블랙리스트 사태를 관련 예산의 증액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접근인데, 왜냐하면 너무나 손쉽게 ‘이 모든 것이 예산 자체가 부족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피해자’라는 공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술지원 예산이 늘어난다 하더라도 분배의 ‘정당성 문제’는 별개의 문제로 고민해야 한다. 이를테면 정부의 성격에 따라 선호되는 예술 표현 혹은 산업화의 경로, 혹은 문화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예술지원 정책은 정부별 문화정책의 맥락과는 독립적으로 다양성과 개방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와 같은 개방성과 다양성이 확보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것이 쟁점이 되고, 결국 이는 예술지원정책의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혁신을 위한 TF가 이의 구체적인 권고 중 하나로 현장소통소위원회의 설치를 제안한 것은 바로 그 정당성의 근거로서 ‘예술현장’을 호출한 것이고, 예술정책의 근거로서 ‘현장성의 복원’을 주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소통에 머물지 않는, 문제해결을 위한 플랫폼
현장소통소위원회는 그래서 기존의 소위원회와는 다르게 아르코혁신TF의 위원추천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말로는 현장성의 복원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는 구체적인 제도의 운영과정을 통해서 실험되어야 했기 때문에 애초 예술정책의 정당성 회복이라는 차원에서 어떤 의제들이 가능하고 어떤 방식의 해결책이 가능한지 모색할 시기가 필요했다. 특히 단순히 예술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창구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예술현장의 문제들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이를 ‘해결 가능한 문제’로 재정의 하는 역할에 주목했는데 이는 실효성의 문제 때문이었다. 실제로 기존의 다양한 거버넌스들은 일종의 창구로서 수많은 목소리를 담아내는 데는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목소리에서 요구하는 문제의 해결과정이라는 부분에서는 실효성이 낮았다. 현장소통소위원회는 소통의 창구로서가 아니라 현장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플랫폼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의 첫 번째 의제는 혁신TF의 제안에 포함되어 있었던 ‘예술창작 공정보상 체계 마련을 위한 제도 개선’을 잡고 어느 정도로 구체적인 문제해결의 방식을 찾을 수 있는지 실험했다. 그 결과 문학 분야나 새롭게 도입하는 특정 공모사업의 경우에는 공정보상 기준을 별도로 제시하여 운영하는 방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 밖에 공공지원 경연제도의 문제점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대한민국연극제, 지역에서 발생한 공연장 사고의 후속처리와 관련된 현안에 대해서도 현장소통소위원회의 제도개선 과정을 통해서 접근이 가능한지 탐색했다. 특히 도시재생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진행되고 있는 예술인 레지던시 사업이 실제 예술인의 창작 자유를 훼손하고 지나치게 예술인의 활동을 도구화하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인 공론화를 진행한 것은 매우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왜냐하면 해당 사안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직접 관계를 맺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인데 실제로 아르코 혁신TF에서는 사업에 대한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더라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유일한 국가 수준의 예술인기구로서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이 예술인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개입 -권고의 방식이든, 공론화의 방식이든- 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현장소통소위원회에서는 아르코의 사업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더라도 예술인의 권리와 닿아 있는 의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모델을 만들고자 했다.
*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회의 논의 안건(제1차~19차 회의, 매달 2회씩 격주 개최)
△예술창작 공정보상 체계 제도개선, △예술계 현장소통을 위한 페이스북 페이지 개설 및 예술계 현안 청원 및 제안 공론화 홈페이지 개설, △다원예술 분야 지원사업 복원, △예술위 신임 위원장 후보 추천, △2018년 제3회 대한민국연극제의 불공정한 심사에 대한 연극계 발발, △예술창작 공정 보상체계 제도개선 간담회 개최, △아르코 혁신 T/F 후속조치, △예술계의 e나라도움 사용 관련, △소위원회 위원의 문예기금 수혜시 해촉 관련, △서울시 운영 ‘한성대 캠퍼스타운 예술가 레지던시’문제점, △2018 대한민국연극제 등 (사)한국연극협회 보조금 미정산 현황, △문화민주주의 실천연대의 문화예술 혁신 토론회 개최, △예술가 대상 도시재성 사업 현황, △현장소통소위원회 2기 위원 선출 관련, 방방곡곡 사업 중 청년 스테프 사망 사고 현황, △블랙리스트 관련자 징계 현황, △예술창작공정보상체계 제도개선 간담회 후속조치, △대한민국공연예술제 및 지역대표공연예술제 경연형 지정사업 검토, △아르코 소통 홈페이지 개통 및 운영, △2019년도 신규 청년예술가생애첫지원사업 현황, △2019 아르코 공연장 정기대관 신청 자격 제한에 따른 예술계 불만 제기, △예술가 대상 레지던스 현황 점검 간담회 개최, △아르코 혁신 T/F 혁신의제 추진경과 보고회(12.21) 추진 계획, △2019년도 아르코 문예진흥기금 2차 공모사업 지역 설명회 추진 계획, △제2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신임 위원 선발 방안 등 |
또한 현장소통소위원회에 다양한 의제들을 제안하고 각각의 의제들이 어떤 방법과 경로를 통해서 해결되고 있는지를 공개할 수 있는 현장소통소위 플랫폼을 별도로 개설했다. 해당 온라인 플랫폼의 개설 목표는 문제해결 과정의 공개에 있었다. 실제로 어떤 의제가 제안되었을 때 각각의 의제들이 어떤 방식으로 해결을 꾀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떤 방식이 결론이 났고 이에 따른 후속조치가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어야 소통플랫폼의 실효성을 높일 수 있다.
이런 관점은 한편으로는 제안된 의제를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결과중심의 소위원회 운영 관성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의제들을 집적해서 예술현장의 의제들을 선도적으로 발굴한다는 취지를 가지고 있다. 특히 결과중심의 소위원회 운영은 실질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조건이기도 하지만 역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의제들을 배제하려는 부작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결과와 병행해서 과정에 대한 쟁점과 절차를 공개하는 것은 다영한 예술현장의 의제를 최대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한계 역시 존재한다. 첫 번째로 예술계의 오랜 시간 구축된 관성 문제다. 오래된 문화행정의 관성은 단 한 번의 간담회나 제도 개선안으로 바뀌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필요한 것은 관성을 이겨내는 지속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의 제도 변화는 기존 제도에 익숙한 예술당사자들이 수용할 수 있는 변화여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주요한 논의들이 장르의 미세한 차이들로 나눠지는 것 역시 중요한 한계로 드러났다.
2018년도 현장소통소위원회 소통 플랫폼
현장소통소위원회는 제2기 위원을 공개모집으로 전환하여 구성했다. 그리고 그동안 소위 위원을 해당 소위를 담당하는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이 선정하는 방식에서 현장 활동을 하고 있는 예술인이 직접 선출하는 과정을 도입했는데 실제로 선정단에도 소위위원 공모과정에도 참여의 수준이 높았다. 적어도 이런 경험이 예술인의 행정참여에 대한 기본적인 오해 -예술인들은 공모사업에만 관심이 있다는 식의 -를 해소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미 깊다.
실제로 현장소통소위원회는 다른 소위원회 구성과정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참여 거버넌스 방식의 행정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시적 기능을 하고 있다. 현장소통소위는 여전히 실험적인 상태에 놓여있다. 현재 시점에서는 예술정책의 정당성 근거로서 예술현장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호하고 그것이 거버넌스의 방식으로 가능한지도 모호하다. 하지만 적어도 블랙리스트는 기존의 위에서 아래로의 거번먼트로는 안 된다는 전환의 필요성이 되었다. 어떤 거버넌스인가라는 질문은 적어도 블랙리스트 이후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현장소통위원회의 시도가 그 고민의 한 맥락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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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사)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연대 집행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집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 블랙리스트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혁신을 위한 TF 위원,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문화/예술 재정과 예술활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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