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블랙홀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다. 한일관계 갈등으로부터 시작되어 조국 사태로 이어지는 정국에서 그동안 논의되고 있던 온갖 의제들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모양새다. 문재인 정부 출범이래 계속 삐걱대온 국회는 거의 개점휴업 상태이고, 시민사회조차 운동의 동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상황이면 늘 그랬듯 블랙리스트 문제로부터 시작된 문화예술행정의 혁신 문제나 예술인권리보장의 문제 등 문화예술 관련 정책이슈들은 가장 먼저 잊힌 과제가 되어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한국형 엥떼르미땅을 표방하며 주요한 정책과제로 제시했던 예술인고용보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말 그대로 험난한 논의 과정을 거치며 입법 코앞까지 왔던 논의가 멈춘채 항간에서는 다음 국회의원선거가 끝난 뒤를 기약하는 한숨 섞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이른바 생활예술인에 대한 예술인고용보험 적용 문제라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던져지며 그간 예술인고용보험의 적용 대상과 범위에 대한 논의마저 혼란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이러한 상황이 예술인고용보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설정을 다시 돌아보고 이후 제도 시행 과정에서 부딪힐 다양한 문제점들을 점검하여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생활예술인의 예술인고용보험 적용 문제를 중심으로 우리가 넘어야 할 과제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정책적 관점에서 ‘생활예술인’이란 굉장히 모호한 표현이다. 일단 생활예술 혹은 생활문화 자체에 대한 정책적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 현재 문화예술정책에서는 생활문화와 생활예술을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일부 연구에서 생활문화정책은 문화향유의 관점에서 수혜자 확대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생활예술정책은 예술행위를 통해 개인의 삶의 질 향상에 초점을 맞춘 정책으로 개념정의1) 하고 있으나 이를 정책적 합의에 이른 견해라 보기엔 어렵다.
현재 생활예술/생활문화에 대해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정의는 ‘지역문화진흥법’이나 지방자치단체의 생활문화 활성화 조례에서의 정의 정도이다. 지역문화진흥법에서는 생활문화에 대해 “지역의 주민이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하여 자발적이거나 일상적으로 참여하여 행하는 유형·무형의 문화적 활동”2)으로 정의하고 있으며, 서울시의 생활문화 진흥에 관한 조례에서는 생활문화단체를 “「예술인 복지법」제2조제2호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모이거나 동아리 간 결성하여 문화적 욕구 충족을 위해 자발적이거나 일상적으로 참여하여 행하는 유형·무형의 문화예술 활동을 하는 단체”로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 따르면 생활문화 또는 생활예술이란 비전문성, 자발성, 일상성에 기반해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유무형의 문화적 활동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위의 내용만으로 보면 예술인고용보험의 적용범위를 두고 생활예술인을 고민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정의들이 생활예술/생활문화 현장의 인적구조와 상황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태계의 관점에서 생활문화는 동아리 등의 활동을 통해 참여하는 시민을 비롯해, 최근 지역문화진흥원이나 지역 문화재단 등을 통해 양성되고 있는 생활문화전문인력, 생활문화 공간을 운영하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개인이나 단체, 생활예술교육을 제공하는 전문예술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생활문화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 현장에서 말하는 생활예술인들은 이러한 다양한 주체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이중 직업적으로 생활예술 분야에 참여하고 있는 주체들에 대한 예술인고용보험 적용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 밖에도 생활예술동아리나 개인들이 지자체의 축제나 공연 등 문화예술용역에 직접 참여 참여하는 사례가 증가하면서 이러한 주체들을 정책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지, 또는 생활예술 활동을 통해 직업적 예술인으로 진입하거나 그 경계에 서있는 주체들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예술인고용보험 적용 대상을 두고 생활예술인 문제와 같은 새로운 변수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예술인고용보험 논의가 정체 되는 상황은 한국의 예술인고용보험 제도 자체가 갖고 있는 한계 때문이다. 정부가 예술인고용보험의 초기 모델로 삼았던 프랑스의 엥떼르미땅 제도는 그 대상과 범위가 특정되어 있는 제도이다. 프랑스의 경우 보편복지라는 기본적 전제하에 예술활동의 유형과 성격별로 다양한 형태의 사회보험제도가 운영되고 있으며 엥떼르미땅 제도는 방송/공연/미디어 분야의 비정규직 형태의 예술노동을 하는 예술인을 대상으로 하는 보조적 성격을 갖는 제도이다. 반면 한국의 예술인고용보험은 임금고용형태의 예술노동에 종사하는 자를 뺀 나머지 예술인 전반을 대상으로 하는 제도에 가깝다. 그렇다보니 상이한 예술노동의 형태를 갖는 적용대상에 따라 제도 자체의 내적 충돌이 끊이지 않고, 고용보험의 확대를 통해 예술인에 대한 최소한의 사회안전망을 확보하고자 했던 애초의 취지가 고용보험제도 운영의 안정성에만 초점이 맞춰지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합의와 정책의 중장기 계획
생활예술인의 예술인고용보험 적용 문제에 대해 보다 많은 예술인들이 이 제도의 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이를 담아낼 수 있는 기준을 적극적으로 마련해야 한다는 견해부터, 생활예술 자체가 시민의 동아리 활동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예술인고용보험에서 고려해야 할 사안은 아니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지역문화 활성화란 정책적 맥락에서 생활문화/생활예술 사업과 활동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이 문제가 쉽사리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현재의 예술인고용보험 논의가 공전하거나 시행이 늦춰지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현재의 예술인고용보험은 예술인에 대한 사회안전망의 전체적인 밑그림을 그리는 작업에 가깝고, 이 작업이 늦어질수록 이 안전망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다양한 예술인들에 대한 대안을 만드는 과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다.
현재 가장 시급한 과제는 예술인고용보험제도의 시행이다. 그리고 예술인고용보험제도의 운영을 위한 사회적합의기구3)를 설치하고 생활예술인과 같이 변화하는 문화예술생태계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주체들이나 기존의 제도로 보호받기 힘든 예술인들을 위한 지속적인 논의구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장기적으로는 임금노동 중심의 현행 고용보험제도에 대한 정비와 실업급여의 성격을 명확히 하여 예술인고용보험과의 상호보완적 관계설정이 필요하다고 보인다. 생활예술인 문제와 관련해서는 생활문화/생활예술에 대한 정책적 합의와 중장기적인 계획의 설계가 필요하며, 그 속에서 생활예술인의 권리와 처우에 대한 계획이 함께 수립되어야 예술인고용보험제도 안에서의 생활예술인의 위치도 보다 명확해 질 것이다.
1) 「서울 생활예술 2031 액션플랜 연구」, 정종은 외, 2017
2) 지역문화진흥법 제2조(정의)제2호
3)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서는 이와 관련해 제도개선 권고안에 문체부에 예술인복지위원회를 설치하고 이러한 사회적합의기구, 거버넌스 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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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장호
예술인소셜유니온 운영위원장. 협동조합 고개엔마을 이사장. 희망의노래 꽃다지에서 오랜기간 기획자로 활동하였고, 현장활동을 바탕으로 쌓인 고민을 안고 문화운동에 뛰어들었다. 예술인소셜유니온 사무국장을 거쳐 현재는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예술인복지재단 공정예술생태 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성북지역을 중심으로 지역문화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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