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계의 주요한 생산물 중 하나는 연구, 소위 논문이다. 연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연구의 주요 주제인 특정 개념에 대한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이러한 작업은 매우 당연하고 기초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실상 관련된 선행연구들을 짚어가다 보면 이것이 그리 만만치 않은 작업임을 금세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또한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논의를 위한 정확한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연구자가 사용하는 주요 주제어에 대한 상호합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학술적 정의와는 별개로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은유적 힘이나 뉘앙스에 의해 무한한 확장가능성을 가진 단어들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문화’란 단어가 그렇다. 동네 체육관, 복지시설, 유치원, 학교, 심지어 사우나, 미용실, 병원, 분식집까지 제 이름에 ‘문화’를 붙이는 예는 민간에서 공공영역까지 폭넓다. (궁금한 분들을 위해, 실제로 낙원동 ‘문화사우나’, 인천 동구 ‘문화미용실’, 신공덕동 ‘문화병원’, 홍은동 ‘문화분식’이 있다.) 과연 여기서 문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공통된 의미가 존재할 수도 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자신의 상호 앞에 ‘문화’를 붙인 업주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진행한다면, 이들이 바라본 문화에 대한 해석과 의미는 아마 학술적 정의와는 사뭇 다를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문화’가 다른 용어들에 비해 명확한 의미를 집어내기 어렵기 때문일 수도 있다. 크리스 젠크스(1993)는 그의 저서, 『문화(Culture)』에서 용어가 지닌 태생적 불명료함 때문에 바보이거나,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기 좋아하는 학자가 아니라면 감히 문화와 관련된 책을 집필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라고 기술한 바 있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접근하다보면 ‘문화’의 정의도 특정 시대의 독특한 상황과 역사적 변곡점, 맥락 등에 의해 구조화되고 변형되며 흥미로운 진화과정을 거쳐 오늘 날에 이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연구에서 핵심 개념에 대한 정의는 기존의 문헌들을 좀 더 면밀하게 분석할수록 더 나은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현장의 목소리를 수집하는 질적연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항상 아쉽고 우려스러운 점은 이러한 학계의 전통적 관습이 정책의 목적과 설계에 있어 주요한 용어를 정의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 근거로 사용될 때이다. 이에 대한 부작용으로,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공유되며, 어쩌면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개념의 정의는 무시되고 묻혀버리다. 이는 특정 개념에 대한 학술적 정의가 절대적 진리가 아닌 당시 사회상과 맥락에서 진화된 상대적이고 귀납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선행연구에 소개된 정의를 충분한 고려 없이 소개한 학계와 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한 정책기관의 시너지 결과라 볼 수 있다. 마치 이를 비판하듯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궁극적 의미는 학술적 정의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닌 일상의 사용에 있다고 보았다. 일상의 언어를 학술적으로 개념화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근본적으로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오히려 놓치게 될 수 있음을 그는 경고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정책의 수립과 목표설정에 상정한 용어가 현장에서 어떻게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공유되는지를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예술의 자생력’도 그렇다. 지난 몇 년간 예술지원사업 효과 연구나 평가 연구에서 부딪치는 문제다. 2014년과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상주단체 육성지원사업과 공연예술창작산실 연구를 하며 예술단체의 자생력에 대한 정책관계자와 예술가의 이해차가 컸는데, 이로 인해 예술가들이 느끼는 정책상의 문제점이나 부담감은 심각했다. 전술한 ‘문화’의 과도한 사용 예시는 일종의 흥미로운 사회현상이라 할 터이지만, ‘예술의 자생력’은 이를 무엇으로 정의하고 목표할 것인지에 따라 정책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어떤 단체를 지원하고 지원하지 않을 것인지가 가려진다. 현장의 누군가에게는 생존의 문제이고, 국가 전체로 보면 어떤 예술이 더 우월한지, 어떤 예술이 지원받아 마땅한 예술인지 아닌지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 된다.
더욱 우려스러웠던 점은, 지원기관에서 사용하는 정책 용어가 현장 예술가들이 처한 환경에 대한 고려, 또는 이들이 일상에서 ‘예술의 자생력’을 어떻게 생각하고 의미화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해나 고려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정책수행기관이 정책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나 소통 없이, 두 주체 집단이 공동의 상호 합의된 목표가 부재한 상태에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연구에서 예술가의 인터뷰를 살펴보겠다.
예술가들을 인터뷰하면서 발견한 중요한 사실은, 정책의 핵심목표 중 하나였던 ‘예술의 자생력’이 지원기관인 아르코와 수혜자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놀라울 정도로 이질적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앞서도 기술했듯이 ‘정부가 왜 예술을 지원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과도 직결된다. 지원기관의 입장에서 ‘예술의 자생력’이란, 더 이상의 공적자금의 지원 없이 시장에서 말 그대로 ‘자생’하는 것이다. 즉, 창작활동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고, 다음 프로덕션의 준비를 위해 창출된 수익을 재투자 하며, 유통과 마케팅을 원활히 하여 예술단체가 레퍼토리를 계속 늘려가며 자신의 브랜드를 구축하고, 충성고객층을 득하는 선순환의 과정을 만들어 가는 것이 예술의 자생력이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순수예술분야에서 실제로 얼마만큼 가능한 논리일까? 인터뷰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이미 한국의 예술계에서 전문성을 획득한 중견예술가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관점은 사뭇 달랐다.
현장의 예술가들은 공통적으로 ‘예술의 자생력’이라는 용어 사용에 대해 정책적으로 예술생태계를 고려한 대안적 정의와 개념이 필요함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예술가들의 관점을 드러낸 대표적 증언은 아래와 같았다.
자생력이라는 말을 쓸 만큼 우리나라 공연 문화 시스템이 건강한지 모르겠어요. 조금 잘 되면 기업화가 돼서 기업이 가져가고, 서울에서 기획사들이 몇 번 달려들었어요. [...] (현 정책적 맥락에서) 자생력이라는 것은 예술적인 게 아니고 생계와 직접적인 관계인거지. 그런데 그렇게 접근했을 때 자생력을 가지고 있는 예술가들이 우리나라에 어디 있어, 몇 빼고는 없지.
자생력에 대한 부분은 예술단체가 알아서 혼자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에요. 그건 대한민국 전체의 문화수준이 향상 되어서 ‘우리의 삶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문화라는 정신적인 양분을 보충 할 필요가 있다’라는 의식이 전제되어야 해요.
그렇다면 예술가들이 생각하는 예술의 자생력은 무엇일까. 이들의 이해를 정리하면, 경제적 사정이 비록 여의치 않더라도 ‘지속적 창작이 가능한 상태’였다. 이는 수익창출, 재투자, 홍보, 마케팅, 유통을 포함한 개념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공연예술단체들은 롱런을 해야 돼요. 그게 자생력이어야 해요. 조직이라는 것은 누구하나 빠져버리면 공연 자체를 못해버리니 한 사람 한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예술을 하고 싶으니까 (단원들에게) 단순히 연극적 애정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리는 거죠. 그냥 그야말로 ‘떳다방’식이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런데 창작산실하면서 배우들한테 극단에서 처음으로 이백만원 넘게 이백오십만원까지 드렸던 거 같은데. 최고 나이 많은 20년 넘게 연극을 하신 선배님께서 갑자기 전화가 왔어요. 통장에 이게 들어왔는데 이게 맞냐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이들이 정의한 자생력을 설명하는 하위개념들은 ①대중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 ②네트워크를 포함한 사회자본(신뢰), ③조직의 안정적 운영능력, ④(일종의 예술적 투혼에 기반한) 조직 내 공동체 정신, 그리고 ⑤정책에 대한 정보력과 이를 소화할 수 있는 행정능력으로 압축된다.
무조건 창작하고 대중들의 마음을 읽는다고 해서 자생력이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고 그런 마인드를 가진 단원들이 함께 하는 게 중요하죠. 그리고 우리가 어려워도 하겠다, 우리가 예술가로서 정말 배고파도 예술을 하겠다, 이런 의지가 있어야 해요. 그런 의지의 바탕에 관객들의 마음을 읽을 수도 있어야 되고 창작도 해야 되고.
저는 실질적으로 현장을 뛰던 사람이니까 무대 세트하는 분들 잘 알고 의상하신 분들 전부 다 쉽게 말하자면 인맥이 있었죠. 적은 돈이지만 그 사람들도 예술 하시는 분들이니까 서로 도와주는 차원에서 이렇게 하다보니깐 공연도 계속 올리게 되고 창작도 하고.
공연을 아무리해도 공연 수입으로는 살아갈 수 없어요. 그래서 계속 순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하고 산골짜기에서 (단원들과) 농사를 지어요. 돈이 없으니깐 살려고 하는 방식이 그거였어요. 같이 벌어서 같이 쓰고. 남는 건 없지만 남으면 연습실이라든지 사무실이라든지 집기라든지 이런 것들에 투자를 하니깐. 그래서 단체가 같이 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문화예술위원회에 지원금 신청하는 기간이 있잖아요. 그럼 수시로 홈페이지 들어가서 정보를 검색하고 우리가 예술활동 하는데 우리 단체가 활동하는데 가장 적합한 지원제도가 무언지 잘 찾아보고. 구성하고 창작 능력이 있는 단체가 더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획안. 그런 능력이 생겼다는 것. 자생력이 향상 됐다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아닐까요.
다시 비트켄슈타인으로 돌아가 보자. 그는 언어는 절대적 기호로만 존재한다는 자신의 초기 입장을 철회하고 ‘매일 사용되는 언어를 바탕으로 철학을 성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러한 후기사상은 일상 언어를 바탕으로 철학 문제에 접근하여,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철저한 분해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를 본고에서 논한, ‘예술의 자생력’에 대입해 보면,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정책설계와 실행, 그리고 그 사업의 효과를 평가하는 연구 측면 모두에서 예술 현장에서 사용되는 자생력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인용하여 정책적 접근과 문제에 대한 분석에 임하는 자세를 요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지원방식과 평가에 있어서도 실제 현장에서 생각하는 실행가능한 자생력을 키우는 전략이 필요하다.
철학전공이 아니기에 비트켄슈타인을 인용하여 글을 맺는 것이 부끄럽다. 그러나 그가 말한 일상 언어 철학에서는 언어란 역사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서 불확정적이고 풍부한 의미를 통해 발전을 거듭하여 다의성을 띄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은 우리의 정책 환경에서 무엇이 더 중요하고 어디에 더 귀 기울여야 하는가에 본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따라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예술의 자생력. 당신의 정의(定意)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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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설
전남대학교 문화전문대학원 부교수, 전남대학교 부설 문화융합연구원 문화예술경영연구센터장.
예술의 경제적 가치보다는 예술을 통해 사회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주제들을 접할 때 가슴이 뛴다. 커뮤니티 아트, 문화예술교육, 예술치유, 문화정책 및 거버넌스로 예술을 통해 창출할 수 있는 사회자본 및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를 주로 연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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