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형’, ‘순천다움’, 작년부터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담론이다. 순천다운 것은 무엇인가? 좋게 말하자면, 지역의 여건과 특성을 고려해 사업을 계획하고 그 결과가 ‘메이드 인 순천’처럼 순천모델, 순천스타일로서 하나의 브랜드 가치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순천다움이란 곧 ‘순천’ 자체가 브랜드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리라. 그럴 듯하게 보이지만 이것을 어떤 사업에 가져다 붙이든 간에 그것이 왜 순천형/순천다움이어야 하는지, 순천다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순천다움의 근거는 무엇인지를 설득력 있게 밝혀야 할 것이다. 단순히 순천에서 하는 모든 사업에 ‘순천형’을 붙인다 해서 차별화 될 것이라는 생각은 섣부른 말장난에 불과할 것이다.
지역에 최적화된 예술공간?
2009년,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다가올 앞날이 암울할 것 같아 서울 생활을 접고 순천에 내려왔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고향이었지만 많은 것이 처음엔 낯설었다. 카페와 함께 예술공간을 오픈하자 사람들이 찾아 들기 시작했다. 직접 꾸민 카페 분위기도 독특했고, 음악공연을 비롯해 영화상영회, 전시와 강연, 실험적인 퍼포먼스 등 이색적인 프로그램들이 이어졌다. 관객을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단골들이 생겨나고 호기심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초창기 공간 운영 스타일은 확실히 순천형이나 순천다움은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서울에서 접할 수 있을까 말까하는 공간의 분위기와 운영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서울과 순천이 동질 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여러 면에서 그 차이를 간과하고 있었다.
동시대 예술이니 다원적 실험예술이니 하는 것이 지방 소도시에 그닥 알려지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아마도 초창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돈키호테 너희가 무엇을 하는지 지켜보자는 생각을 가진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예술공간 돈키호테를 설명할 때, 동시대 예술을 연구하고 지역에서 그러한 예술 작업을 소개하는 것을 가장 우선에 둔다고 말한다. 동시대 예술에서도 특히 실험음악이나 실험영화, 즉흥적 라이브 퍼포먼스에 관심을 가져왔다. 확실히 이 분야는 일반 대중의 주목을 끌만 한 이슈성이나 오락성, 또는 상품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분야 아티스트들의 태도는 매체나 형식 실험에 대한 개인의 탐색에 집중하는 성향이 강하다. 예술적 코드나 개념, 태도나 취향이 비슷하지 않다면 때로는 이게 뭐하자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 있고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난해한 예술로 느껴질 수도 있다. 사실 분석하기 위한 작업이 아닌데도 말이다. 상징, 은유 따위의 뭔가의 코드를 잔뜩 심어놓고 그것을 낱낱이 해부하듯, 해체해 보여주며 이해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방식으로 현대예술이나 동시대예술을 대하는 것도 답답할 지경이다. 기성의 음악이나 영화-영상이라는 장르적 문법과 형식에 충실한 것도 아닌데다가 그것에 반하거나 무시하는 작업들이 많다보니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
2012년 공간을 옮기고, 야심만만하게 추진했던 아티스트 레지던스 프로젝트에서는 ‘기억과 증명’이라는 주제로 참여 예술가와 함께 지역 리서치를 시도했다. 당시 예술계에 역사와 함께 ‘기억’이라는 담론이 넘쳐났는데, 돈키호테는 예술가가 비물질적 ‘기억’을 어떻게 물질적으로 ‘증명’하는가에 관심을 가졌다. 아티스트들은 자신의 개념과 방법론으로 순천에서 리서치를 해 나갔다. 그 시작과 과정, 결과를 공유하면서 예술가의 리서치 방법론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때의 경험은 2013년, 70년대 순천에서 촬영된 두 편의 영화를 발굴하고 공동체 상영회를 개최한 <시네마무진>이나 서울 신당동 지역을 역사적 기록과 지도, 주민의 구술을 통해 매핑했던 <신당동시간매핑>과 같은 독특한 지역 리서치 기획으로 연결되었다. 그런 다음 2015년에는 경기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지역연구에 대한 이론과 국내 연구사례, 다양한 리서치나 아카이빙 방법론을 강연과 라운드테이블 프로그램으로 기획하였고, 『우리는 어떻게 지역연구에 접근하고 잇는가?』라는 제목으로 자료집을 엮어 내기도 했다.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돈키호테의 지역연구는 그때의 아이디어들이 연속방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티스트들이 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그들이 머물고 교류하는 예술공간도 그런 것이다. 돈키호테는 관객에 집중하기보다는 예술가들에게 집중하는 공간이다. 이것이 몇 해를 더 넘기며,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두 운영자가 암묵적으로 규정한 예술공간의 정체성이다.
문화예술 연구의 탐색 대상으로서의 ‘지역의 역사’
돈키호테가 공간 운영에만 집중했던 것은 아니다. 공간 프로그램을 많은 하는 것이 출중한 것도 아니다. 돈키호테는 공장(工場)이 아니다. 비움이 있으므로 채워지는 공간(空間)이다. 나는 게으른 인간이다. 게으른 사람에게 근면성실은 생리적으로 맞지 않다. 좋은 기획을 하자면 안거(安居)의 시간을 갖으며 연구할 시간이 필요하고, 때로는 다른 공간과 시간을 탐색하는 망상을 위한 출정도 필요하다. 우리는 가끔 출가(出家)의 때를 이야기한다. 모든 연을 확 끊어버리는 것. 잡고 있는 정신 줄을 확 놓아 버리는 것. 아마도 돈키호테의 최후의 모습은 그런 것이 아닐까?
돈키호테는 틈틈이 지역의 역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도시사, 정치사, 문화사, 예술사 등등. 다른 주제이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족사가 국가사, 지역사와 연결되고 지방 문화예술사가 중앙의 그것과 연결되어 있다. 시간은 공간과, 그리고 사람과 연결되어 있었다. 과거 역사에 대한 공부는 무엇보다 현재를 이해하게 한다.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시공간의 레이어들이 하나 둘 만들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통해 사라진 것, 잃어버린 것, 잊고 있었던 것, 몰랐던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그때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돈키호테가 지역을 연구하는 것은 이런 묘미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뒤늦게 역사학자가 되려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학문의 영역으로서 탐색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역을 연구하는데 있어 기본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전략이란 기존의 역사를 꼼꼼히 읽어가되 그 빈칸, 역사의 공백, 빈틈을 무시무시한 예술의 상상력으로 채워 넣는 것이다. 예술의 상상력을 역사가들은 감당할 수 있을까? 특히 지방사는 여전히 공백이 많다. 지역의 문화예술사는 말하자면 입만 아프다. 튀는 침을 막아내자면 지역이 어떻게 버텨 왔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지역의 문화예술사를 제대로 알지도 도 못하면서 ‘예향’이니 ‘문화도시’니 ‘예술의 향기’를 논할 수 있을까?
순천도큐멘타 : 기록과 기억을 수집하는 한 형식
2019년 순천시 문화도시 특화지역사업 가운데 지역 아카이브 분야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나는 순천 예술사에 관한 기록을 찾는 작업이었고 또 하나는 시민들의 이야기(기억)를 수집-보관하는 작업이었다. 앞의 것은 기록물 조사를 통한 예술사 아카이브이고, 뒤의 것은 이야기 채록을 통한 지역의 생활사나 문화사의 아카이브이다. 조사, 수집된 아카이브들은 가능한 디지털데이터로 변환하여 저장하도록 한다. 이 저장소를 ‘순천이야기관’으로 이름하고 기획 전시를 열거나 출판 기록물로 다시 남기는 방식이다. 머릿속에만 있었던 지역 아카이브 구축을 실행하는 것이어서 착오가 없지 않지만, 체계가 잡히기까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지역 문화-예술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에 대한 지원이 아쉬웠던 참에 문화도시 사업이 그런 기회와 여건을 마련해 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재까지 순천 예술사 1차 아카이브 작업은 연극, 영화, 미술, 사진 분야를 대상으로 1900년부터 1945년까지의 관련 기록을 찾고 해제하는 작업으로 일단락되었고, ‘순천이야기관’ 작업은 참여자 개별 인터뷰, 집담과 좌담 등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를 수집하고 관련 자료와 함께 한 권의 책자로 정리하는 과정에 있다.
이런 지역 아카이브 작업을 ‘순천도큐멘타’로 명명했는데, 기록물을 전시의 형태로 제시하면서 강연이나 집담회, 좌담회 등의 구술 프로그램을 부대 프로그램이 아닌 중심 프로그램으로 배치한다. 이러한 전환으로 정적이었던 전시는 역동적으로 바뀔 수 있고, 기록보다는 구술-이야기의 힘, 대화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순천을 기록하자, 이야기하자”라는 모토로 출발한 순천도큐멘타는 지역민 스스로 기록하고 기억하는 행위의 주체가 된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작업이 몇 년 동안 지속되면 멋진 순천다움의 아카이브가 되지 않을까?
여전히 무엇이 ‘순천다운 것’인지 나는 모른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예술을 연구하고 있는 나에게 이 질문은 약간 당혹스러운 것이다. “바로 이것입니다!”라고 꼭 집어 답하기 어렵다. 어쩌면 현재의 즉답이 아니라 늦은 대답을 기대하는 질문은 아닐까?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모두의 답을 끌어내고 토론을 거쳐 검증을 하고 꼭 하나의 답을 얻어야 한다면, 숙의의 시간을 통해 다수의 동의를 얻는 방식으로 최선을 택하자는 것이 지금 나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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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훈
전남 순천에서 예술공간돈키호테를 공동운영하면서 문화예술 기획과 지역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그동안 순천에서 주민자치 마을만들기와 생활공동체 사업, 살고 싶은 도시만들기, 도시재생 선도사업에 참여했고, 2019년부터 문화도시 조성사업에 지역 아카이브 구축 파트에 참여하고 있다. 지역 사업에 참여하면서 문화예술의 방법론이나 지역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단순 자문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분석과 토론을 즐기는 성향에 호기심을 갖고 대체적으로 자문 요청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의 개념, 문화정책의 흐름, 정책과 현장 간의 쟁점 등에 관심이 많다. 느리게 배우고 뒤 늦게 깨닫는 경향이 있지만, 실시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실험이나 도전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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