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지를 벗어나지 않고 삶을 이어오고 있는 나에게 지역성은 곧 나의 정체성과 이어진다. 나의 생각과 시선이 지역을 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생각과 시선이 담지 못한 지역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하는 것, 익숙한 곳에서 낯선 새로움을 발견하고 삶의 또 다른 차원을 확장하는 것이 지역성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익숙해서 놓쳐버렸던 삶터의 기억과 모습을 문화예술을 통해 발견하는 것, 이 과정을 나와 이웃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금정문화재단에서 일하며 내가 할 수 있는, 하고 싶은 일이었다. 부산 금정구 주민인 내가 금정문화재단에서 근무하게 된 것은 결국 나의 삶터를 문화예술로 이해하고, 더 나은 장소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내가 하는 일들이 나와 내 가족, 이웃의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었고, 삶터와 일터의 일치로 인해 일로 만난 이들이 결국 삶터의 이웃이 될 수 있었다.
2년여 남짓한 금정문화재단 근무기간 동안 지역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들을 반추해보면 ‘관찰, 경청, 관계맺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그 이해의 과정이다.
관찰- 금정문화지표조사, 금정구민 문화향유실태조사
금정문화재단이 출범하면서 가장 먼저 한 사업은 ‘금정구 문화지표조사’였다. 도시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사업을 구상해야 한다는 기조 하에 출범 첫 해에는 문화지표조사, 이듬해에는 금정구민 문화향유실태조사를 수행했다. 나는 지표조사는 외부 연구원 신분으로, 문화향유실태조사는 재단 입사 후 담당 팀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지역의 인구구성, 산업구조부터 시작하여 지역의 문화자원 등을 다양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지표조사 내용에는 지역예술인 실태조사도 포함되어 있어 예술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지역의 변화요건 등을 수집하였다. 그들의 다양한 의견들만 정리해도 재단 사업에 대한 그림이 그려졌다.
이듬해 실시된 문화향유실태조사를 통해 금정구 안에서도 동네마다 어떤 문화적 격차가 있는지, 세대별로 문화에 대한 인식 차이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일례로 금정구에서는 2011년부터 서동지역에 예술창작공간을 만들고, 시장사업과 문화행사들을 집중적으로 투입했지만 특별한 가시적 성과는 찾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문화향유실태조사에서 서동지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여가활동 중 문화예술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예술 활동에 대한 관심도가 가장 높은 결과가 나와, 그동안의 투입이 결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는 아니었다는 결론을 낼 수 있었다.
경청– 금정문화플랜, 금정구민 커뮤니티 간담회, 금정의 100가지 표정
지표조사와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출범 2년차인 2018년에는 금정구 중기 문화발전계획인 금정문화플랜을 수립하였다. 금정문화플랜을 준비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고민했던 부분은 구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작업이었다. 처음에는 구민들을 모으는 타운홀 미팅 등의 임팩트 있는 방식을 고민했다. 그러나 그냥 괴나리봇짐지고 직접 재단이 만나러 가는 것이 효율적이지 않겠느냐는 자문위원들의 의견에 따라 무모하지만 나와 우리 팀 동료가 힘듦의 독박을 쓰는 커뮤니티 간담회를 추진했다. 총 15차례의 간담회 과정에서 120명의 구민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청소년부터 어르신까지, 공무원부터 예술가까지, 마을공동체부터 예술동아리 회원까지, 동네별로 다양한 커뮤니티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금정구의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당신의 빛나는 문화생활을 위해 금정구가 뭘 해야 하는 지를 직접 물어보았다.
자신에게 문화라는 존재를 설명하면서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나를 빛나게 해주는 ‘장신구’, 건조해진 어느 순간 절실히 필요함을 느끼는 ‘가습기’와 같은 주옥같은 비유를 들을 수 있었다. 지역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문화가 없다는 마음 넓은 청년의 걱정을 듣기도 하였고, 공공PC방을 만들어달라는 청소년다운 요구를 듣기도 했다. 몇 가지 갈래로 수렴되는 주민들의 요구는 직설적이었고, 단순했다. 집 가까이에서 일상적으로 문화예술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 기초문화재단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기초단위의 문화계획에서 무엇을 우선순위로 담아야 하는지 힘이 실리는 순간이었다.
이제 금정이라는 지역의 이야기를 찾고 싶었다. 금정산, 금샘, 범어사가 금정의 상징이라는데 과연 주민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지 궁금했다. 일부 전문가의 시선이 아닌 주민의 기억에 담긴 금정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개인의 기억들이 모여 곧 지역의 기억이 되고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정의 100가지 표정’이라는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금정구민 100명이 참여한 인터뷰 영상을 만들면서 ‘당신에게 금정구란? 금정구하면 떠오르는 것? 금정구에서 행복했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이 세 가지 질문을 던졌다. 아이부터 노인까지, 토박이 주민, 이주민, 외국인 등 금정과 연결된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의 기억과 연결된 금정구는 보석 같은 친밀한 장소들을 더 많이 품고 있었고, 더 복잡한 층층의 기억이 쌓여있었다. 금정구라는 행정구역이 구민의 삶의 등장주체이자 연결의 ‘장소’가 되었다.
관계맺음– 금정문화오지라퍼, 금정구 문화공간네트워크
지역을 관찰하고, 지역민의 이야기를 경청한 후 다음 단계는 지역의 주체들과 관계맺음이었다. 예술가들과의 관계맺음의 시작은 권역별 예술가모임이었다. 금정구는 부산에서 유일하게 종합예술대학이 위치하고 있어 타 지역에 비해 예술가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처음엔 생활권 내에서 같은 일을 하는 예술가들 간 연결고리를 맺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임은 이후 지역사회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한 ‘금정문화오지라퍼’ 네트워크로 전환되었다. 지역과 적극적인 연결고리를 맺고 싶은 이들을 연결하는 것이 더 공고한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네트워크는 ‘문화가있는날’ 사업에 워킹그룹으로 참여하면서, 함께 합을 맞춰보는 기회를 가졌다.
두 번째 관계맺음은 갤러리, 동네서점, 공방 등의 작은 문화공간 운영자들의 네트워크였다. 생활권 내에서 문화예술을 즐기고 싶다는 구민의 욕구를 실현하고, 지역 문화예술 분야 소상공인들에겐 단골고객을 만들어주는 것, 구민과 공간이 이어지면서 서로가 이웃이 되는 것이 네트워크의 목표였다. 처음엔 저의가 불분명하다는 공간 운영자들의 의심과, 자영업자들을 문화재단이 왜 도와줘야 하는지에 대한 공무원의 의문을 한 몸에 받았다. 갤러리 까페, 공방, 동네책방, 엔티크숍까지 지역의 문화 공간 운영자들이 모여 인사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마켓과 공간투어 등 공동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다. 처음 시도해보는 네트워크에다가 서로의 공통된 관심사도 부족하고, 의견과 감정의 조율과정이 지난했지만, 1년의 과정을 버티고 송년회도 함께 하는 관계로 성장하였다.
이미 알고 있다는 편견을 넘어
지역에 대한 관찰과 경청의 과정이 없었다면 무차별적으로 투입되는 문화행사들은 흘러넘치는 기름처럼 주민들의 삶에 제대로 스며들기 힘들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삶의 형태적 전형성에 갇혀 지역에 대한 탐색과정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금정에서 행해진 관찰, 경청, 관계맺음의 활동은 금정의 속살을 발견하고 이해하는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재단에 근무하면서 금정구에서 20여 년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동네를 가본 경험은 내가 사는 지역의 다양한 삶의 겹겹들을 그동안 제대로 보지 못했다라는 반성을 불러일으켰다.
출범 3년차를 맞이하고 있는 금정문화재단이 초창기부터 지역을 탐색하는 작업을 수행한 것은 잘한 선택인 것 같다. 예상결과가 보이지 않는 사업에 용기 있게 뛰어 들어간 재단의 동료들의 의지와, 단기적 성과에 급급하지 않도록 기다려준 출범 당시의 구청장, 구의원을 비롯한 지역사회의 지지가 아니었다면 이런 액션플랜은 시행되지 못했을 것이다. 지역을 충분히 탐색하기엔 3년이라는 기간도 부족하지만, 지역을 이해하려는 자세에 따라 기초문화재단의 성장 곡선은 달라질 수 있다.
지역에 대한 정보는 다양한 경로로 수집가능하다. 인구 구성부터 자원, 시설 등 다양한 통계수치는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정보들은 금정을 1차적으로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보들이 현재 금정의 상황으로 발현된 내막은 주민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정을 듣고, 그들과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깊이 이해할 수 있다. 그 내막이 남들과 다르지 않고 특별하지 않더라도 지역의 사정을 이해한 시선은 따뜻하고 특별하다. 이 과정에서 문화예술은 지역의 속살과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우 적절한 존재이다.
이제 광역단위에서 일하게 되면서, 손을 잡고 얼굴을 맞대며 지역을 관찰하고 경청하고 관계 맺었던 공간과 차원이 확장되었다. 지역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광역을 이해하는데 어떠한 모드 전환이 필요한 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문화예술을 통한 관찰, 경청, 관계맺음이 부산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위한 기본 모드인 것은 분명하다. 관찰, 경청, 관계맺음으로 이웃을 만나고, 타자화된 행정구역이 아닌 삶이 연결된 장소로서의 부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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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향미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 연구원. 문화정책을 글로 먼저 배웠다. 부산대 예술문화영상학과에서 출범 당시부터 12년 동안 조교로 근무했다. 부산민예총 정책위원장을 거쳐, 부산 최초의 기초문화재단인 금정문화재단에서 글로벌팀장이라는 기초문화재단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직함을 달고 현장에서 문화정책을 배웠다. 재단에서 해볼 수 있는 각종 조사와 문화계획 등을 수립한 것이 큰 배움이 되었고, 2019년 9월 출범한 부산문화재단 정책연구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늘 새롭게 시작하는 조직에서 일하다 보니 새 조직에서 새 기준을 만들어가는 것을 운명이라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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