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문화의 힘’. 이런 말을 처음 접한 지 10년이 훌쩍 지났다. 그 당시 그 말이 적힌 회색 티셔츠를 받아 입고 만났던 분에게 2019년 다시 지역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사실 나는 소위 지역성이라는 것이 가장 희미하다고 소문이 난 대전에 살고 있다. 지역성이 희미하다면, 도대체 지역성이 무엇이기에 난 그것을 희미하다고 생각했을까?
가볍게 생각해보면, 그 지역만이 가진 특성을 지역성이라 할 것이다. 기차역이나 터미널에 내렸을 때, 내가 사는 곳과 다른 기분을 주는 곳. 우선 옆에서 들리는 그곳만의 사투리, 오랜 전통이나 역사를 가진 곳을 지역성이 뚜렷하다고 볼 것이다. 최근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작은 나라 한국은 더 가까워졌고 지역성에 대한 구분이 점점 희미해지고 좋은 건 함께하려는 성질(?)과 변화의 속도가 빠른 덕에 많은 지역들이 ‘복붙’을 거듭해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현실이다. 현재 한국의 시민들은 지역성에 대한 생각이 이전과 많이 다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전은 교통의 요지로 근대도시이며 과학의 도시이다. 이는 쉽게 볼 수 있는 대전을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이렇게 쓰이고 아래와 같이 읽히기도 한다. 대전은 스쳐지나갈 수 있으며, 1900년대 이전의 역사가 없는 (빵 먹고 잼 없는 도시이다. 아, 살기는 좋은) 도시이다. 언제부터인가 지역들이 관광지화 되면서 지역의 특징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는데, 관광도시가 아닌 대전도 무언가 만들어 내야했는지 유수의 관광도시 아래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분명히 사람들이 이 지역을 토대로 삶을 영위하고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는데도 자꾸만 무엇이 없다고만 한다. 문화영역에서 활동하는 나는 이 상황이 늘 갸우뚱하다. 대전에서 30년 가까이 살며 지역을 발견하는 과정을 공유하며 지역성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한다.
도시, 동네, 공간
2010년 이전 대전은 그냥 내가 사는 동네였다. 학교 다니고 친구와 놀고 복작복작 살아가는. 우연치 않게 친구의 소개로 ‘대흥동립만세’ 축제를 알게 되었다. ‘대흥동립만세’는 2008년부터 대흥동에서 활동하는 미술, 연극, 음악 등에 종사하고 있는 예술인들이 8월 넷째 주에 자신이 하고자하는 행위를 마음껏 펼치는 축제이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기존의 축제들은 지원을 받아 위에서 아래로의 흐름을 가져왔다면 ‘대흥동립만세’는 대흥동에서 독립적으로 자체 발생을 추구하는 축제였다. 거리에서 라면을 끓여도, ‘대흥동립만세’ 팻말을 걸고 한다면 그것 또한 축제라 했다. 그래서 나 같은 활동가도 쉽게 합류할 수 있었고 ‘대흥동립만세’를 통해 대전의 매력을 단기간에 접할 수 있었다. 기존엔 그냥 술집이었고 카페였고 거리였던 곳이 예술행위 즉 공연이나 전시, 사람으로 인해 문화공간으로 180도 바뀌는 마법 같은 시간이었다.
대전 대흥동은 음악, 미술, 연극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 있는 동네이다. 한곳에 다양한 장르가 모여 있는 이점이 있는 지역으로의 재발견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책이나 이론에서 배운 지역이 아닌, 살면서 알아가는 지역. 대전의 삶들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는 장소인 원도심에서 공간과 사람을 만나며 발견하는 ‘지역성’이었다.
‘대흥동립만세’로 이어진 사람들과 낡고 오래된 공간을 발견해 ‘산호여인숙’이 시작됐다. 1970년대 지어진 여인숙을 숙박기능을 가진 문화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산호여인숙(2011-2016)’을 통해 대전의 젊은 세대들과 대흥동이 연결됐고 대전과 대흥동의 특징을 기반으로 여러 활동들이 탄생했다. 그 후로 이어진 공간들, ‘대동작은집’1), ‘구석으로부터’2) 또한 낡은 공간을 본연의 모습을 기반으로 문화공간화 시키는 작업을 이어 진행하고 있다. 나에게 지역은 도시(대전)이며, 동네(대흥동, 정동)이며, 공간(산호여인숙, 대동작은집, 구석으로부터)이었다.
“대전의 수많은 공간 중에 조금은 불명확하고, 느슨하며, 완벽하지 않고, 조금씩은 변화되는 그런 공간이 하나 정도는 있어도 되지 않겠습니까.”(‘구석으로부터를 열며’, 송부영)
‘구석으로부터’를 운영하는 우리는 활동 반경이 좁고 각자의 속도를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산책과 만남을 통해 공간을 발견하고, 공간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고자 한다. 주변인들과의 연결을 통해 관찰된 지점을 발현하고 표현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진행한 프로젝트들 몇 가지를 나열해본다.
두 도시의 탐색 : 신도시와 구도시는 한국 어느 지역이나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거의 모든 시간을 구도심 지역에서 보내다 가끔 일이 있어 신도시 지역에 간다. 서로 옷차림도 삶의 모습도 많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관찰하고 연극과 무용, 전시로 풀어내는 작업이었다. 다름을 알아가는 것으로 지역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이잇다 : ‘대전은 철도로 시작한 도시이다’를 근간으로 음악, 영화, 연극, 전시, 기차여행으로 구성해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철도라는 콘텐츠로 예술 또는 문화행위가 어디까지 가능할지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는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합심을 했다. 대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발견을 통해 지역성을 발견하고 기획자와 예술가들이 발현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그간 쌓인 삶과 문화를 찾아내고 지금 모여 있는 사람들의 방식으로 풀어내어 지역을 재발견하는 것으로 의미가 있었다.
정동 A4숲 프로젝트 : 원도심 지역은 신도심과 달리 계획에 의해 구획되지 않아 녹지가 많이 부족하다. 현재 ‘구석으로부터’가 위치한 정동은 인쇄거리이며 한약거리, 건어물거리가 함께 있는 곳이다. 대전이 갖고 있는 다양함의 밀집성을 다시 한 번 볼 수 있는 장소다. 이곳에 작은 녹지와 공원이 생기길 바라는 뜻을 품고 A4 종이 사이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짓는 도시재생에 대해 녹지로의 변모를 제안한다.
문화는 이벤트가 아니야
비록 프로젝트식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역에서의 삶은 이어지고 있다. 관계도 이어진다. 너무 가까워서 그리고 비슷해서 갈등도 생기고 서운함도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자연스레 존재하는 것들이 행정과 정책사업으로 줄 세워지면서 어색한 인위성을 갖는다. 흥미가 떨어지는 지점이다. 오랜 시간을 두고 실험하는 긴 호흡이 너무나도 필요하다.
도시재생, 뉴딜 등등으로 지역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하고 있다. 어마어마한 예산이 투입되어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길 바라지만 꼭 그렇게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선진사례라는 이름 아래 모든 지역이 비슷한 모습으로 재생산되고 있다. 자기 속도대로 살아가는 것은 왠지 뒤처지는 것으로 느껴지고, 지역의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소모되고 소비되고 만다.
지역은 분권이라는 이름으로 만인의 경쟁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전국을 줄 세우지 않고 제 모습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공간을, 여유를 서로 갖게 도와주는 정책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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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4년 오픈. 텍스트가 머무는 공간을 표방하며 1층은 글작업을 하는 작가의 레지던시 공간, 2층은100인에게 후원받은 책을 공유하는 똑똑도서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2020년에 마무리 될 예정이다.
2‘무엇이 됐든 그것이 발견 될 것 같은 장소’를 표방하고 있는 공간 ‘구석으로부터’는 미국 오순절 교회 소속의 선교사인 E. Coote 부인 기념관으로 1966년에 지어진 건물이다. 1992년까지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개인에게 매각되어 창고로 사용되어 오다가 2016년 문화공간으로 변모하였다. 다원예술을 기반으로 미술, 연극, 무용, 음악 등 장르의 경계없이 무엇이 됐든 그것을 실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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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덕
대전에서 환경단체, 여성단체, 문화예술단체 활동가로, 극단에서 기획자로 일했다. 그리고 대전의 원도심이자 문화예술 중심지인 대흥동에서 지역 예술가와 기획자들이 함께 만든 동네 축제 대흥동립만세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거기서 만난 공공미술가 송부영과 원도심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여인숙을 문화예술공간으로 되살리는 작업에 뛰어들어, 숙박업 및 전시공간 운영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실험했다. 현재는 대흥동을 떠나, 정동 인쇄 거리 한 편에 숨어있던 옛 교회 건물을 되살린 복합문화공간 ‘구석으로부터’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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