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직권남용죄와 헌법적 국가범죄 사이에서

CP_NET 2020. 2. 3. 08:46

2020년 1월 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징역 4년을,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대법원 2020. 1. 30. 2018도2236.) 대법원의 주요 관심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죄)의 판단 기준이었다. 형법 제123조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는 5년 이하의 징역,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상급자의 직권남용 행위’와 ‘하급자의 의무 없는 일 수행’은 별개의 구성요건이므로, 두 요건 모두 충족할 때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특히 하급자의 ‘의무 없는 일’에 대해 엄격한 판단 기준을 제시하며, ‘공무원이 상급자로부터 직권남용 지시를 받았더라도 하급자의 업무가 관련 법령 등에 따라 문제가 없다면 직권남용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먼저 ① 대법원은 김 전 실장 등 피고인들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배제를 지시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해 대통령,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 교문수석, 문체부 장관 등의 직권을 남용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② 대법원은 항소심에서 직권남용죄로 인정한 ‘이미 작성된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행위를 하게 한 것’은 직권남용죄의 구성요건인 의무 없는 일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고 필요한 심리를 다하지 않아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며 다시 심리하라고 주문했다. 한편 ③ 대법원은 이번 사건에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은 각각 다른 기관이고 연도별 사업도 다르므로 원심이 인정한 포괄일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또한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이 퇴임한 이후에는 ‘직권’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퇴임 후의 범행에 관하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며 포괄일죄와 공동정범에 대한 부분도 다시 따져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④ 사람들이 이번 판결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직권남용죄 해석이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건은 물론 문재인정부 청와대의 감찰 무마·선거 개입 의혹 사건 등 직권남용죄가 핵심 쟁점인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대법원의 헌법적 직무유기 판단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는 블랙리스트 사건을, ‘입헌민주주의 침해’ ‘민주적 기본질서의 부정’ ‘정책을 가장한 국가범죄’로 규정했다(백서 3, 2019: 45-52). 한마디로 헌법적 국가범죄다. 아울러 ‘미진한 진상규명’을 지적했다(백서 3, 2019: 160). 진상규명이 미진한 것은 ①의 ‘공모’를 제대로 조사 또는 수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초 예술․표현․사상의 자유에 대한 대규모 인권 침해 사건으로서 헌법의 본질을 부정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국가기관 간 공모를 중심에 놓는 ‘헌법적 접근’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 대법원은 ②에 집중했고 ③과 같은 오류를 범했으며, 사람들은 ④와 같은 오해를 한 것이다. 특별재판부의 설치와 같은 접근방법을 모색하거나 법적 책임 외에 정치적 책임의 문제 등을 함께 논의했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결과로서 ‘국가’의 범죄가 아니라 ‘국가기관’ 또는 ‘공공기관’의 ‘형법상 직권남용죄’ 문제로 ‘축소’된 것이다.

 

헌법 제103조에 따르면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해야 하는데, 대법원이 이번 재판에서 헌법을 제대로 고려했는지 의문이다. 국가권력에 대해 국민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한 형법은 공직자의 범죄를 추궁하기에 미약함이 드러났다. 대법원은 ①을 명확히 하고, ②와 ③에서 ‘행정’과 공무원의 포괄적인 헌법적 책임을 규명했어야 한다. 설령 하급자라고 하더라도 헌법 제7조제1항에 따라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로서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이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는 까닭이다(헌법 제7조제2항). 헌법 제106조제1항에 따라 법관에게는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 없이는 파면되지 않게, 즉 징계에 의해서는 파면이나 해임되지 않게 신분을 보장하는 이유는 국민을 위한 헌법적 판단을 그 핵심 의무로 상정하기 때문이다.

 

특검이 헌법적 책임의 법리를 제대로 전개하지 못하고 하급심에서 그 법리를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바로잡는 것이 대법원이 해야 할 구실이다. 이러한 법리를 발견하고 지켜내야 하는 것이야말로 대법원의 책임이다. 정책법원을 지향하는 대법원이 오히려 ‘권력을 위한 법실증주의’에 빠져버렸다. 입헌민주주의를 파괴한 국가폭력에 맞서야 할 위상은 대법원의 몫이 아니었던가. 헌법 제103조는 양승태대법원의 직권남용이 헌법적 국가범죄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재판은 대법원장의 교체가 다는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적폐청산’도 대통령의 교체가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주권자의 판결

 

국가체제 또는 헌법체제를 다시 세우기 위한 헌법적 과제는 끝난 것이 아니다. 대통령을 통해 법원을 통해 해소할 수 없는 일이다. 법원의 판결을 비판하되 일희일비할 일이 아니다. 국민은 제도에 의해 규율되지만, 바로 그 제도 자체를 교체하거나 형성할 수 있는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권력 범죄를 처리하는 현존 법률체계와 사법체제는 ‘유권무죄 무권유죄’를 확인할 뿐 헌법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과 동떨어져 있음을 실증했다. 주권자 국민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헌법적 국가범죄라고 이미 ‘선고’했다. 문제는 그것의 실행방법과 수단이다. 헌법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체제와 헌법 체제 개혁은 이제 시작이다. 민주시민들의 헌법적 재판은 법원의 재판보다 먼저 별도로 시작해서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이번 재판 결과를 통해 피고 대법원이 헌법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2019).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백서 3: 블랙리스트 방지를 위한 제도개선 종합보고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2019. 2.

법률신문 2020. 1. 30.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 대법원, 직권남용죄 판단기준 제시”, <https:// www.lawtimes.co.kr/Case-Curation/view?serial=159129>, 검색일: 2020. 2. 2.

 

 

------

오동석

아주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헌법을 강의하고 있다. 지구 안에서 생태와 평화 그리고 정의, 연방제도, 아동 인권과 사상․표현의 자유, 교육제도와 군사제도 등을 중심으로 헌법 체제의 혁신 동학에 관심이 있다. 민주시민과 함께 하는 헌법 공부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