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인가부터 유행처럼 쓰이는 도시에 문화를 입힌다는 표현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변주로 쓰인다. 어느 지역에서는 “도시 재생에 문화의 옷을 입힌다”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있고 또 다른 지역에서는 “천년의 도시에 문화예술의 옷을 입힌다”(경주는 아니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겠는데 사실 따지고 들어가면 말이 안 되는 소리인 동시에, 관점에 따라서는 매우 불편한 표현이기도 하다.
우선 문화라는 개념을 다루는 방식에서 보이는 부정확함이다. 문화의 옷을 입히건, 문화예술을 입히건, “문화를 입힌다”는 표현은, 본래 문화가 부재하던 어떤 장소나 공간을 상정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란 것은 학문적으로 따지고들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이 있으면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이다는 이해는 이제 상식이다. 그 문화가 어떤 것이냐에 대한 고민이 뒤따를 수는 있지만 여하간 문화는 언제, 어디에나 나름의 방식으로 존재하고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해가고 있다. 따라서 문화가 부재한 자리를 상정하고 거기에 문화를 입히거나, 채우겠다는 발상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런 수사적 명제가 갖고 있는 진의를 모른 척하고 사소하게 말꼬리를 잡는 시비로 보일 수 있다. 아니 그런 혐의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하고 수사적인 부분에 시비를 거는 까닭이 있다. 이런 표현의 저변에 깔려있는 문화를 기능적 도구로 사고하는 시각의 문제점이다. 문화가 인간의 일상에서 생성되지만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거나 다양한 측면에서 의미를 생성하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동체를 규범화하고 활성화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지난한 과정을 통한 총체적 삶의 양식 간의 상호작용 속에서 파생적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즉각적으로 투입되어 산출되는 기능적 활동의 결과물이 아니다.
문화활동의 규격화와 왜곡
문화에 대한 기능적 접근은 자칫 도시에서의 문화 활동을 규격화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각종 도시재생 사업에서는 특히 이런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 도시재생의 대상이 되는 곳이 구도심을 포함한 도시의 ‘낙후’ 지역이기 때문이다. 도시가 변화하게 되면 과거에 기능이 활성화 되었던 곳 중에서 그 기능을 상실하거나 위축되는 장소들이 발생하게 되고 이런 곳들을 흔히 구도심이나 낙후지역이라고 부른다. 이런 곳들을 한 두가지 특징으로 포괄해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급격히 변화한 산업구조를 따라잡지 못하고 과거 양식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생산지의 측면에서 보자면 전통적인 2차산업의 작업장들이 밀집된 지역이고, 주거지역으로 치자면 노후화된 단독주택, 다세대주택 단지이며, 상업지역으로 치자면 전통시장이라고 불리는 대형쇼핑몰 이전의 상설시장 지역이 있다. 이제는 군부대가 떠나간 군사지역도 이런 특징을 갖는다. 이런 곳들은 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자원 투입에서 소외되기 때문에 자칫 슬럼화 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표면적으로 황폐해 보이면서 여기에 문화를 채운다면 어떤 변화가 이뤄질 것인가에 대해 낙관적 상상을 하게 만드는 측면이 분명히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외면적 풍광 너머에는 쉽게 재단할 수 없는 개별적 일상들이 있다는 자칫 망각하게 하는 착시가 존재하기도 한다. 여기서 심각하게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삶이 있는 그곳에 문화가 부재한가? 그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미 떠나간 곳이라면 거기 문화를 채워 넣는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다소 관념적인 접근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경험을 놓고 얘기해보자. 2010년대 초반, 지금은 종료된 문화를 통해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문화부에서 추진했던 “문전성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적이 있다. 문화부에서 추진했던 이 사업은 대형쇼핑몰에 의해 경쟁력이 떨어져 침체되고 있던 전통시장에 문화 프로그램을 집어넣어서 활성화를 꾀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시장의 자치조직과 해당 지자체, 그리고 프로그램을 직접 수행할 문화예술기획집단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사업을 신청하면 문화부의 국비와 지자체의 지방비가 매칭 되어었다. 재정지원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컨설팅단을 문화부에서 구성하여 내용적인 지원도 함께 하며 홍보나 네트워킹 같은 지원도 꽤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우리 단체(사회적기업)가 그 사업에 참여하게 된 것은 모 지자체의 요청과 우리 단체의 이해관계가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지자체는 우리 단체가 문화 관련 인프라가 부족한 해당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활성화해주길 원했고 단체 입장에서는 특정 지역과 지속적으로 네트워크를 가져가며 내실 있는 문화기획활동을 하기 원했다. 시장을 매개로 한 문전성시 사업은 그런 측면에서 지역에서 문화활동의 지속성을 갖기 위한 접근의 시작이면서 당장 필요한 공공활동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여겼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우선 준비 시간의 부족이었다. 단체가 지역으로 들어가기로 결정된 시기와 문전성시 사업의 공모 지원 과정이 거의 동시에 겹치면서 준비를 위한 시간적 여유가 매우 부족했다. 시장 상인조합과의 사전 미팅을 몇 차례 가졌지만 서로 충분한 이해를 형성하기엔 시간이 매우 부족했다. 지역이 갖고 있는 문화적 정체성이나 수요를 파악하는데는 시간이 더욱 부족했다. 몇 차례 사업지를 돌아보고 주요 관계자 인터뷰를 포함한 기본적 리서치, 다른 유사 사업에서의 주요프로그램들에 대한 검토를 기초로 사업을 기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총 3년차 사업의 첫 해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사업을 진행하는 동시에 수정하기 시작해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업이 시작된 초기, 몇 차례 시도를 하며 우리가 준비한 문화기획이 현장의 일상적 시공간에서 겉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밖에 없었다. 내용이나 형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부족하나마 원하는 프로그램도 조사했고, 원하는 장소나 시간, 변화하고 가꿔질 문화시장의 상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어디까지나 거기에 근거하여 짜여진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오류는 우리들 역시 현장을 대상화하여 사고했다는 것이다. 시장(혹은 지역)에는 문화가 없다, 아니면 시장에는 문화가 있더라도 저급하고 공동체성과는 거리가 멀다, 시장의 문화를 참신한 기획적 아이디어의 주도를 통해 변화시켜야 한다는 식의 관념이 우리 안에도 암암리에 존재했던 것이다. 그러나 시장이란 공간은, 상인과 주민들이란 주체들은 그렇게 외재적으로 주어지는 프로그램이 아무리 세려되고 재미있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런저런 공공 기획과 프로그램을 숱하게 경험했던 주민들에게 그런 것들은 일상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쳐가는, 지속되지 않고 결국 사라지는 이벤트에 불과했다. 의도적으로 이벤트로 만들었기 때문에 이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과적으로 일상을 변화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벤트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지역의 일상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한 탐색적 리서치 기능을 좀 더 강화하는 쪽으로 사업의 방향을 선회했다. 설문조사 같은 표피적인 기호조사에서 벗어나 작가들의 주도로 지역의 현재와 과거를 잇는 문화적 맥락을 탐사했다. 그것이 “락희럭키구로공단”이라고 명명된 금천 지역 문화사 연구의 시작이었다. (당시 활동의 기록들은 일종의 자료집을 겸한 연구백서인 <구로공단 19662013 - 이주, 생산, 노동 그리고 꿈>으로 출판되었다. 관련된 활동의 흔적과 자료 일부는 페이스북 그룹 '락키럭키구로공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활동은 해당 사업에서 메인 프로그램이 될 수는 없었고 다소 주변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꽤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후에 다시 집중적으로 다뤄볼 예정이다.) 반면에 이런 과정을 거쳐서 3년 넘게 시장에서 진행되었던 사업에 대해서는 유의미한 성과를 이야기하기 난감하다. 다소 냉정하게 평가했을 때 문화부의 매뉴얼에 충실하게 따라가듯 진행했던 문전성시 사업이 남긴 시장의 변화가 뭐가 있었을까? 자문자답하듯 물어보지만 진짜 시장을 문화적으로 변화시켰다고 자신 있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정치를 배제한 문화도시는 가능한가
단지 특정 시장에서 진행된 특정 사업의 문제가 아니다. 극히 일부에 해당하는 관광형 시장으로의 성공을 제외하고는 사업의 흔적만 여기저기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당시 드나들었던 시장사업 관련된 온라인 커뮤니티 공간들을 돌아다녀보면 2014년을 전후하여 대부분 업데이트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중기청 등 새로운 지원 주체가 제시한 또 다른 사업 매뉴얼에 따라 사업의 포맷을 변화시켰거나 종료되었다. 물론 깨끗하게 디자인된 간판이 남았다는 점에서 아주 무의미하진 않겠지만 문화시장이란 이름을 쓰긴 상당히 민망한 측면이 있다. 무엇보다 문화시장 사업을 통해 시장의 매출이 상승했거나 자생력이 더 높아졌다는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사업 설계가 잘못된 탓이 아니라 전제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이라는 근대적 상거래의 매커니즘의 혁신이 한 두가지 문화예술 이벤트로 변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게다가 거기서 시장을 구성하는 문화적 성격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더욱 요원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3년의 시간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으며 특히 일상의 여러 층위에 잠복해있는 문화적 맥락을 제대로 건드릴 수도 없다.
현재 진행되기 시작한 다양한 장소에서의 문화도시 사업들은 물론 이전보다 훨씬 진화한 매뉴얼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포맷이나 관점이 달라진 것은 없다. 짧은 시간 동안 지역에서 문화주체를 발굴하고 이들을 협업구조로 엮어내길 요구한다. 혹은 지역에서 전통적이라고 여겨지는 문화요소를 이들을 통해 발굴하여 외부에 전시할 수 있는 사업적 수행구조를 만들어내길 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계속 간과되는 것은 그것이 지역민의 일상과 어떤 긴밀성을 갖고 있는가의 문제다. 이벤트가 지나간 자리에 간판만 남았던 문화시장 사업의 기억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 지역에서의 문화주체의 형성과 문화공동체의 구성을 전제하고 있지만 그것이 몇몇 헤비스피커 집단의 집담회, 워크숍 같은 형식적 프로세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지난 도시재생 사업에서 반복되었던 문제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외면할 수 없는 진실과 마주치게 되는데 문화를 통한 지역재생 사업도 결국은 자원배분의 문제로부터 한 치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시장 사업의 예를 들자면 시장은 다양한 상인과 주민으로 구성되어있지만 관계가 수평적이지 않았다. 점포를 포함한 건물과 토지를 소유한 상인과 임대로 영업하는 상인, 조합에 가입된 상인과 비조합원인 노점상, 지역토박이와 조선족, 남성과 여성, 중장년층과 청년 그룹. 시장의 문화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고 협업의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이들 사이의 불평등과 위계적 구조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이었다. 문화도시, 혹은 문화적 도시 재생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벤트를 넘어서는 문화도시의 상상은 자칫 불편할 수 있는 일상에서의 ‘정치’를 배제시키고는 불가능하다. 이게 단지 감당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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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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