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기획연재_ 도시와 문화정책⑦]도시재생의 딜레마(3) - 경제에 포획된 도시, 도시정책, 문화도시

CP_NET 2019. 12. 30. 22:50

미셀 드 세르토의 유명한 글 도시 속에서 걷기는 하필이면 이제 9.11테러로 인해 더 이상 볼 수 없어져버린, 그 유명했던 오리지널세계무역센터 110층에서 시작한다. 이건 단지 우연에 불과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기가 막힐 정도로 절묘하고 지독한 은유다. 1970년대 개장된 세계무역센터는 근대의 위용과 승리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뉴욕 맨해튼은 세계 자본주의의 심장부였고 이곳에 우뚝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400미터가 넘는 마천루는 그 자체가 자본주의 근대의 승리를 상징하는 바벨탑이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세계의 정상, 세르토는 그 건물 정상인 110층에서 내려다보는 맨해튼의 묘사를 통해 도시라는 인간 사회를 텍스트들을 전체화(totalizing)하는 쾌락에 대한 고찰을 보여준다. 그는 그것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인 특유의 화려한 수사적 표현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게 만드는 요소도 있는데 정작 세르토의 분석은 마천루가 아래를 내려다보게 함으로써 개별적 특성이 사라지는 도시 사람들의 모습들을 통해 그런 개체화가 얼마나 폭력적이며 권력적 시선인지를 보여준다. 그는 멀리서 "훔쳐보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마천루 위에 있는 자에 의하여 깨알 같은 텍스트처럼 보여지는, 그래서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텍스트성에 종속되어버리는 것의 무망함과 위계적 구조의 문제를 보여주려고 한다. 마천루 위에서 보여진 도시는 지배자들의 시선에 보여진 도시일 뿐이다. 마천루가 무너졌을 때의 충격은 그래서 더욱 엄청났던 것이다. 영원할 것 같던 바벨탑은 허물어졌고 물론 그 자리를 새로운 마천루(현재의 신 세계무역센터)로 복구했지만 그전에 지당한 듯 존재하던 마천루의 영속성은 이미 무너졌다. 자본주의적 근대 승리의 완전무결함은 파괴되었고 우리는 황혼녘 근대의 폐허 위에 서 있는 신기루에 대하여 더 이상 경탄하지 않는다.

 

 

낡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며 비합리적이어서 쇠퇴한 것이 아니다

 

과하게, 허무맹랑하게, 마천루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문화적 도시에 대한 상상을 어디서 출발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꺼내놓기 위함이다. 앞선 두 번의 글에서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은 행정이나 자본, 바꿔 말해 통치와 생산 중심의 경제의 논리 회로 안에서 지금의 도시를 변화시키거나 본질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었다. 경제적 합리성이라는 망령, 얼핏 가치중립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중립적이지 않은 자본 증식의 성장논리는 자본주의적 근대의 실체적 현현이라 할 수 있는 근대 도시의 폭발적 확장의 진원지였다. 자본주의와 근대 도시는 멈춤 없는 성장, 자원의 불평등한 축적과 배분, 내부식민지의 지속적 재생산을 통한 착취구조 유지와 같은 상동성의 자장 안에서 움직여왔다. 또한 자본주의 시스템과 도시는 서로 간에도 매우 유기적으로 상호작용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는 끝없는 확장과정에서 모순을 잉태하고 축적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척 하면서 실상은 모순을 더 크게 확장시키거나 이전시키는 과정을 멈춤 없이 반복해오고 있다.

 

이에 대해 맑스주의를 이데올로기로 해석했던 입장에서는 근대 산업도시를 자본주의 모순축적의 장으로 인식했으며 계급투쟁이 발생하고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실현될 장으로 보았다. 그런 주장의 논리적 정합성을 따지는 것은 이제 별 무소용한 일이 되어버렸다. 도시가 자본의 모순이 축적되고 한편 확장되는 공간인 것은 분명하고 계급 간의 대립이 일어났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계급해방의 요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결국, 혹은 아직까진 벌어지지 않았다. 확실히 그것을 봉합하는 유무형의 힘은 강력하게 작동해왔다. 그리고 이런 갈등에서 유래되는 파국을 해결해온 근대의 힘에 대하여, 도시의 경우에는 도시계획의 합리성과 이를 통한 자원배분의 효율성, 의사결정의 공정성과 같은 근대 가치의 실현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만세를 불렀고 축배를 들었다. 상징적으로 얘기해서 마천루가 무너져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정작 도시의 거리는 엄청난 에너지가 편리함을 위해 낭비되고, 쓰레기는 도시 외각에 마구잡이로 버려지고,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인종에 대한 혐오와 적대감은 폭발적으로 커져가고 있는 동안에도 말이다. 전체화하여 도시를 내려다보는 자본권력자, 계획가, 행정가들은 정작 그 미시적 점들 하나하나가 품고 있는 화약과 뇌관의 폭발성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공격과 파괴가 불러온 심리적 충격은 매우 컸다. 안전하고 완결무결한 현대 도시의 얼굴에 큼지막한 생채기가 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이슬람 과격 테러리스트와 같은 외부로부터의 공격인가? 마천루는 이미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지 않았는가? 실상 현대 도시의 붕괴가 시작된 것은 훨씬 이전부터이다. 도시는 완성되는 순간부터 쇠퇴하고 있었다. 자본 순환의 가속도를 높여서 이윤 축적을 극대화하려는 지점과 도시를 구성하는 대중들의 자생적 활동들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행정은 거의 언제나 합리성과 공공성이란 이름의 포장재를 쓰고 있지만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이 지점에서 우린 좋은 통치와 착한 경제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르토의 에세이에서 디테일하게 언급되기도 하지만 도시는 정말 복잡다단한 다중적인 실천의 공간이다. 조감하듯 위에서 내려보는 도시는 그 필요에 따른 레이어만은 가지고 계획하고 규칙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도시를 구성하는 인자들은 각자의 다른 욕구를 가지고 공간을 다르게 구획해 나간다. 일단 도시, 도시를 이루는 사람과 자원들은 절대 그런 누구의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자주 딛고 넘어갔던 담장은 점점 닳고 낮아져서 오히려 디딤돌이 된다. 계획자들에 의해서 잘 꾸며진 공원은 버려지고 엉뚱한 골목에서 공공적 소통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물론 이 디테일한 불일치를 가지고 기능적 도시계획자들을 비판할 수는 없다. 변명하자면 그들에게 충분한 계획과 접촉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오히려 도시를 구성하고 돌아가게 만드는 힘과 논리는 그 도시계획의 영역 바깥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합리적인 툴을 사용하여 도시를 계획했는가의 문제 이전에 도시가 과연 합리적인 공간인지, 우리가 합리성이라 믿는 것이 결국 경제적 합리성, 경제주의 편향의 가치 판단 아닌가 하는 의심들이 진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도시재생사업에 대한 상반된 진단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 쪽에서는 도시재생 사업이 주민 체감도가 떨어지고 추진 속도가 늦가시적 성과가 부족하여 과감한 예산 투자와 사업 영역 확대를 통해 빠른 시간에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토부를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사들의 입장은 대체로 이렇다. 반면에 다른 한 쪽에서는 도시재생이 당초 목표로 내세웠던 자생적 주민조직 형성을 통해 관철될 수 있는 주민주도성을 포기하고 스스로가 비판하고 출발했던 관주도, 자본주도 도시재개발의 새로운 버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어느 정도 예상되었던 흐름이지만 씁쓸하지 않을 수 없는 중간 경과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도시재생이 다시 실패하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 기정 사실이 되어가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현재의 도시재생이 도시 문제의 원인을 드러내는 것을 통해 개선의 방향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폐하거나 갈등을 봉합한 지점에서 시작하려 하고 있거나, 우리의 도시의 소통구조를 일방통행으로 이끌어왔던 동력을 그대로 답습하는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도시는 단지 낡아서 문제인 것이 아니며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쇠퇴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경제적 합리성이란 한 가지 잣대에 절대적인 비중을 두고 도시를 성장시켜왔던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다시 경제주의적 합리성이 도시재생의 주된 관점이 되고 있다. 빠른 속도 안에서의 계량되는 가시적 성과의 획득을 가능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얼핏 지당해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짧게 보자면 신자유주의 이후 신공공관리 행정에서 무비판적으로 일방적으로 관철되었던 성과주의의 신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꼴이고 길게 보자면 자본주의적 근대가 인간의 일상에 대해 유일무이하게 관철시키고자 하는 경제 가치에 대한 상상에서 한 치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삶을 변화시키는, 주민주도적 도시재생이 자꾸 관주도, 자본주도의 도시개발이 되어가는 것은 단지 특정한 관료집단의 일시적 정책 오류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이 사업들을 둘러싼 도시정책의 지향이, 그 동력이 여전히 경제적 합리성에서 한치도 벗어나 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정책과 문화기획이 도시재생에 있어서 도구적으로 쓰이는 것에 대해 무비판적이거나 수용적 태도를 이대로 유지한다면 차후에 도시 문제에 대해 문화를 얘기하는 것이 굉장히 민망한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작업은 온건하게 포장해서 얘기하자면 새로운 도시개발 사업에 주민주도성과 문화적 방법론이 데코레이션으로 얹어지는 것이고 좀 거칠게 얘기하자면 땅 파는 데 동원되어 옆에서 북치고 나발 부는 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서 지역에서 그나마 문화적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뿌려지는 재원을 통해 무엇인가를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있는 기획자나 예술가와 같은 문화 인력들의 입장에서는 보자면 이런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활동의 기회를 놓치기 힘들다. 기회의 측면을 떠나서도 지역을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단지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만이 전부가 될 수 없다. 적극적 협력자가 되기에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 다소 방관적인 입장에 놓인 이들 역시도 이 자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대안적 실천의 방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하여 충분한 답을 낼 수는 없겠지만 관 주도로 발화되는 도시재생사업에서 벗어나 시민주도의 도시권 운동과 결합하는 문화적 실천의 길에 대한 모색이 조금 더 활발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공공에서도 도시재생사업의 직접적 성과 요구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지점들에서 합리성의 잣대에서 벗어난 민간의 다양한 실천에게 기회를 주는,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하여 다른 잣대로 평가하는 정책의 실험이 필요하다고 본다.

 

 

도시의 합리성을 전복하기

 

이와 관련하여 최근 EBS에서 방영된 특집다큐 놀이의 기쁨을 보다가 매우 흥미로운 사례 한 가지를 접할 수 있었다. 영국 런던 근교 브리스톨 지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플레잉 아웃(Playing Out)'운동이다. 이 운동은 별개 아니다. 그야 말로 아이들을 바깥에서 놀게 하자는 운동이다. 그것도 놀이터나 공원이 아닌 동네 길에서 말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과거 동네 길은 차량과 사람들의 통행로이기도 했지만 아이들의 놀이 공간이기도 했다. 1970년대, 아니 198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 변두리 주택가에 가면 길에서 뛰어다니며 노는 아이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도시가 과밀화되고 차량이 많아지면서 길거리에서의 놀이가 점점 사라져갔다. 위험하고 차량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길거리의 놀이는 금기시되고 아이들은 놀이터와 공원 같은 제한된 인위적 공간이나 실내에서 놀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아이들은 길에서 노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주민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주변 사람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일요일만이라도 아이들에게 동네 길을 되돌려주자고 말이다. 물론 반발이 상당했다고 한다. 아이들이 왜 위험하게 놀이터와 같은 장소가 아닌 길에서 놀아야 하며, 왜 그런 비합리적 이유로 차량통행이 지장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얼핏 생각해도 영국 같은 선진국가에서, 그것도 가장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런던 근교의 주택가에 놀이터와 공원이 부족할 리도 없으니 그런 동네에서 굳이 차량 통행의 불편을 감수하며 길거리 놀이의 날을 추진하고자 했던 주민들이 비합리적으로 보이기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들이 다른 주민들과 지역사회를 설득시키는 데 약 2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009년부터 플레잉 아웃10년째 브리스톨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벌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아이들은 그 어떤 장소에서 노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놀이의 즐거움을 아무런 놀이 시설도 없는 길바닥에서 느끼고 있으며 아이들이 나와서 놀면서 어른들도 함께 일요일을 길거리에서 즐기기 시작했다. 주민 스스로 지역 통행로의 양쪽 끝을 봉쇄하고 애어른 할 것 없이 하루의 놀이를 즐긴다. 자연스럽게 음식과 음료가 나눠지고 대화의 장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하루가 저물 무렵이 되면 도로의 봉쇄를 풀고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브리스톨에서 시작된 플레잉 아웃운동은 영국 사회뿐만 아니라 유럽 사회 전반에서 큰 방향을 얻으며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한국에서도 포항 등지에서 유사한 시도가 단발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솔직히 현재 한국의 관에서 만들어지는 공공정책의 장에서 도시의 문화 실천의 실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어떤 아이디어와 방법론을 가져와도 수년 안에 합리성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성과주의의 잣대를 들이대고 팔다리를 자를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레잉 아웃같은 시민주도의 도시 문화의 실천을 적극적으로 바라봐야 하는 것은 이러한 실천이 문화를 도구로 여기고 있지 않으며 도로 교통의 편이성이라는 기존 도시정책의 합리성을 전복시킬 수 있는 결과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놀이터나 공원에서 노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길에서도 놀지 못하는 아이들은 놀이터나 공원에 가지 않는다고 답한다. 우리의 사회에서는 어떤 사고의 전복을 일상에서 이끌어낼 시도들이 도시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상상되고 있는가? 이런 뒷퉁맞은 질문에서 도시의 문화를 다시 이야기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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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