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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문화정책과 민주주의]시장과 국가, 두 마리의 리바이어던 사이에서

CP_NET 2019. 11. 4. 23:52

올해 들어 창작지원금에 대해 꽤 복잡한 생각에 휩싸였다. 계기는 모 문화재단의 창작지원금 관련 심사를 하고나서부터였으나 단지 그 경험으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일단 시야를 문학에만 국한시켜 보는 편법을 쓰겠다. 창작지원금이라고 해봤자 금액은 그냥 작품집 발간하는 데 필요한 제작비 수준이다. 현실적으로는 창작지원금이 아니라 작품집 발간 지원금이고 결과물을 작품집으로 제출해야 하니 창작지원금이라는 말은 사실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어쨌든 문학을 하는 작가들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각 자치단체의 문화재단에서 소정의 지원금을 받아 작품집을 발간하곤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제도의 그림자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창작지원금이 실제 작가의 생활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극히 일부 작가에 국한된다. 즉 얼마간 고정적인 수입이 있는 작가들이 지원 받는 경우 말이다.

 

각 문화재단에 약 300만 원에서 700만 원까지 창작지원금을 받게 되면 그 비용 중 상당 부분이 출간 비용으로 들어가게 된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 비용에 눈감을 수 없는 딱한 사정이 나름 있고, 작가 입장에서도 그렇게라도 작품집 발간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구조가 있는 것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웬만한 작가가 아니고서는 문학 작품집을 내면 거의 적자를 본다. 문학 독자들의 선택이 소수의 작가 그리고 서울에 있는 유명 출판사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작가의 입장에서는, 거칠게 말하면, 두 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그나마 팔리는 작가가 된다. 무조건 독자의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하고 또 서울의 유명 출판사를 통해 작품집을 발간해야 한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래 매달릴 형편이 아니고 목적도 아니니 최소한의 현상 진단에 만족하기로 하자.

 

하여튼 이런 구조에서 대부분의 작가들은 창작지원금을 발간 비용으로 써야만 가까스로 작품집을 낼 수 있는 형편이다. 내가 제도의 그림자라고 표현한 것은, 이렇게 해서 벌어지는 작품집의 양적 증가가 한국문학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는가, 하는 의구심 때문이다. 내가 심사를 봤던 그 때의 경우는, 지원을 한 작가들 중 80퍼센트는 지원이 곤란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예산을 써야 하는 사정 때문에 절반 가까이의 지원자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해야 했고, 심사를 의뢰 받은 처지로서는 당연히 행정에 따라야만 했다. 나는 그 작품들이 책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을 상상해봤고 다소 우울해졌다. 어쩌면 문학의 상품화와 공공부문의 이런 제도가 함께한국문학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닌 걸까.

 

사실 문학의 상품화 운운은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고 공공부문의 이러한 제도에 대한 비판은 제도의 후퇴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예민하다면 예민한 이 문제를 그러나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문학의 범람(?)이 도리어 문학을 퇴행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설도 아니고 아이러니도 아니다. 엄연한 현실일 뿐이다. 전위가 없으면 문화는 좀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여기서 전위를 실험적인 시도로만 제한할 필요는 없다. 다르게 인식하고,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표현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전위라 부를 수 있다. 이렇게 말하면 엘리트주의로 오해 받을 수 있겠으나, 문화예술에서 민주주의는 단지 누구나 창작을 하고 누구나 발표하는 제도가 만들어지는 것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창작과 발표를 사회적으로 보장해줘야 하는 것이야 두말할 필요 없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어떤 정책이 예술가들의 자기 방기를 조금이라도 조장할 여지가 있다면 개선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매우 예민한 일이고, 제도가 예술가들을 좌지우지할 위험도 있다. 당연히 제도의 그런 독주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창작지원금 제도가 예술가들의 태만을 보호(?)할 여지가 있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그러나 난감하게도 예술가의 자기 방기 문제는 제도로 적출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 제도가 그렇게 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문화예술의 빅브라더가 만들어지게 된다.

 

박근혜 정권 때 운용되었던 블랙리스트가 최근의 생생한 실례일진대, 국가가 예술가의 정치적 성향을 자의적으로 판단해 제도에 운용한 것은 국가의 문화예술 정책 중 가장 악질적인 사례다. 현실에서는 국가의 지원 제도가 없으면 예술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가지지 못한다. 이미 시장질서가 모든 것을 시장의 수요에 따라 재편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수요 자체를 항상 재편하고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 시장질서의 바깥에서 국가의 예술 지원 제도가 운영된다고는 하지만, 예술의 질적 성장과 예술가의 경제사회적 처지에 얼마나 좋게 작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언제나 현재적이다.

 

사실 국가의 예술지원 정책은 국가와 예술가의 관계 설정에 꼭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건 아니다. 단지 블랙리스트 같은 엉터리 때문만이 아니라 예술지원 정책은 국가에 대한 예술가의 비판과 저항의 토양을 훼손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억압이 아니라 지원을 택할 때 예술은 민주주의를 국가 안에서 사유하는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이 위험은 예술가들에게는 안전의 얼굴로 다가오기에 쉽게 인식되지도 않는다. 나는 이 지점에서 예술의 자기 방기가 시작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현대에 예술이 국가와 시장의 맞은편에 서지 않을 때 예상되는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지원 제도가 일으키는 이 딜레마에 대한 그럴싸한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국가도 시장도 예술을 불구로 만들지만 우리의 현실은 국가 이외의 시장 바깥이 쉽지 않아 보인다.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국가 안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지원제도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기어 넘어 갈 것인가. 다시 눈을 문학 안으로 돌려보자. 2년 전 한국작가회의 문인복지위원장 자격으로 예술인복지재단과 문화체육관광부를 만나 예술인 복지 정책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을 때, 나는 이런저런 자료를 주섬주섬해 예술인 기본소득을 부분적으로 실시해보자고 했다.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그래서 지금의 창작지원금 제도를 크게 개편해 몇 명의 예술가에게 2년 정도에 걸쳐 기초 생활비를 지급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물론 성과물은 요구하지 말아야 하며 지원한 생활비가 어디에 쓰이는지에 대한 증빙도 없어야 한다. 한 작가가 연달아 선정되는 것을 합리적으로 막는다면 의외의 성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아이디어에 지나지 않으며 앞에서 말한 이런저런 우려 사항이 말끔히 해소되지도 않을 것이다. 어차피 예술가의 자기 방기는 예술가 스스로가 극복해야 할 문제지만 자기 방기를 일삼는 작가에게 지원금을 꼭 줘야 하느냐에 대한 문제는 정말 난제 중의 난제다.

 

냉혹하게 말한다면 나는 국가의 지원제도에 반신반의하는 입장이다. 국가의 지원제도가 도리어 문화예술과 민주주의 사이의 고리를 약화시킨다고 보기 때문이다. 근대 국가에게 민중의 자기 통치로서의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우물가에 가서 숭늉 찾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대는 두 마리의 리바이어던이 존재하는 시간대이다. 정확히 말하면 국가를 집어삼킨 시장이라는 리바이어던이 유일하지만, 생활 감각으로는 둘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이 두 마리의 리바이어던 사이에 끼어 있는데, 현실은 소수만 정면으로 대치 중으로 보인다. 두 마리의 리바이어던을 조금이라도 방치한다면 지금 이 정도의 민주주의도 지켜내지 못하는 게 또 현실 원칙이다. 모두가 소수의 입장에 서는 시간을 우리는 혁명이라는 사건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혁명 이전에도 생활은 지속되어야 한다.

 

문제는 어떤 생활일진대, 여기에서는 이 문제를 슬쩍 개인 윤리 영역으로 떠넘길 생각이다. 민중이 사라진 시대에 민중적인 당파성을 말하는 것도 희극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예술이 시장 경제에 가려진 또는 소거된 민중을 부단히 상상해야 하는 것은 모든 저항 문화의 속성이며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문화 정책과 이 문제가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국가의 문화 정책 복판에서도 사라진 민중을 상상하는 역량을 잃지 않는 것, 혹은 국가의 문화 정책이라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을 전유해 그 역량을 배양해가는 것이야말로 문화 예술이 더 좋은 민주주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방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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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