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이슈: 문화정책과 민주주의] 분배를 넘어선 문화민주주의

CP_NET 2019. 11. 4. 23:55

지역의 불균등발전에 대한 오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일극 집중현상은 더욱 커졌다. 장차 자본의 효율이 적은 순서에 따라서 지방이 소멸하리라고 예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가 스케일에서 지역모순은 국민이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헌법정신으로 풀려야 한다. 분권을 명시한 개헌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정국이 난마처럼 얽혀 개헌에 전혀 진척이 없다. 지역분권이 포함된 새로운 체제의 헌법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촛불혁명 이후의 가장 중대한 개혁은 분권형 개헌이다.

 

당장 개헌이 어려운 마당에서 지역적 불균등에 대한 지역민의 투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으나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지역의 상황이 어느 정도 호전될 수는 있다. 이러한 처지에서 지난날의 불균등발전론이 정작 지역의 내부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일을 했는가가 궁금하다. 외재적 시각으로 통계와 구조만 보고 있지 않았던가? 또는 지역 소외나 낙후의 원인을 일괄하여 중심부로 환원하지 않았던가? 국가 시야에서 지역 문제를 법과 제도의 혁신을 통해 풀어가는 일이 시급한 만큼 지역민 스스로 자기혁신을 지속해 왔는가 따질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지방이나 지역이라는 말보다 로컬이라는 말이 더 유용하다. 서울과 지방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는 국가 안에 갇힌다. 로컬과 글로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사이에 국가와 지역(region)을 배치하여 중층 혹은 중첩 관계를 따져야 한다. 로컬에 매몰될 때 지방주의(localism)는 자기애를 벗어나기 힘들다. 내셔널리즘에 대응하면서 이를 벗어나는 시야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 가령 서울의 중앙청이 과거 조선총독부 건물이라는 연유로 철거하자 부산에서도 같은 식민 청산의 명분으로 부산부 건물을 해체하였고 그 자리에 롯데 백화점이 들어섰고 앞으로 초고층화 할 계획이다. 이는 로컬이 국가주의에 포박된 모습이다. 그 건물을 보전하여 동아시아평화박물관으로 사용하였다면 부산이라는 로컬이 국가를 넘어서 동아시아 지역과 접속하는 양상으로 발전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성장 연합이 국가주의를 절합하여 이윤을 확대한 형태이다. 이처럼 로컬은 자신의 내부를 방법적으로 탐구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하지 못할 때 한편으로 중심부 종속을 반복 비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중심부를 모방하는 지체를 거듭한다.

 

지역 문화예술 정책에서 여전한 정체 현상은 문화의 민주화라는 테제를 금과옥조처럼 되풀이하는 데서 나타난다. 예산을 늘리고 이를 어떻게 나눌 것인가라는 문제가 늘 토론의 가장 앞선 자리에 놓여 있다. 물론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문화재단의 역할도 확대하여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병행하여 가장 중요한 일이 지역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과정이다. 이는 미시적으로 로컬을 분석하여 로컬리티를 찾아가는 수행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했듯이 지방 혹은 지역이라는 용어보다 로컬이 유용한 까닭은 이를 다른 스케일과 연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컬리티의 구성은 순수한 결정체가 아니다. 고유한 바탕에 국가와 지역 그리고 세계가 중첩되어 있다. 이와 같은 다층적인 국면을 섬세하게 추적하는 작업-분석적 미시정치학이 요긴하다. 문화의 민주화라는 나눔의 명제에 집중하다 정작 삶의 결을 헤아리는 과정을 놓친 측면이 많다.

 

문화 민주주의의 지향은 개인의 문화적 발전을 민주적 과정으로 이해하는 데 있다. 일차적으로 시민들이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화 민주화가 목표가 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서비스 못지않게 내재적인 구체적 삶이 중요하다. 삶의 터전인 공간의 문제가 대두한다. 공간의 회복, 공간 정의의 실현과 같은 과제들이 지역 문화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날 문화는 삶의 질 창출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여기서 도시공간의 파편화와 균질화에 대한 인식이 뒤따라야 한다. 그동안 이익 지향적 도시발전이 초래한 문제는 많다. 공공 미술의 경우도 단지 수용자가 확대되었다고 하여 민주적이라는 보장이 없다. 성장 연합과 기업적 도시라는 문제의식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앞서 말한 분석적 미시정책학이 그 첫째이고 실천적 미시정치학이 둘째이다. 마이클 크로닌이 제안한 이 두 가지는 문화 민주주의를 위해 수행해야 할 현금의 대표 숙제라 할 수 있다.

 

분석적 미시정치학은 프랙털 모형의 도입과 네트워크 형성이 긴요하다. 로컬의 기점은 몸의 실감인데 이는 가족과 마을로 번져나간다. 대도시에는 그 기준에 따라 서로 다른 단위가 무수히 많다. 프랙털 모형은 척도를 더욱 잘게 하는 데서 나타난다. 미시적으로 세분된 단위들이 연결되는 과정을 살피는 일은 마치 인체의 핏줄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사실을 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나뭇잎에서 나무를 볼 수 있듯이 작은 해안에서 더 넓고 긴 해안을 추정할 수 있다. 도시 안에는 크고 작은 장소와 공간이 있다. 각기 다르면서 유사한 특이성의 집합이다. 미시적인 분석의 바탕 위에서 실천적 미시정치학이 수행된다. 커뮤니티 운동, 사회적 기업, 조합 등과 같은 다양한 형태의 수행이 내발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문화와 경제의 상호침투로 인하여 삶과 상품을 미화하는 도구로 전락한 문화에 대한 비판적 거리를 회복해야 한다. 외재적인 모방과 보여주기의 이벤트, 가공된 테마파크의 생명은 짧다. 추상화된 공간, 스펙터클의 전시 등이 횡횡하는 지역 문화 현실에서 더 아래로 내려와 땅 위에 엎드린 자세의 시선으로 삶과 장소를 인식하여야 한다. 이는 정책입안자나 활동가에 한정된 입장은 아니다. 시민들도 자기가 사는 장소의 앎이 책임으로 발전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이윤을 추구하는 체험시장이 되지 않고 내재화된 삶의 가치와 공감이 일어나는 공간을 회복해야만 한다.

 

지역 문화예술 정책이 매체나 재현에 대한 지원과 서비스에 한정될 까닭이 없다. 이보다 골목과 거리, 공원과 광장을 새롭게 하는 일이 문화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더 중요하다. 일상의 인식적 지도를 그려내지 못하는 주체는 경험이 휘발되고 삶이 추상화되는 과정을 인식하지 못한다. 사회 내에서 고유하고 현실적인 위치를 찾아가는 일이 요긴하다. 주민들이 도시를 경험하고 도시를 전유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거리 예술이 금지된 도시에서 문화 민주주의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문화의 민주화라는 정책 목표는 체험 서비스에 한정되었다. 도시재생이나 공공 미술도 이러한 서비스라는 측면이 많다. 수월성을 목표로 하는 엘리트 예술 지원도 분배의 논리에 급급하였다. 지역 문화정책에 내실을 부여하려면 더욱 로컬에 밀착해야 하는 데 이는 이제 하나의 당위이다. 이러한 대목에서 지역학을 문화 민주주의의 바탕을 만드는 학문 영역으로 상정하게 한다.

 

방법적으로 사는 고장을 알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적 수행에 이르는 정책적인 선순환 구조가 도입되어야 한다. 지방주의가 아니라 비판적 지방주의로 자기인식을 구체화함으로써 시민과 공간이 함께 혁신의 기회를 맞을 수 있다. 문화의 민주화 단계에서 문화 민주주의로 가는 과정은 험난하다. 시시각각 상업적이고 기업적인 침투가 자행되고 성장 연합이 정책을 주도할 공산이 크다. 이를 제어하면서 인간화되고 특이성이 꽃피는 문화를 실현할 때 문화 민주주의 길도 열린다.

 

-------

구모룡

1959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부산대에서 현대문학을 전공했다. 1982<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당선되었고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앓는 세대의 문학-세계관과 형식, 구체적 삶과 형성기의 문학, 한국문학과 열린 체계의 비평담론, 신생의 문학, 문학과 근대성의 경험, 제유의 시학,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시의 옹호, 감성과 윤리, 근대문학 속의 동아시아, 해양풍경, 은유를 넘어서, 제유, 시인의 공책, 폐허의 푸른빛-비평의 원근법, 예술과 생활-김동석문학전집(편저), 백신애연구(편저) 등을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