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이슈: 정책의 난제들2 “협치”] 도착하지 않은 문화민주주의 시대의 거버넌스에 대하여

CP_NET 2019. 10. 1. 17:53

 

 

 

거버넌스(governance)라고 불리는 협치의 문제가 주목받고 있는 것은 반드시 문화정책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1990년대 후반부터 근 20년간 거버넌스는 행정혁신의 가장 주요한 의제였다. 심지어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되었던 시기로 불리던 박근혜 정부시절에도 형식적이지만 거버넌스 조직들은 정부 주변에 숱하게 만들어졌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거버넌스가 정부 기구의 일방적 통치구조에서 벗어나 민간이 함께 참여하는 협력적이고 분권화된 행정시스템이란 점에서 행정의 민주화로 바라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지만 반드시 그런 측면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선 분명한 것은 거버넌스의 시작이 아래로부터, 혹은 시민들의 요구에 의했다기보다는 행정의 필요에 의해 민간을 끌어들인 측면이 더 강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IMF 사태가 터지고 들어선 국민의 정부는 세계자본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가 운영방식을 재조정하는 작업을 적극적으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것은 단지 전적으로 외세에 의한 구조조정이 아니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도 얼핏 묘사되고 있지만 IMF로 대표되는 외세를 끌어들여, 등에 업고 국가를 재조정하고자 하는 파워 엘리트 그룹이 이미 이 땅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후 진행한 국가 재조정 작업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경제적 측면에서 신자유주의, 노동 측면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라고 불리는 비정규직 양산, 그리고 행정의 측면에서는 신공공관리 행정의 전면화다. 신공공관리행정은 국가 운영 방식에 기업경영원리 도입을 전면화하며 경쟁 위주의 성과관리 중심으로 행정시스템을 재편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공공관리의 주요 정책 수단은 인력 감축, 민영화, 재정지출 억제책임운영기관규제 완화 등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공기관에 대한 각종 성과관리 시스템이 모두 이 행정 방식에 연유한다. 영미권에서도 신자유주의와 한쌍을 이루었던 신공공관리 행정은, 그러나 한국에서도 지난 20년간 드러나듯이 계량적 효율성을 넘어서는 질적 성과를 만들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행정의 비대함을 줄이겠다는 자기 선전을 실현하지 못했다. 여하간 거버넌스는 이런 신공공관리 행정 개혁(개악?)에서 민간을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수단으로 도입된 것이다.

 

물론 아주 이상적인 시각으로 거버넌스를 바라봤을 때 민()의 다양한 입장이나 이해관계, 이슈와 지향들이 공공정책에서 실현될 수 있다면 상당히 민주주의의 내용적 진전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전제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민과 관의 힘의 균형이 완전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구현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람시 방식으로, 다소 과격하게 이야기하자면 정부를 포함한 지배권력은 물리적 통치수단뿐만 아니라 무형의 헤게모니를 강하게 쥐고 있는데 여기 대항할 수 있는 안티헤게모니가 너무 미약한 수준이거나 아예 배제되어버리는 구조라면 거버넌스 조직은 거수기이거나 저렴한 비용으로 민간의 역량을 자진납세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한국의 대부분 거버넌스 조직의 현실이 바로 그러하다. 관료조직은 비교적 안정적인 급여를 받으며 특정한 정책 업무에 지속적으로 결합하여 해당 분야에 대한 정보와 기능적 지식, 전문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일시적으로 결합하는 민간의 기능적 전문성은 떨어지는 게 당연한 노릇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기능적 전문성에 국한된 부분이다. 내용적인, 혹은 질적인 문제해결 능력이나 방향설정이라는 면에서는 보자면 그 관계성은 달라진다. 게다가 거버넌스의 명분에서 민간의 참여가 해당 전문가들을 참여시켜서 정책의 질적 수준을 올리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공공정책의 결정과정에서 다양하게 충돌할 수 있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내용적으로 관철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의 진전이란 측면에서는 더욱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 행정조직이 펼쳐놓은 거버넌스의 장은 협소하고 부분적일 뿐이다.

 

문화행정조직의 거버넌스와 관련하여 지난 해 참여했던 문화정책 연구에서 있었던 모 지방자치단체 문화예술위원회 민간위원들과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전임 구청장 시절 문화민주주의 실현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앞세워 구성한 그 위원회의 민간위원들 대다수는 위원회 구성 및 활동 7년여 만에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깊은 회의감과 심리적 피로감을 토로하고 있었다. 구성 초기만해도 지역의 문화정책에 관하여 위원들 간의 난상 격론도 있었고 자발적인 공동작업으로 어렵게 지역문화실태를 조사하는 등 물리적 어려움은 있었지만 스스로 해당지역의 문화정책에 개입하고 있다는 성취감과 만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활동의 성과로 해당 지역에 문화재단이 만들어지고 몇 가지 사업들이 실현되면서 관의 입장이 미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선은 본래 다소 불분명했던 위원회의 위상이 더욱 모호해지면서 위원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만들어지는 의제들보다는 자치단체 문화관광과에서 가지고 오는 정책에 대해 의견을 구하는 수준으로 역할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그나마 문화관광과는 해당 정책에 관련된 자료를 지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요약해서 가져왔고 회의 전날이나 심지어 회의 당일에 논의 안건을 알려주기도 했다고 한다. “위원회에 가서야 오늘의 회의가 열린 이유를 알았던 경우도 있었다”, “문화과장이 왠 낯선 이를 데려오더니 신임위원장 예정자라며 위원회 의결을 부탁해서 항의하고 그냥 나와버렸다”, “내가 그 위원회에서 무슨 존재인지, 그 위원회가 우리 지역에서 어떤 위상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얘기들은 거의 가감 없이 그 위원들 입에서 나온 얘기들이다.

 

해당지역은, 문화예술위원회가 있다는 사실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듯, 그래도 비교적 협치행정이 잘 되는 지역으로 손꼽히는 지역이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온 거버넌스가 갖고 있는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비교적 양식이 있고 트랜디한 측면에서 이 있는 자치단체장은 행정조직 바깥의 문화전문가들의 의견을 수용해서 위원회 설치를 명했지만 그 위원회 자체가 지역 현장의 의제에서 출발하지도 않았다. 그러다보니 몇몇 의식 있는 지역 내 전문가들의 열정과 헌신에 의해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초창기 의제 세팅은 이뤄지고 잠시 굴러가는 모양새를 보이기는 하지만 지속성을 갖기는 절대 힘든 구조인 것이다. 위원회의 지역 내에서의 공식적 위상도 모호하고, 정작 지역민들에게는 인지되지도 않고 있으며 그러다보니 위원들이 어떤 대표성을 부여받고 관과 대등한 입장에서 일을 지속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어차피 위원들을 정하는 것도 관이고 위원들을 그만두게 하는 것도 관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례가 기초자치체만의 문제일까. 국가 단위의 협치조직은 다른가. 각종 정부 위원회 조직들은 이해관계의 충돌 문제 때문에 현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원으로 임명하기 힘든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 위원 자격으로 모호한 대표성을 요구한다. 예술분야 지원기구의 경우는 특히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러다보니 자꾸 이런저런 현업 종사에는 해당되지 않으면서 업계에 한발 정도 살짝 걸치고 있는 연계 학과 대학교수들만 과도하게 위원을 차지하고 있는 현상이 반복된다. (그런데 대학-아카데미야 말로 노골적으로 문화예술계의 구조에서 매우 주요한 이해당사자란 것이 아이러니다.)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이 있다. 거버넌스를 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업계의 존경받는 대표선수들을 모아서 좋은 얘기 듣고자 하는 것일까? 오히려 거버넌스를 하게 된 것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이 생태계 전체를 대표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문화 생태계 서식자들의 이슈와 맥락이 예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훨씬 다양하고 복잡해졌으며 어떤 제도나 권위, 예컨대 협단체이건 아카데미 권력이건, 도제관계이건, 아니 그보다 훨씬 강력한 문화부 관료들이건 간에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는, (물론 그것이 매우 부정적인 방식일지라도) 더 이상 질서 안으로 포획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거버넌스를 하겠다고 나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어떤 정책적 질문을 할 것인가를 놓고 거버넌스 조직을 구성하고 그에 맞는 조각난 대표성을, 물론 그것이 결코 하나의 완결된 형태로 조합되지 않더라도 다시 구성하는 구조를 그려봐야 하는 게 아닐까. 거버넌스 조직이라고 주장되는 틀을 미리 만들어놓고 거기 적당한 사람들을 앉혀놓은 이후에 의제를 세팅하겠다고 나서봐야 제대로 된 문제의식을 형성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생태계에서 첨예하게 대두되고 있는 의제를 다루고 있는 그룹이나 개인들을 거버넌스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 그들이 주어진 임기 내에 해당 영역에 관한 문제의식으로 정책에 끈질기게 개입하게 하며 이를 공식적인 행정 구조를 통해 지원하는 구조를 상상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예술인 노동권 보호에 대한 이슈가 있다면 그것에 대해 떠들 수 있는 명망 있는 지식인을 위원으로 앉힐 것이 아니라 그런 주제를 잡고 수년간 이슈 파이팅을 진행해온 활동가를 그 자리에 앉혀야 한다. 나이, 성별, 학벌 따위는 앞으로의 거버넌스 조직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어야 한다.

 

거버넌스는 조화와 타협의 평온한 친목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최종심급에서 불가피한 타협의 고독한 순간이 오게 되겠지만 그 이전까지는 생태계의 핵심 정책 이슈를 둘러싼 현실에서의 부조화를 끄집어내고 은폐된 갈등을 공공의 장으로 불러낼 수 있는 쟁투의 장이 되어야 한다. 이름을 얻지 못한 언어들을 도출시키는 거버넌스로의 전화(轉化), 그러나 이것은 관료 권력이 호명되는 위원회 조직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꿈이다. 관료들은 그들의 시간을 강요할 것이고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 비타협적이거나 비현실적인 몽상가로 낙인찍혀 배제되는 구조가 변화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지금 더욱 필요한 것은 그래서 섯부른 아이디어 수준의 정책 참여가 아니라 운동이다. 어떤 이들의 연극 제목처럼 문화예술의 권리장전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시혜처럼 내려온 거버넌스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강물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

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