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왔다. 새싹이 트고, 만물이 생명을 얻는 시기. 그러나 나는 아직 이 봄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는 이 시기에, 나는 창작활동을 잠시 쉬며 한국을 떠나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를 시작했다. 예술인으로서 활동범위를 더 넓히고자 하는 목적이다. 이 글의 자극적인 제목에 끌려 들어왔을 독자에게 사과의 마음을 먼저 보낸다.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다시 지원사업에 지원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제목 그대로의 고민을 이야기해 볼까 한다..
2024년, 올해 해외에 나가 작업을 잠시 쉬어가겠다는 선택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끊임없이 증명하고 새로운 것을 제안해야만 하는 시스템에 어느덧 싫증 났거나 내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 한국을 잠시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2016년, 나는 처음으로 예술지원사업의 문을 두드렸다. 당시 갓 졸업한 나에겐 경력이란 겨울나무처럼 휑하니 비어있었고, 생각을 서류에 옮겨적는 일은 마치 처음 맞는 겨울의 찬 바람처럼 낯설고 서늘했다. 그 결과, 나는 그 높고 먼 문턱을 넘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는 없었다. 동료들과 함께 아르바이트하며 조금씩 모은 돈으로 만든 나의 첫 작품은 겨우 소수의 관객들과 만날 수 있었다. 비로소 이 과정에서 나는 기획자이자 연출가, 단체의 대표가 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지원사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였다. 점차 지원사업이 어려운 생계를 대신해 작품활동을 지속하는 수단을 넘어, 마치 황금빛 인증마크처럼 내 작품에 가치와 인정을 부여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품었다. 문화예술위원회나 문화재단 로고가 담긴 작품포스터들은 마치 국가공인된 작품의 표시처럼 여겨지기 시작했을 때, 지원사업을 통한 작품활동에 나는 크게 만족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나의 작업을 ‘훌륭한’, ‘공인된’, ‘보다 뛰어난’이라는 자기만족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물론, 작품에 대한 지원이 없이도 나의 개인 작업은 어찌저찌 계속될 수 있지만, 그것은 마치 꽃을 피우지 못한 채 뿌리만 깊게 내리고 있는 나무와 같은 문제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원사업에 떨어져 기관의 로고를 포스터에 넣을 수 없었을 때 기관이나 협회에 전화하여 작품포스터에 후원 로고를 삽입할 수 있는지 허락을 구해 사용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제도의 근본적 문제는 그대로 인 채 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종류, 가짓수, 금액만 바뀐 지속성이라고는 없는 지원사업들은 어느 순간 나를 지원금에 맹목적 의존을 하는 예술가로 바꾸어 놓았다. 어느 날 여러 개의 지원서를 동시에 띄워 놓고 각기 다른 신작의 아이디어를 골머리를 쌓을 때, 불투명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한다는 말이 적합했을 때, 지원받은 작품은 다시 지원할 수 없는 구조로 매년 새로운 신작을 준비하는 압박이 극에 달았을 때 지원금을 바라는 나의 창작활동과 가치를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고, 이 과정에서 예술가로서의 정체성과 독립성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지속가능하고 친근한 예술지원의 필요성을 느낀 후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제도개선에 대해 목소리 내고 참여하였다. 그런데도 오히려 되돌아가거나, 사라지거나, 반복되는 정책들을 보면서 ‘과연 나의 삶을 기대도 안전할까?’라는 의심을 더 이상 지울 수 없었다.
지난 2023년 11월 15일 청년예술청에서는 ‘성평등 탈위계 문화조성 플랫폼 NONE’이 주최한 ‘예술지원사업 털어보기: 내가 만약 지원사업을 만든다면’이라는 주제로 지원사업에 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라운드테이블이 열렸다. 그곳에 참여한 나는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흔하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있었다. “기존의 위계적이고 비공개로 진행되는 전문가 심사에 대해 불만이 있으면서도 신뢰가 기반해야 하는 동료평가제에서 이루어진 폄하, 가해 등과 같은 사례에 있어 전문가 심사가 비교적 공정하다”는 이야기, “자신도 지원금사업에 지원하고 싶지 않지만, 그 외 방법으로는 자신의 작업을 하는 것이 쉽지 않고, 특히나 작업의 예산 중 자신의 임금과 함께하는 동료들의 인건비 예산이 가장 해결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결국 지원사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고민, 문제 해결을 위해 “예술지원제도와 예술인지원제도를 더욱 선명하게 분리하여, 먹고 사는 문제와 창작의 영역이 각각 다른 기준으로 지원제도가 개선되길 바란다”는 요구가 있었다. 또한, “점차 장르 간의 협업, 기술 발전 등으로 장르의 벽이 무너지는 사례가 빈번함에도 기존의 지원시스템은 아직도 구시대적인 장르로 창작을 구분하고 있어 새로운 작품을 지원할 때 혼란스러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만큼 장르로 구획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기준과 방식이 필요하다”는 목소리, “한정된 예산을 배분하는 기존 지원사업에서 전문가들의 심의 과정이 불가피하게 우선순위를 결정짓게 되는데, 시민참여예산이나 청년자율예산과 같이 예술가들이 예산배분에 직접 참여하는 방식을 도입하여 정책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정책을 제안하는 등 지원예산배분을 논의할 수 있는 제도적 실험이 필요하다”는 대안까지 다양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다.
내가 현재 어학연수를 하는 아일랜드에도 예술(인)지원을 하는 국가기관인 아일랜드예술위원회(The Arts Council of Ireland )가 있다. 글을 쓰기 위해 찾아본 한국과 아일랜드의 지원제도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아일랜드예술위원회의 접근방식, 특히 기후위기, 청년(Young)예술가 지원, 생애주기 교육기관과 협력 같은 그들의 적극적인 자세는, 한국의 예술지원사업이 가진 한계와 대비되며 특히 눈에 띄었다.
그들이 예술지원에서 핵심가치로 두고 있는 것 중엔 기후위기 대응, 예술접근성을 명시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예술인들과의 기후행동협약, 10세부터 신청이 가능한 예술지원사업(Young Ensembles Scheme), 생애주기 학교(유아, 초, 중, 고)와 협업하여 진행되는 예술인 지원제도 들이었다. 아일랜드예술위원회의 기후행동협약 관련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일랜드 예술인들 63%이상이 기후위기 대응에 예술의 영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The Climate Action Survey 2022 ), 따라서 실천을 위해 예술인들과 아일랜드예술위원회는 기후위기행동협약을 함께 맺었으며 지원금의 일부와 위원회의 예산 일부를 기후위기 대응을 실천하는 예산으로 편성하여 운영한다. 또한, 예술(인)지원을 10세라는 어린 시절부터 참여할 수 있게 하고 있는데 이는 다양한 창작환경을 만들어주며 대중에게 예술의 접근성을 높이는 효과뿐만 아니라 공공지원에 대한 상징성을 상당히 줄이는 효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한다. 마지막으로 생애주기 학교들과 연계하여 사회진입 전부터 자신의 창작의지를 실험과 활동으로 지속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며, 특정 학교가 아닌 일상의 학교생활에서도 자신만의 예술적 언어를 개발하고 검증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물론 이런 지원을 통해 아일랜드의 예술가들의 생계, 만족도, 행복도는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이 강조하고 있는 기후, 교육, 사회참여, 다양성 등은 기본적으로 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강조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접근은 예술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음을 아일랜드 사회적 합의를 시사하고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유독 재작년부터 지원사업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주변 동료들에게서 종종 들려온다. 이 이야기들은 지원제도의 환멸감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지원사업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두 발로 서서 자립하겠다는 것, 예술가 스스로가 자신의 창작 활동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려는 의지이며 실천이고 행동이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이런 예술계 각 개인이 자신만의 뿌리를 내리려는 시도로 단순히 지원사업에 등을 돌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는 예술가들이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반문일 수 있겠으며, 자신의 예술적 실천과 가치를 자신의 힘으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구의 반영일 것이다.
나 또한 올해 의도적으로 지원사업 신청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이 결정을 주변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공유했으며, 이러한 행동도 나름대로의 작은 반항이자, 내가 생각하는 더 나은 창작 활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여겼다. 이는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재의 안정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의 독립성을 지키며 더 넓은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하는 결정이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선택에 대해 작은 자부심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지원 제도가 작가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상상하며, 제도개선을 위한 예술인들의 목소리를 강조하고 싶다. 나의 이야기는 단지 한 예술가의 변화된 경로를 넘어서, 예술지원 시스템 내에서 직면한 과제들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마음을 전달하고자 한다. 예술가들의 이러한 자립 시도가 개인의 선택과 행동을 넘어 예술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책논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테이블 필요성을 또다시 강조하며 예술계에도 새로운 봄날을 가져오기를 기대한다.
황유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예술을 통해 나만의 언어를 창조한다. 여행을 통해 세상를 탐구하고 다양한 문화와 경험을 쌓는 것을 즐긴다. 대부분의 일상을 몽상과 사유에 사용하며, 삶의 다양한 측면을 탐구하는 중이다. 매일 길에서 우연한 만남을 고대하며 길을 나서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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