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410 총선이 보여준 문화정책의 ‘복합적인 난맥’

CP_NET 2024. 5. 8. 22:42

 

 

 

선거시기에 무언가를 요청하는 행위가 의미를 가지려면 어떤 조건이 되어야 할까. 요청을 하는 쪽에서야 긴급함이나 중요도를 기준으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요청이란 결국 받는 쪽이 수락해야 현실성을 갖는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 둘이 엇나가게 되면 사실 요청이라기보다는 주문에 가깝게 된다. 중립적으로 말하더라도 선거 시기의 요청이란 결국 요청하는 쪽과 요청받는 쪽의 짜여진 역할극에 가깝다. 한국 사회는 선거 시기를 단순히 새로운 선출직 공직자를 뽑는 절차로서 만이 아니라 당대의 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적/제도적 쟁점을 공론의 정책 시장에 등장시키는 계기로 활용해왔다. 때로는 정책협약이라는 방식으로, 가끔은 특정한 당사자 집단의 정치적 대표성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많은 경우는 간담회나 토론회와 같이 공론장을 활성화하기 위한 계기로 삼아온 것이다. 지난 410일 총선을 거치면서 선거를 계기로 하는 시민사회의 활동이 사실상 시효를 다한 것이 아니냐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한편으로는 민주당 중심의 위성 정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주체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2000년 이후 한국형 총선참여운동 중 하나인 낙천낙선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참여연대가 지난 430일 토론회에서 시민단체들의 선거참여활동은 점차 위축되고 사회적관심도 멀어지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좌담회] 2024 총선과 시민사회의 과제: 시민단체의 선거참여활동 평가를 중심으로 (4/30)"

 

주요한 사회조사업체가 내놓는 선거 이후 분석은 기껏 일정 규모 이상의 부동산 소유 여부가 정치적 지지의 기준으로 확인되었다는 세간의 사실을 확증하는 수준이다. (“[22대 총선 특집] 득표율 분석)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정도의 차이일 뿐 사실은 매 선거마다 비슷한 양상이지 않았나. 즉 특별히 이번 총선의 과정과 결과가 과거의 반복이라는 맥락과 다른 이야기가 있을까.

 

 

정권심판이라는 의제

 

이번 총선에서 정권심판이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기준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만큼 윤석열 정부에 대한 호감과 반감이 총선의 결과를 갈랐다. 하지만 역대 총선은 언제나 정권심판론이 중요한 쟁점이다. 이번 총선이 흥미로웠던 것은 역대 최대 무능을 보여주었던 다수정당이 정권심판론을 빌미로 해서 다시 다수당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번 정권심판론이 가진 독특함을 보여준다. 이런 특징은 문화예술운동에서도 고스란히 반복되었다. 이를테면 블랙리스트 문제의 경우. 과거 정부에서는 진상조사기구에서 이행협치단으로 이어지는 협력과정이었다가 이번 정부에 들어서면서 블랙리스트 가해자의 재등장했다. 문재인 정부의 블랙리스트 후속조치가 적절했다는 사람이 거의 없고 그 책임이 당시 집권 여당인 21대 국회의 다수당에 있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도 없지만 블랙리스트 당사자를 다시 정부권력에 데려오는 퇴행적인 정부에 더 큰 반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래서 22대 국회에서 블랙리스트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라는 점인데, 이미 법적 처벌의 실효적 기간이 흘러간 상황에서 다시 재처벌을 제도화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면 남는 것은 가해자 집단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응징일 것이고 이것이 정치적으로 표현된 것이 소위 정권심판론이라는 논리다.

 

 

퇴행하는 정당 문화정책

 

선거 시기 정당이나 후보자에게 정책을 제안하는 활동을 반복할수록 흥미로운 경향성을 확인한다. 그것은 수용가능한 정책으로 선별하는 내부절차의 확대 과정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조금의 고려를 통해서 수용할 수 있는 요구들로 수용(가능)한 정책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다는 말이다. 마치 시험을 보는 당사자가 준비한 수준에 맞춰서 출제를 하는 것인데, 이것이 몇 차례 반복하면 시험을 보는 측에선 마치 내가 공부한 범위에서만 출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투정을 부린다. 이를테면 이번 총선 과정에서 논란이 되었던, “지지하는 단체와만 정책협약을 하겠다”(“민주당 정책협약 하려면 지지선언 하라’···“시민사회 동원비판에 철회)는 민주당의 선거 방침이 그렇다. 이런 논란의 당사자 단체이자 총선 기간 중요한 활동을 해온 그래, 문화행동42일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맺는다. 이 정도가 되면 선거 시기에 시민사회의 청원형 정책제안 운동은 읍소형 수준을 벗어나서 억지로 떠 먹이는 유아적 수준까지 퇴행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제공하는 제22대 국회의원선거 정당정책에는 각 정당이 이번 총선에서 내세운 10대 정책공약이 공개되어 있다. 해당 내용은 선거를 앞두고 정당이 공식적으로 제출한 자료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실제 정당 내 행정절차 수준으로 전락한 정당정책 제출과정을 고려하더라도 그렇다. 정권심판론을 앞세워 제1당이 된 민주당은 문화분야 공약으로 [5. 국민이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준비하겠습니다]라는 항목에 문화예술인의 창의적 창작권을 보장하고, 국민을 위한 문화예술 국가 구현이라는 공약을 제시한다.

“○ 정부의 창작권리 개입 금지. 「지원은 하되 간섭은 않는다」의 원칙 준수, 문화예술 인력양성 지원법 제정, 
보편적 문화향유 실현을 위해 문화재정을 국가예산 대비 2.5% 단계적 확대, 통합문화이용권 이용 확대”

 

집권여당인 국민의 힘은 [6.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지역만들기]라는 항목에 함께 누리는 문화생활 기반 마련[8. 청년 모두 행복한 대한민국]이라는 항목에 청년 문화생활 지원을 제시하고 아래와 같은 세부적인 사항을 제시한다.

“② 미래세대의 문화 생활을 촘촘하게 지원
- '청년 문화예술패스' 지원대상을 만 19세->24세까지 단계적 확대”
“ ③ 만족도 높은 지역 문화·스포츠시설과 프로그램 구축
- 노후화된 공공 체육시설을 문화·스포츠 복합시설로 업그레이드
- 국립문화예술기관·시설의 지역 분관 확대 및 순회 전시·공연 확대
- 전국 문화 소외지역에 '찾아가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제공”

 

사실 두 당의 문화정책 공약이 가지고 있는 차이라면, 민주당이 문화정책의 당사자를 예술인으로 구체화하고 있는데 반해 국민의 힘은 문화정책의 당사자를 향유자인 주민들로 구체화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제시된 사항들은 특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반복되어온 예술지원정책이나 문화시설 개선사업을 다시 반복하는 것에 불과하다.

 

22대 국회의원선거 정당정책

[관련기사] 22대 총선 문화예술 공약 분석지켜보고 있다는 기록

 

 

동반 퇴행을 우려한다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진행한 그래, 문화행동이 제시한 문화예술현장 6대 제안 과제는 거버넌스 문제에서 특정한 법률제도 그리고 재정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다.

제안 01. 국회와의 정책 협력 거버넌스 구축
제안 02.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문화예술분야 생태, 환경 기준 마련
제안 03. 블랙리스트 특별법 제정
제안 04. 문화예술 분야 일자리 확대 및 지원
제안 05. 지역 내 유휴공간의 문화적 활용과 공공자산화
제안 06. 지속가능한 문화예술생태계 조성과 문화분권을 위한 문화재정 확충

 

 

참여자의 전언으로는 각 정당들은 이런 정책제안에 대해 적극적 검토하겠다는 뻔한 답변을 내놓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해당 정당에 전달한 그래, 문화행동의 문화정책과 토론회 주최 제안이 의원에게 전달되지 않는 점이 확인되기도 했다.(문화예술 현장 대토론회와 정당별 문화정책 공약 비교) 즉 정당의 정책이 소속 의원들을 통해서 반영되거나 관철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정당들의 정책공약과 시민사회의 정책공약 사이에 어떠한 변별성이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위의 6가지 정책제안 사항 중 첫 번째는 이미 국회에서 설치 운영 중인 국회의원 연구회 수준의 제안으로 보인다. 문화예술 분야의 일자리 확대 및 지원의 경우에도 예술의 사회적 가치와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강조점과 지역문화, 문화예술교육, 문화도시 등의 영역에서 공공일자리를 확보하라는 주장이 엇갈린다. 그동안 이런 일자리 제안에 대해 예술인을 사회정책의 수단이나 도구로 쓰는 것 아닌가라는 비판과 양립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애당초 복잡하게 꼬여 버린 문화예술강사제도조차 길을 찾고 있지 못하는 상황인데, 반복적으로 요구하는 예술인의 공공일자리가 무슨 일자리인지 분명치 않다.

 

문화재정 확충은 일종의 트리거다. 문화재정의 규모가 크지 않아 문화정책이나 사업이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 문화분권 역시 토론이 필요하다. 현재 지역문화현장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분권이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것인가, 아니면 분권의 부정적 효과에 가까운 것인가 질문을 해봐야 한다. 지역의 문화도시 기관들이 단체장이나 관료집단의 몰이해 속에서 곤란을 겪고 있는 건 반복적인 문화분권이라는 주장에 앞서서 기존의 지역 문화정책이 어떤 상태인지를 진단할 필요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블랙리스트 후속 조치로서 블랙리스트특별법의 제정은 모호하다. 일단 특별법의 형식이 필요한 이유가 기존 법률에 의한 시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해가 되지만, 피해자 구제와 보상이라는 측면에선 멈칫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국가의 검열과 차별 방지 같은 것은 예술인뿐만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보장받아야 하는 인권에 대한 사항이다. 그런데 그것을 특별법의 형식으로 만드는 건 예술인이 더욱 취약한 상황에 놓인 이유가 권력에 의한 취약성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야 한다. 즉 특수한 대상의 보호라는 법목적이 성립하려면 말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면 이 법은 구제 및 보상법에 가깝다. 특히 사회적 기억을 위한 지원책을 마련하라는 내용은 더더욱 그렇다. 즉 사회적 재난 및 폭력에 대해 늘 그래왔듯이 또 하나의 특수한 추모와 기억의 트랙을 신설하는 것이다.

 

 

멈추어 있는 것이 퇴행이다

 

그래, 문화행동이 제안한 내용은 각각이 제시하는 내용의 중요한 방향성과 근거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반복되어 왔던 주장을 새로운 포장지로 다시 진열해 놓은 재고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이해가 되는 것이 과거의 주장조차 제대로 반영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저 주장들이 반복적이고 낡아 보이는 이유는 요청을 받는 상대방이 무능했거나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이유식 단계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로 바로 일반 식사로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계속 특정 단계의 요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오히려 고민해봐야 하는 것은 이런 정책 의제의 정체가 상대방의 퇴행에 맞춰서 그것을 주장하는 우리의 퇴행으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기 평가다.. 언제부턴가 시민사회의 총선에 대한 개입은 구체적인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시민들이 낙천낙선운동 등 시민단체의 총선 활동에 대하여 무관심하다는 평가와 2024총선시민네트워크가 내놓은 그 결과 총선넷이 선정한 공천반대 후보 46명 중 10명은 공천을 받지 못하거나 불출마를 선언하였고, 15명이 패배하면서 54.3%에 해당하는 25명이 최종 낙선했다. 특히 4명의 유권자 캠페인 대상자 중에서는 3명이 낙선했고, 수도권에서는 65%13명이 낙선했다. 각 정당별로는 국민의힘이 50%(36명 중 18), 더불어민주당이 57%(7명 중 4), 개혁신당 100%(2명 중 2)가 낙선했다. 이들의 낙선은 우리 사회의 반개혁과 퇴행에 대한 유권자들의 엄중한 목소리를 보여준 결과다.”라는 자기 평가는 모순으로 보인다.(“[총선시민네트워크][입장] 22대 총선 결과에 대한 2024 총선넷 입장: 국민은 변화와 개혁을 선택했다”)  

 

개량적 수치로 보면 여전히 낙천낙선운동은 효과를 보이는 것 같다. 스스로 제시한 낙천자, 낙선자 명단이 영향을 보이는 것으로 보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평가는 외려 시민사회 운동이 퇴행을 보여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22대 총선의 초선 비율은 43%. 이는 17대 총선에서부터 현재까지 가장 낮은 초선 비율이다. 바로 전인 21대 국회만 하더라도 초선의원은 151명이어서 22대 총선의 131명에 비해 20명이 많았다. 특정한 명단의 발표와 그 명단에 포함된 이들의 최종 당선 여부로 운동의 결과를 평가하는 것은, 그런 결과를 포함한 전체적인 정치 지형의 후퇴나 문제를 보지 못하도록 한다. 이 때문에 시민사회단체가 위성정당에 참여함으로써 그동안 정치개혁 의제에서 가지고 있던 입장들이 모두 스스로의 입신양명 때문이냐는 논란이 빚어졌어도 자기반성을 하지 않는 것이다.

 

 

다시 토대를 향해

 

왕자웨이의 영화 <아비정전>을 보면 발 없는 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극 중에선 주인공인 아비가 가볍게 여성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자신을 버린 엄마를 찾는 여정의 알리바이로 극에 달한 외로움과 정처 없음이 결국 죽음이라는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비장미 어린 독백에서 언급된다. 지난 총선 시기 문화정책이나 공약을 둘러싼 과정을 살펴보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이미지는 바로 발이 없는 새의 이미지였다. 영화처럼 비장미 흐르는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좀처럼 구체적인 실제에 내려앉지 못하는 이야기들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정부나 국회를 차지하고 있는 권력의 힘도, K라는 기표를 앞세워서 후진적인 산업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문화산업자본의 힘도 큰 변화 없이 현장을 압도하고 있는 중이다. 오히려 2000년 초기부터 등장한 문화정책운동의 주요한 당사자들이 행정권력이나 문화산업자본의 부분적인 행위자로 포섭되어 갔다. 그것이 아카데믹의 영역이든 구체적인 지역 문화사업의 현장이든 그렇다. 존재가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면, 어쩌면 우리라고 부르는 현장자체에 대해 의심을 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이미 변한 우리들의 존재가 새로운 문화정책 과제들의 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모든 견고해 보이는 것들을 무너뜨릴 각오를 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문화정책의 정체 혹은 퇴행은 저쪽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라 이 편에서도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문재인 정부 시기의 주요한 문화정책들은 대부분 현장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된 힘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된 현장이 진짜 흙먼지 날리는 땅바닥을 의미하는 것인지, 발화자의 직군만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정책과 사업의 지원 당사자가 정책과 사업 과정에 개입해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문화예술정책 과정의 상당히 독특한 정책구조를 보여준다. 이 과정의 계기적 시효가 다했다는 것이 현재 문화정책 난맥락을 살펴볼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한다.

 

 


김상철.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연대 집행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집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 현재 예술인생활안정자금 관리위원회 위원, 한국예술교육진흥원의 윤리경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나라살림연구소에 적을 두고 재정과 참여예산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도 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