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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거버넌스, 수평적·민주적 조직문화에 대한 갈망

CP_NET 2023. 8. 3. 16:39
편집자 주: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정책 현장의 다양한 연구진, 필진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협업'을 운영합니다. '협업'은 참여하는 연구진, 필진들이 독립적으로 기획 진행하고, [문화정책리뷰]는 발표를 돕습니다. 앞으로 문화예술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담론 작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문화정책연구모임 ‘행간行間’의 [문화정책의 유행]입니다. 특정 개념 및 분야가 유행하며 문화정책 장에서 중심을 차지하는 현상에 관한 비판적 논의를 펼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①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두 번째 작업을 시작하며- 문화정책을 ‘유행’이라 명명하기
②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정책 키워드 별 예산 추이와 사회적 영향의 상관관계에 대하여_ 나보리
③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현장’이라는 유행에 대한 예비적 고찰_ 채태준
④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담론이자 전략으로서의 공공성_ 권수빈
⑤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거버넌스, 수평적·민주적 조직문화에 대한 갈망_ 성연주
⑥ [협업‘행간行間’: 문화정책의 유행] 청년문화부터 지역문화 정책까지, ‘○○ 하는 사람’을 찾아서_ 김태윤
 
 

지난주의 일이다. 한 문화재단에 심사를 하러 가서 담당자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 지역은 문화 거버넌스가 활발히 운영되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우리의 대화는 거버넌스로 이어졌다. 지역문화 거버넌스의 근황과 고민을 잠깐 이야기하던 중 담당자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저희 과장님은 모든 걸 거버넌스로 하세요. 모두의 의견을 다 물어봐야 하고, 존중해야 하고, 작은 일도 그냥 다 거버넌스예요.. 그게 좋은데, 또 힘들기도 해요.”

 

이 말을 듣자마자 , 뭔가가 잘못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거버넌스 담론을 옆에서 지켜보며 감각했던 불안감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재단 직원의 표현처럼 수평적, 자발적, 민주적, 참여적 등 모든 좋은 말이 현재 문화정책 장에서 모두 거버넌스로 수렴되는 상황에서, 이 주제를 한번쯤 짚어봐야겠다 다짐했다.

 

문화(정책)거버넌스는 왜 이처럼 큰 유행의 개념으로 자리 잡게 되었을까?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문화거버넌스이다, 또는 무엇을 문화거버넌스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유행의 시작을 추적하기

 

우리가 어떤 개념을 탐구할 때 가장 손쉬운 접근은 역사적으로 개념의 탄생과 계보를 좇아보는 것이다. 한국 예술계에서 최초의 거버넌스로 어떤 사례를 말할 수 있을까? 필자의 견해로는 2005년 출범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예술위)가 문화거버넌스의 모태라고 생각된다. 위원회(committee)라는 이름이 증명하듯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대표적인 민관 협력 조직이다. 2년의 임기를 가진 10여 명의 민간 예술인은 공공정책 수립에 관여하며 예술위의 핵심 의사결정, 특히 예산 수립 및 실행에 관한 권한을 가진다. 나혜영(2023)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다양한 소위원회까지 거버넌스의 일부로 분석한 바 있는데, 만약 여기 참여하는 예술인까지 포함하면 한 기수의 거버넌스 참여자 규모는 30~50명 수준으로 늘어난다.

 

그러나 한국의 학술 장에서도, 예술현장에서도 거버넌스를 말할 때 예술위를 참조점으로 삼는 일은 많지 않다. 예술위를 기반으로 문화거버넌스의 특성을 비교 분석한 연구가 몇몇 있지만(한승준 외, 2012; 박치성 외, 2017), 대부분 지역 또는 축제 거버넌스에 관한 연구이며(문태현, 2005; 성연주, 2022), 최근 문화도시사업이 전국적 이슈가 되면서 더욱 문화도시사업에 기반한 지역거버넌스와 시민 참여에 관한 연구가 많다(홍성태·정종은, 2022). 한편 예술현장의 거버넌스 담론은 지역, 축제에 더해 지역문화재단의 특정 사업을 기반으로 한 거버넌스로까지 뻗어나간다. 이를테면, 서교예술실험센터, 예술청, 청년예술청, 생활문화거버넌스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지역문화재단의 사업파트너 및 동반자로서 예술가나 시민을 호명한 거버넌스를 놓고 어떻게 이 거버넌스를 활성화할 수 있을지 수많은 포럼과 심포지엄이 열린다.

 

이렇게 봤을 때 대략 한국 예술계에서 거버넌스 유행의 시작은 2013~14년 즈음으로 볼 수 있다. 2014지역문화진흥법제정 이후 전국적으로 설립된 지역문화재단, 이런 재단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지역축제, 공간 및 사업, 그리고 여기에 결합 및 연계되는 예술가와 시민이 현재 한국 문화거버넌스 담론의 주요 구성 요소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즈음에서 필자가 박사논문 작성 당시 진행한 인터뷰의 단편이 떠오른다. 한 지역문화재단 대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지역문화재단은 반드시 지역의 예술가를 기반으로 해야 해요. 예술가의 지지를 얻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

             지역문화재단의 성패가 갈린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전 그걸 거버넌스로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개념의 정착: 서교와 성북

 

그런데 필자가 2013~14년을 유행의 시작으로 명명하는 이유는 단지 지역문화진흥법제정 때문만은 아니다. 이 당시 현재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두 개의 기념비적인 거버넌스가 태동하는데, 서울문화재단 서교예술실험센터의 공동운영단(이하 서교)’과 서울시 성북구 기반의 공유성북원탁회의(이하 공탁)’가 그것이다. 두 거버넌스는 각각 공간과 지역 기반이라는 점에서 자칫 달라보일 수 있지만, 상당 부분 많은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두 거버넌스의 구조, 기능, 특성, 역할 등이 현재 한국적 문화거버넌스의 전형적 개념으로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민간의 조직적 구조로 보았을 때 두 거버넌스는 불특정 다수의 예술가 지지 그룹소수의 운영 그룹의 두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서교는 홍대 앞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예술가들의 자발적 모임이 큰 계기가 되었으며 여러 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홍대 앞을 사랑하고 큰 소속감을 가진 예술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했다. 공탁 또한 대학로 인접지로서 여러 장르 예술가들의 활동지이자 서식지라는 특수성이 성북 예술가들을 연대하게 하는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만약 소수의 운영 그룹이 자신들의 권력을 기반으로 독단적인 운영을 한다면 거버넌스 체계는 흔들리기 쉽지만, 다수의 예술가 그룹이 유연하고 즉각적으로 소수의 운영 그룹과 소통하고, 소수의 운영 그룹은 이런 지지를 기반으로 더욱 내적 친밀성과 동질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활동하여 거버넌스는 내적(intro), 외적(outro) 사회적 자본을 강화해나갔다(성연주, 2021).

 

한편 두 거버넌스 모두 협력적인 공공 파트너가 존재했고, 그런 점에서 이상적 민관협력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서교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취임 직후 홍대 앞 예술씬 활성화의 맥락에서 만들어진 민관협력TF가 공동운영단의 설립을 도모하였을 뿐 아니라, 운영 초기 담당한 서울문화재단의 직원이 참여 예술가에게 상당한 자율성과 독립성을 부여하였기에 지금과 같은 서교의 조직문화가 형성될 수 있었다. 공탁 또한 기초자치단체 차원에서 마을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영배 전 구청장의 리더십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직접 공탁의 월 정기행사에 참여하여 예술가와 지자체 사이의 가교 역할을 자처하였고, 그런 리더십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성북문화재단의 역할 및 기능이 성북구 내에서 높이 평가받을 수 있었다.

 

더불어 각 거버넌스가 설정했던 목표의 명확성,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가시적인 성과 도출 또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서교의 경우 당시 두리반을 거점으로 한 홍대 앞 예술인 연대 활동이 홍대 로컬리티의 사수라는 공공의 의제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공탁에서는 지역활동에 기반한 예술인의 활동이 하나둘 성과로 이어지면서(ex. 미인도라는 민관협력형 지역거점 공간의 탄생 등) 거버넌스에 기반한 실험과 시도를 연속해서 가능하게 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거버넌스의 범람

 

2013~14년 초기 세팅의 단계를 지나 본격적인 문화거버넌스 범람의 전환점은 2017년 무렵으로 보인다. 서울문화재단에서는 <생활문화거버넌스25>, 지역문화거버넌스 조성 사업인 <N개의 서울>2017년에, <예술청 기획단>201812월 조직되었다. <예술청 기획단>201911월부터 <예술청 운영준비단>으로 변모하여 2021년 예술청 공식 개관으로 이어졌고, 다른 한편 2019년 중반부터 청년예술인 거버넌스의 필요성에 대한 담론이 제기되면서 2019년 말 <서울청년예술인회의> 출범, 2020<청년예술청>이 개관하였다. 서울 외 지역에서는 주로 문화도시사업 추진과 관련한 공론장 조성 등의 형태로 민관협력 또는 거버넌스가 논의되었으며, 이밖에도 청년’, ‘생활문화등 새롭게 기획된 정책 영역에서 주로 거버넌스가 조직화되었다.

 

이 시기 주목할 만한 특징은 주요 문화기획자 또는 문화행정가를 통해 스필오버 효과(spillover effect)가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서교의 담당 매니저는 이후 청년예술청을 거버넌스 중심 공간으로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공탁의 주요 운영진은 이후 서울문화재단 전반의 사업, 특히 예술청 운영준비단이 꾸려지는 데에도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문화거버넌스 확장은 어떤 명문화된 규범, 가이드라인 또는 시스템과 체계에 기반한 것이라기보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며 경험, 노하우, 암묵지를 전수 및 전달하는 조직문화적 관점이 큰 부분을 차지하였다.

 

또한 서교나 성북의 초기 모델에 비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세분화된 사업 중심의 개별 거버넌스가 형성된다는 점 또한 주목해 볼만하다. 이를테면, <청년예술청>서울청년예술인회의’, ‘라운드SAPY’, ‘None’이라는 세 개 사업의 개별 거버넌스가 독립적으로 조직 및 운영되었으며, <예술청> 내에서도 운영위원 중심 거버넌스 외에도 개별 사업을 거버넌스 방식으로 예술인을 추가 모집해 운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지역문화진흥원의 <생활문화 동호회 사업>에서도 이 사업 중심으로 전국의 각 지역마다 개별 거버넌스가 형성되는 것을 사업의 주된 목표로 삼고 있다.

 

요약해보면 세분화사업화를 통해 거버넌스 확장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확장의 과정에서 상술했던 한국적 문화거버넌스의 표준이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려웠다. 왜냐 하면 어떤 사업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다수의 지지 그룹의 기반 보다 공공의 필요성이 보다 핵심 요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업형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같은 지향이나 공감대를 가지고 공동의 문화를 만들기란 요원한 일이었고, 필자가 참여한 <서울청년예술인회의> 거버넌스에서도 실질적 거버넌스가 가능하기 위한 공감대, 즉 공동의 목표를 가상적으로나마 설정하기 위한 노력이 가장 컸다. 가상의 서울 청년예술인을 설정하고 이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단계와 다시 추상적 수준에서나마 공동의 목소리를 모으고 공론화하는 작업이 필자가 추진했던 <청년예술을 폐기하라>라는 연구릴레이였는데, 보이지 않는 목소리의 연결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거버넌스라고 볼 수 있을지 여부에 대해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던 작업이었다.

 

 

비장르 중심 사업들

 

그럼 이제 이 글의 질문으로 돌아가보자. 한국 문화예술계에서 지난 10년간 왜 거버넌스가 이토록 유행의 개념으로 자리하였을까? 필자는 이를 조직문화적 관점에서 설명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상술한 것처럼 문화거버넌스의 정의, 기능, 운영 방식 등에 대한 논의는 구체적으로 담론화된 적도 없고, 체계화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문화거버넌스의 운영은 거버넌스라는 조직 운영 방식을 경험해 봤거나 익숙한 소수의 문화기획자의 연륜과 노하우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노하우는 많은 경우 아우라, 분위기, 태도, 성향 등의 개념으로 설명되었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오랜 관습이자 조직문화는 장르주의, 위계적 관계, 도제식 창작 문화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2010년대 이후 문화정책이 사회정책과 접점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인들은 이 관습이 전통이 아니라 악습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바로 이 지점에 거버넌스가 위치한다. 예술의 사회적 가치나 공공성을 중시하고 예술이 더 사회로 나아갈 것을 주창하는 2010년대 이후의 새로운 정책 어젠다 아래에서 낡은 조직문화는 더욱 대조적으로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거버넌스를 통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대화의 자리, 바로 이 자리가 민-, -, -재단 등 다양한 층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확장하면서 우리는 새로운 조직문화로의 전환을 상상해 보게 된 것이다.

 

또한 거버넌스의 범람은 사업적 측면의 변화와도 연결되었다. 장르주의를 타파한다는 면에서 거버넌스는 여러 장르가 융합되거나 장르를 초월한 새로운 주제 중심의 사업을 의미했고, 실제로 거버넌스 조성이 장르 창작 중심 사업보다 지역문화, 생활문화, 청년, 도시, 공간 등 비장르 중심 사업에서 활성화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우리에게 거버넌스는 그런 측면에서 곧 민주성, 민주주의, 또는 민주적인 무엇이었다. 장르 안에서의 민주적 소통, 장르를 넘나드는 민주적 운영 방식, 새로운 주제를 가능하게 하는 민주적 가치체계라는 이름 아래 우리는 거버넌스를 경험해왔고 감화되어 왔다.. 그렇다면 이제는 거버넌스의 체계, 시스템, 구조, 규범에 대한 더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거버넌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필자는 이 글을 작성하며 상술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와 거버넌스의 문제, 즉 거버넌스 모델의 하나로 위원회를 잘 떠올리게 되지 않는 현상에 대해 나름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필자는 7기 위원회에서 운영했던 정책혁신소위원회에 2년 간 참여했었는데, 내가 거버넌스에 참여하고 있다는 효능감과는 별개로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에서도 장르이기주의라거나 장르의 폐쇄성이 발휘될 수밖에 없었는데, 결국 아무리 구조가 거버넌스이더라도 조직문화 관점에서 수평적, 민주적 문화를 경험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이를 거버넌스라고 부르지 않는 것 같다.

 

최근 한국 문화예술계는 오히려 거버넌스를 지우고 거세하는 방식으로 회귀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말 삭제되는 대상은 무엇일까? 민주적인 조직문화일까? 민과 관의 개방적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운영의 방식일까? 민과 관이 함께 만나는 대화의 자리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공동의 목표에 대한 불신과 갈등일까? 물론 거버넌스를 가능하게 하는 조직문화는 많은 학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거버넌스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Ansell & Gash, 2008). 그러나 조직문화를 포함한 문화거버넌스의 구성 요소와 메커니즘에 대한 보다 총체적인 접근이 이루어질 때, 우리가 좀 더 거버넌스를 어떤 정치적, 감정적 구호가 아니라 운용 가능한 조직 구조의 하나로 접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서울문화재단 예술연구활동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발행합니다.

 

 

참고문헌

Ansell, C. and A. Gash. 2008. “Collaborative governance in theory and practice.” Journal of public administration research and theory 18(4): 543-571.

문태현. 2005. “지역혁신을 위한 문화정책거버넌스의 성공요인분석.” 한국행정논집 17(2): 337-359.

박치성 외. 2017. “문화예술지원체계 네트워크 거버넌스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정책학회보 26(3): 271-307.

성연주. 2021. “무엇이 지역문화 거버넌스를 활성화하는가? 네트워커의 역할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

성연주. 2022. “지역문화 거버넌스의 형성과 민관의 동상이몽.” 문화와 사회 30(2): 7-57.

한승준 외. 2012. “문화예술지원 거버넌스 체계에 관한 비교 연구.” 행정논총 50(2): 257-291.

홍성태, 정종은. 2022. “시민 거버넌스와 도시 브랜딩의 융합.” 현대미술학 논문집 26(2): 149-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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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연주.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으며, 문화정책연구모임 행간의 멤버로 활동 중이다. 주요 관심 분야는 예술의 경계와 예술인의 정체성이다.

 

문화정책연구모임 '행간行間'. 문화정책을 함께 공부하고 있는 젊은 연구자들의 다학제적 연구모임이다. 문화정책씬 내의 연구 담론이 공론空論-논쟁과 응답의 부재- 시절에, 학술장의 유령으로 남지 않겠다며 공론公論-함께 논쟁을 통해 의미를 매개하기-을 시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