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

[협업: 지역예술 거버넌스, 미디에이터(mediator)의 관점으로 바라본 한계와 가능성]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나

CP_NET 2023. 11. 21. 14:25
편집자 주: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정책 현장의 다양한 연구진, 필진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협업'을 운영합니다. '협업'은 참여하는 연구진, 필진들이 독립적으로 기획 진행하고, [문화정책리뷰]는 발표를 돕습니다. 문화예술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다양한 담론 작업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글을 쓰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동안 써온 글 중 가장 오랜 시간 망설였던 것 같다.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보니, 20여 년 동안 익숙하게 지녀온 실연자의 정체성이 코로나를 기점으로 예술정책과 문화예술기획 활동을 이어오는 과정 속에서 미디에이터(mediator)’로 확장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미디에이터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 사이에서 공동의 가치를 이루기 위해 매개하고 중재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다 보니 무대가 아닌 예술현장 전반에서의 경험이 쌓일수록 예술인 중심의 관점으로만 판단해 오던 가치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긴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난 후에 문장으로 정리해 놓은 터라 단순해 보이지만,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된 가운데서 갈등을 풀기 위해 동분서주한 시간은 무척 괴롭고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돌아보면 중재와 타협의 치열한 실전 경험은 예술생태계 내 객체들의 유기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지역예술 거버넌스를 중심으로 예술현장을 바라보는 미디에어터의 관점에서 그 한계와 가능성을 정리해 보았다.

 

 

1. 문제의 발견: 코로나와 현장소통소위원회

 

코로나가 창궐한 2020, 20년 넘게 연주자의 삶을 이어오던 나에게도 어김없이 재난은 찾아왔다.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모든 예술인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예술가로서 맞이한 가장 큰 변화라면 공연예술 현장에서만 바라보던 관점이 예술정책의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예술가의 열정만으로는 결코 생존을 해결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정책과 제도라는 것을 뒤늦게 경험하고 난 후, 간절한 마음으로 빠져들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예술과 교육 현장에서 예술인들에게 정책과 제도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는지 심각한 문제의식 또한 느꼈다. 처음에는 SNS상에서 접할 수 있는 정보를 습득하고, 할 수 있는 만큼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몇 달 정도 꾸준히 활동을 하다 보니 몇몇 전문가와 정기적인 소통을 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문예위)를 비롯한 예술정책 기관 및 단체들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2020, 정식 공모를 통해 아르코 현장소통소위원회(이하 현소위)3기 위원이 되었다.

 

현소위에서 보낸 2년의 시간은 무대 바깥세상의 예술 생태계에 대해 많은 경험을 쌓기에 충분했다. 다양한 사연을 가진 예술인들과 직접 대면하며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구조였는데, 주로 현장에서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한 이슈를 다뤘다, 이 과정에서 거버넌스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직접 관찰할 수 있었다. 분명한 기억은 현소위 위원 대부분이 장르를 막론하고, 어려움에 처한 제안자(현장 예술인)의 상황과 입장에 (같은 예술인으로서) 진심으로 공감했으며, 진행을 책임지는 매개기관인 문예위의 담당 직원 또한 자신의 일처럼 임했다는 점이다. 일례로 하나의 사건에 대해 불합리한 문제를 정면으로 공론화를 해나갈지 아니면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를 이끌어낼지를 두고 예민한 상황이 있었는데, 문예위 담당 직원은 사실관계와 입장 파악을 위해 지방을 마다않고 수차례나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 시간을 쏟았다. 이 경험은 기존에 갖고 있었던 정부기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 계기가 되었다. 그 직원 또한 예술 현장 한복판에 서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술의 현장에는 실연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실연자 외 역할이 결코 보조적이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하게 되었다.

 

 

2. 바벨탑의 허상: 지역예술 현장의 거버넌스와 민관협치사업의 진입

 

코로나라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며 절망과 간절함 사이에서 3년을 보냈다. 예술가의 눈으로 바라본 정책과 제도 그리고 지역예술 현장은 그야말로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잘 작동하느냐에 따라 예술인들의 창작환경뿐 아니라 생존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화분권의 기조로 인해 거버넌스는 가장 무겁게 다뤄진 현안이었는데, 대전·충남 권역에서 시작해서 제주까지 이어지는 현소위 지역간담회에서는 거버넌스가 예술인들의 삶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칼럼] 예술위 현장소통위 지역간담회) 지역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현장에서 느껴진 분위기는 위기감이었다. 특히 문화와 정서에 따라 서로의 이해와 공감이 부족한 지역일수록 경계심이 확연히 느껴졌다. 거버넌스는 예술인에게는 창작환경을 위한 지원 제도의 형태로 비추어졌고, 광역 및 기초 재단 등의 기관에서는 행정 업무의 작동 원리로 인식되었다. 지역 내 각 구성원들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한 서로에 대한 신뢰보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우선으로 거버넌스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욕구를 쌓느라 무너질 미래가 빤히 보이는 바벨탑의 허상을 보는 듯했다.

 

이후 20212022년 두 해에 걸쳐서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서 거버넌스를 직접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전년도 주민참여예산을 통해 분야별로 확정된 사업을 이듬해 진행하는 우리 지역의 민관협치사업의 문화분과 실행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코로나로 발아된 예술생태계 내의 문제의식을 더욱 구체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계기였다. 하지만 나는 처음 참여하던 해부터 전년도에 확정된 사업의 내용을 대폭 수정할 것을 제안할 수밖에 없었다. 선정된 사업의 방향과 내용이 허술했을 뿐 아니라, 실행을 위한 현실적인 조건도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두 번의 제대로 된 예술행사를 치르기에도 부족한 예산으로 지역 곳곳에서 약 20회의 행사 진행하는 것으로 계획되어 있었다. 사업의 현장에서 역할을 해야 할 예술인들에게 최소한의 환경을 갖추기 어려울 게 뻔했다. 각 예술분야의 전문가로 구성된 실행위원들과 논의한 끝에 예산의 규모에도 맞고 실행환경의 적합성을 고려한 새로운 계획안을 작성해서 상위 기구에 올렸다.

 

예상대로 쉽지 않은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존의 협치사업은 의사결정구조가 면밀히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변경 안건에 대한 논의 절차는 전체 사업 일정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업 변경의 이유를 이해시키는 과정 또한 민관협치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어려웠다. 분과위원회라는 상위 기구는 실행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지역에서 활동해 온 다양한 주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같은 주민이지만 위계 구조로 짜여져 있는 탓에 예술의 영역에서 당연하게 취해야 할 대안을 이들에게 우선 설명하고 이들을 설득시켜야 했다.. 한 달 가까이 걸친 조율 끝에 겨우 분과위원회에서 변경안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다시 서울시에 최종 승인을 받아야 했기에 일정은 더 미뤄졌다. 당연하게도 예산을 집행해야 하는 공공기관에서는 확정되지 않은 내용에 대한 예산 사용을 거부했으며, 행사 일정에 맞춰 출연진을 섭외하고 업체와의 계약을 진행하는 일 또한 미뤄졌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공식적인 매개의 역할을 감당하는 마을협치과에서도 많이 애를 썼다. 하지만 마을협치과 자체가 독립성이 보장된 부서도 아니었기에 아무리 중재의 의지가 있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2021년 코로나 사태의 연장으로 대면 행사가 무산되었고, 비대면으로 다시 기획을 변경한 끝에 겨우 마무리되었다.

 

 

3. 면피의 기술 : 거버넌스의 기본 태도는 책임지는 것

 

다음 해인 2022년에는 문화분과의 사업에 대한 예산이 대폭 늘었다. 기존보다 3배나 되는 규모로 일을 꾸릴 수 있게 되니 모두들 전년도의 고생에 보람을 느꼈다. 상위 기구였던 분과위원에서는 회의 때마다 예산의 증액을 이유로 더 잘 준비해 주길 여러 차례 요구했다. 하지만 전년도에 채택된 사업의 내용을 살펴보니, 여전히 민관협치의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지역예술들 간의 경쟁과 주민들의 평가가 주된 내용이었다. 전체적이 방향을 주민들이 평가가 아닌 참여를 할 수 있는 내용으로 다시 제안하였고, 실행위원 그룹의 동의를 얻어 새로운 변경안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작년의 경험이 있었기에 마을협치과의 도움을 받아 분과위원회 날짜와 승인 기간, 서울시 승인 절차 등을 면밀히 살펴보며 서둘러 진행했다. 여전히 과정은 소모적이었고 불편함도 많았지만, 작년보다는 능숙해졌음에 위안을 얻은 것도 잠시, 신임 구청장 선출을 앞두고 분위기를 보아야 한다는 이유로 예산 실행 기관의 업무는 한 달 이상 마비되었다.

 

거버넌스의 중요한 한 축이었던 공공기관에서 운영이 중단되니 협의체는 작동을 멈춘 채 시간을 흘려보내야만 했다. 결국 그사이에 협치 사업을 담당해 왔던 기관의 실무 담당자는 사임을 했고, 협치사업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담당자가 배치되었다. 실행위원들은 새로운 담당자를 만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과정을 모두 다시 설명해야 했고 공감을 얻기 위해 적잖은 에너지를 소모해야만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마을협치과에 있었다. 새해가 되면서 전년도에 협치를 경험했던 담당자들이 모두 바뀐 것이다. 사업의 연속성을 위해 한 명 정도는 유경험자를 두었을 법도 한데, 마을협치과의 조직이 새로운 구성원들로만 짜여진 터라 분위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나마 지역예술인으로 구성된 실행위원들 중 일부만이 전년도 사업의 분위기의 유지하고 있었다. 결국 기관의 사정으로 사업의 진행 시기는 하반기로 미뤄졌고 지역에서 가장 큰 축제와 일정이 겹쳐진 바람에 기관 내 협치사업의 우선순위 또한 뒤로 밀려났다.

 

돌아보면 내가 더 능숙했어야 했다. 문제의 시작을 감지하기도 전에 이미 흐름은 바뀌어 있었다. 담당자는 혼자 지역 축제를 도맡아야 한다는 이유로 기관의 입장을 이해해 주길 여러 차례 부탁했고 예술인들과 스탭들의 계약서 작성 또한 지역축제 이후로 미루게 되었다. 서로의 입장을 배려하는 것이 거버넌스의 기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실행위원들을 다독이며 좋은 마음으로 협조해 가던 중, 이태원 참사가 터졌다. 참사가 벌어진 지 채 몇 주가 지나기도 전에 기관에서는 갑작스럽게 협치사업의 취소를 제안했다.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거버넌스의 경험이 5, 아니 3년만 더 쌓였었어도 더 노련하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구청의 사정으로 사전에 계약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실행된 준비과정에 대한 동료들과 스탭진들에 대한 보상은 장담할 수 없었다. 두고두고 후회가 되는 날이다. 그사이 새로 부임했던 담당자는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났다. 나는 밤늦은 시간까지 다른 담당자를 설득하느라 밤 11시가 넘도록 전화통을 붙들고 하소연을 했다. 동일한 기간 안에 실행되는 다른 지역의 행사 목록을 모아서 보내기도 하고, 그동안 준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실비는 보전해주어야 하지 않겠냐고 읍소했다. 협치사업인데 왜 내가 설득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때는 그 방법이 최선이었다.

 

 

4.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현장에서 예술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사업은 결국 1/10보다 조금 넘어선 예산으로 형태만 남게 되었다.(“[아카이빙] 강동구 민관협치사업 문화분과 <이스트 웨이브(EAST WAVE)”) 한 해 동안 수십 번을 모여 치열하게 토론했던 시간들이 무색하리만큼 사업은 보잘것 없이 초라해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냥 묻기엔 정성을 들인 일이라 기록으로 남기자고 의견을 모았다. 한편에서는 그럴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하며 체념의 목소리도 들렸다. 애꿎은 새로운 담당자에게 나만 아쉬운 거냐.. 다 함께 시간 내어 한 해 농사를 지었는데, 이리된 게 전혀 아쉽지 않으시냐며 반문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연신 죄송하다는 말로 메아리쳐 돌아오는 목소리에 더 이상 따지지는 못했다. 한 달 가까이 상실감에 싸여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전에 계약서를 강하게 요구했어야 했다는 자책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행정기관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지혜로운 대처를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점도 몇 가지 있었다. 위계 구조 안에서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나마 같은 주민 구성원으로 의지해왔던 분과위원회가 임기가 끝났다는 이유로 중도에 해체되었다. 단톡방에 있는 다수의 분과위원들은 무심히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상위 기구가 없으니, 안건을 승인받을 수가 없었고 서울시 승인을 받을 수 있는 방법도 사라졌다. 결국 그날까지 정해진 내용으로만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분과위원은 왜 선출하지 않는지 의문이 들 때쯤, 신임 구청장 취임 후에 마을협치과가 해체된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결국 기정사실이 되었고, 연말까지 임기를 마치면 떠나야 하는 마을협치과의 담당자는 회의 때마다 풀이 죽은 모습으로 위로를 받아야 했다. 결국 우리의 거버넌스는 아무도 책임지 않는 빈 껍데기로 버려졌다.

 

거버넌스는 책임을 서로 나누는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한쪽에서 회피하는 태도로 바뀔 경우, 그 부담은 나머지 구성원이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주민이라면 그 사업은 관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며, 공공기관일 경우 주민들의 경험과 역량에 따라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결국 거버넌스의 성공은 지역사회의 주체가 되는 주민들의 이해도와 실행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생각이다. 무엇보다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예술인이 많아져야 한다. 예술정책에 관심이 있는 예술인이 많아져야 현장에 맞는 정책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지역문화에 대한 경험과 이해가 충분해야 그 기반이 튼튼해질 것이다. 이것은 예술창작의 현장뿐 아니라, 예술교육의 근간을 이루는 데에도 무척 중요하다. 짧지만 강렬했던 2년 동안의 거버넌스 경험을 통해 예술이 지역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거친 들판에 나무 한그루를 심는 것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 한 사람 잘 심어간다면 언젠가는 푸른 숲을 이루리라 끝까지 기대하며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지원사업으로 기고되었습니다.

 

 


이건명. 예술기업 ‘설탕한스푼’ 대표, 비영리 프로젝트 슈가스퀘어공동대표. 25년간 해금을 연주해 왔지만,, 코로나를 기점으로 예술정책과 지역예술거버넌스를 화두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예술작품보다 예술가의 삶에 무게를 둔다. 물질주의·성과주의에 반대하며 예술가의 예술가됨을 지지하는 문화운동가·기획자·비평가 그리고 해금 연주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