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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한국 예술지원조직의 오랜 문제들 ②

CP_NET 2023. 4. 17. 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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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이나 제도는 그 자체가 현실의 변화를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역사적 산물이기도 하다. 시대적 흐름과 현실의 배경은 정책과 제도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동인이 되기도 하고 어떤 정책을 강제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문예진흥원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로의 전환은 시대적 과제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결과로 입증되지는 못하고 있다. 그 이유 역시 이런 측면, 제도와 현실이 부딪치고 관계 맺는 과정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국가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한국의 예술지원제도는 나름의 시대의 요구에 부응했음에도 지나치게 정부 중심의 시스템으로 작동했고 그 제도가 만들어졌던 시대가 갖고 있던 비민주성과 관료중심, 정부선도성의 문제를 내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0년대 후반 이후 끊임없이 개방적이고 자율적인 시스템으로의 변화를 요구받았고 그 결과가 아르코로의 개편이었다. 그러나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대만큼의 긍정적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있다. 그 원인을 고찰해 보면 한두 가지 이유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들이 존재한다.

 

사회가 없는 예술계

 

가장 주요한 원인은 솔직히 제도 바깥에 있다. 바로 한국의 현대 예술, 혹은 예술계 자체가 형성되어 온 과정과 그 결과의 문제다. 회고적이거나 너무 옛날 얘기를 다시 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이 부분을 살피지 않으면 한국의 예술 분야에서 왜 거버넌스 지향의, 혹은 자율적이거나 자발적인 논의를 전제로 한 지원구조가 잘 안착되지 못하고 있는가를 얘기할 수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이 부분을 다시 언급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매우 불편한 소리겠지만 한국에서 당대까지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예술계는 급변하는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급조되면서 형성된 측면이 강하다. 우선 현재까지 이어지는 근현대 예술의 역사 자체가 매우 짧다. 물론 과거에 한국에 예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예술계와 이어지는 흐름은 최소한 1900년대 이후이고 불과 100년이 조금 넘은 역사다, 그런데 그 짧은 시기 동안 식민지시대, 엄청난 규모의 전쟁, 분단 상황을 겪으며 어떤 정상적인 공론장이 도저히 형성될 수 없는 상황이 거대하게 놓여있었다. 사실상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예술계는 전쟁과 분단을 겪은 이후인 1950년대 초반부터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의 단절과 혼란은 예술의 미학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예술계가 하나의 사회로 형성되는 데에도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1962년에 출범하여 현재까지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는 단체로 남아있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와 대한민국 예술원이다.

 

앞으로 결성될 협의기구인 가칭 예총은 결코 어용기관의 생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하며 또한 그 운영도 하향식이 아니라 상향식, 또는 순정한 협의기구여야 한다”, “새로 조직될 단체에 대하여 정부는 재정적으로 원조할 것을 바라는 동시에 그 운영만은 문화인들에게 내맡겨 간섭하지 않을 것을 바란다얼핏 진보예술인들의 발언 같지만 이 말들은 예총 출범을 앞둔 196112월 말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유선 한국음협이사장과 대표적 보수문인이었던 소설가 김동리 씨의 발언이었다. 5.16 이후 그때까지 존재하던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문총)를 해체되고 군사정권이 예술분야 각 단체를 인위적으로 통합시켜 예총을 만들었던 것은 결코 예술계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군사정부는 명분이 있었다. 난립하는 예술단체로 인해 벌어지는 복잡한 예술계 이해관계와 문제점을 정리하고 지원 창구를 단일화하여 한국예술계를 부흥시키겠다는 것이었다. 그 명분이 아주 근거가 없던 것도 아니다. 전쟁과 분단을 겪은 한국 예술계는 해방공간에서부터 반공과 순수예술이라는 기치 아래 형성된, 당시의 젊은 우파예술인들 중심으로 판이 짜여졌던 셈인데 호불호를 떠나 그 기득권을 유지할 만큼의 미학적인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고 그 내부에서의 균열도 심각했다. 문학 분야의 예를 들자면 김동리, 조연현, 서정주로 대표되는 문협파가 주류라고 볼 수 있었지만 좀 더 친권력적 성향, 즉 어용이라고 볼 수 있던 조연현과, 비록 강경한 반공주의자로 분단 상황에서 한국 문단의 보수로서의 대표성을 갖고 있었지만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는 자유롭고자 했던 김동리 계열의 갈등이 매우 심했고 기본적으로는 우파 성향이었지만 이들보다 앞선 세대이며 다분히 중도적이고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백철 등의 팬클럽한국위원회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이어령을 시작으로 창작과비평”, “문학과지성” 등으로 대표되는 4.19세대 문학인들이 20, 30대의 젊은 나이에 매우 빠르게 문학계의 중심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 주류 예술계의 얄팍한 깊이와 권위 없음이 근본적 원인이었다.

 

이제 와서 할 수 있는, 사후적인 주장이지만 당시 한국 예술계에게 처해졌던 혼란상과 아노미는 예술계 내부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는 외부적인 원인에 기인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상황에서 근대국민국가를 어떻게든 빠르게 만들어야 했던 정부는, 다른 모든 분야가 그렇듯 매우 직접적으로 국가가 개입하는 방식으로 예술계를 규범화하려 했다. 이승만 정부 시절 만들어진 대한민국 예술원이 그 시작이었다면 군사정부가 주도한 예총으로의 예술계 통합 시도는 가뜩이나 기반이 망가져 있고 난립하고 있던 예술계가 자율적인 내부 경쟁과 소통을 통해 스스로의 룰을 만들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대신, 정치권력의 변동에 따라 주도권이 오고가는 타율적이고 기생적인 집단으로 의사소통 방식이 굳어지게 한 셈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사실상 정치권력이 예술계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매우 미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 사태 같은 돌출적 사건이 다시 등장하는 것은 한국에서 예술 분야와 정치권력의 관계 맺음이 갖고 있는 뿌리 깊은 관행과 정서, 즉 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문제이다. 과거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오로지 한국과 필리핀에만 존재하는 분야를 막론한 예술인들의 연합단체로 만들어진 예총이나 그 예총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민예총이란 구조는 개별 단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정부 수립 이후 한국 예술계에 작동해 온 정치권력의 과도한 개입과 그 영향의 산물인 셈이다. 스스로 내부적 권위를 형성하지도 못했고, 권력과 어느 정도 대등한 협상 능력을 형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자율적 지원기구가 주어졌던 것이 2005년의 상황이었다.

 

 

관료집단의 이해

 

예술계 내부만 문제적 상황이었던 것은 아니다. 정치권력과 정부,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분야 전문관료집단이 이러한 상황에 대응했던 방식도 문제였다. 문화분야 전문관료집단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성장하면서 정책 전달체계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한국 예술계가 내부적으로 자율적 컨센선스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힘든, 그런 종류의 훈련이 매우 미흡한 집단이란 것은 자명했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교한 이행기 정책이 필요했다.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혹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예술계는 정책 현안에 대한 자율적 시도를 경험하는, 자원의 전달과 배분을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실패와 성공을 경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필요했다. 그런 작은 실험의 축적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했다면 최소한 아르코 전환 초창기에는 협의형 지원기구로서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시간적 배려와 인내심이 필요했다. 어차피 아르코 전환 이후 예술계에서의 대혼란은 예상되어 있었다. 1960년대 초반 이후 40년 이상 국가권력의 힘에 의해 강제로 억눌려져 있던, 오랫동안 묵혀왔던 엄청나게 뿌리 깊은 종기가 터져 나올 것은 자명한 것이었으니까 말이다. 약간 거칠게 표현하자면 1962년 예총 통합의 명분이 예술계 혼란과 난립 상을 해소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계속 수면 아래 있다가 2005년부터 터져나온 셈이다. 예측이 안 되었던 것이 절대 아니고 당연히 거쳐가야 할 부분이었다.

 

문화분야 전문관료집단들도 예측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골치 아픈 문제를 정면으로 해결하는, 지난하고 어려운 길을 택하지 않는다. 부처(문화체육관광부)에는 급증하고 있던 예술지원정책에 관련한 다양한 의제들이 있었고 이를 효율적이고, 어떤 불편한 덜컹거림 없이, 일정하게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며 원활하게 해결할 수 있는 수행 중심의 에이전시 기구가 외부에 필요했다. 가뜩이나 위원회 시스템으로의 전환 때문에 대혼란이 예측되는 데다, 꽤 오랫동안 예술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쳐왔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자기 관성이 생겨버린, 매우 복잡한 역학관계에 놓여있던 문예진흥원-아르코는 부처가 순발력 있게 쏟아지는 정책사업을 넘겨줄 수 있는 유능한 에이전시 집단으로서는 비춰지지 않았을 것이다. 부처 입장에서는 초기부터 아르코를 매우 부담스럽고 불안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강했다. 그런 맥락에서 2003년 이후 2010년대까지도 계속 설립되고 있는 다양한 문화부 산하 중간지원기구들(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지역문화진흥원,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등)의 설립 러시는 각각의 필요성과 명분에도 불구하고 부담 없는 수행 에이전시 기구에 대한 관료집단의 선호가 작용했던 측면이 강하다. 그것은 아르코 전환이 이루어지고 예술경영지원센터나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막 설립되었던 2000년대 중반 이런 예술지원기구들의 횡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매우 많은 자리에서 수차례 제출되었음에도 전혀 그것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그런 에이전시 기구들이 재정부처나 의회로부터 수차례 사업의 중복성이 있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기관 고유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각종 부처 사업들을 주는 대로 받아서 수행하고 있는지난 과정에서도 또 다른 단서가 발견된다. 이런 식으로 지난 20여 년간 실타래는 더 많이 꼬여버렸고 이것을 과연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솔직하게 명확한 해법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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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화예술진흥법 문예진흥5개년계획 신공공관리행정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