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 한국 예술지원조직의 오랜 문제들 ①

CP_NET 2023. 3. 13.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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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가 최근 새로운 위원들과 위원장을 뽑았다. 다양한 인상평과 예측이 있지만 일단 잘하기를 기대해 본다..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한 번도 어렵지 않은 적이 없었던 한국 예술계의 구성원들을 위해서 말이다. 무엇보다 아르코가 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이 사회에 유의미한 것인지에 대해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입증해 주길 기대한다.

 

 

50년 전, ‘민간 자율’ ‘기금 안정

 

아르코의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하 문예진흥원)1973년 설립되었다. 바로 그 전년도인 1972년에 그 기반이 되는 문화예술진흥법이 제정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문예진흥기금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제도(법률), 기구, 재원이 한 세트로 만들어진 셈이다. 다른 많은 제도들이 그렇지만 이런 계획이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많은 자료가 남아있지도 연구되어있지도 않은 편이지만 한국에서 정부 주도의 예술지원정책이 언론 지상에서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대강 1971년 경부터이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오랜 전신인 문화공보부와 당시 국무총리인 김종필이 문예진흥5개년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하며 전통문화를 중심으로 한 민족문화예술을 정부 주도로 지원하는 방안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 이 시기였다. 당시 정부(문공부)의 정책 방안은 19719월 문공부 등이 아카데미하우스에서 주최했던 정책방향 발표와 민간의견 수렴 자리에서 드러난다. 당시 윤주영 문공부 장관이 기조연설에서 직접 문예진흥5개년계획의 초안을 발표했는데 골자는 크게 3가지로 소개되고 있다.

 

우선 첫 번째는 국가의 문화정책을 국가 전체의 개발시책, 즉 요즘 표현으로 국정운영방향과 큰 틀에서 상호연관시켜 장기적 계획을 세우고 타 분야의 계획과의 조율을 통해 5년간 중기적 계획을 세울 것을 천명했다. 개발주의가 전면화되어 있던 시대의 조류가 느껴지긴 하지만 통합 지향의 문화정책을 내놓았다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이다. 두 번째는 민족문화와 전통사상, 전통문화의 정립 발전과 외래문화의 정수를 섭취하여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세 번째는 이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에 관한 것인데 당시 표현으로 조장지원으로 그 역할을 한정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원이란 표현은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익숙하지만 조장이란 표현이 다소 낯선 데 도와서 자라게 한다는 의미로 조력이란 의미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요약하자면 문화정책을 분야정책이 아닌 국가 전체의 운영의 일부로서 계획적으로 추진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여기에 대해서 정부는 주도자가 아닌 조력자로서 지원을 맡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기조 하에 구체적인 추진방향으로 첫째, 문화예술창작기금을 마련하며 문화예술진흥법 등 제도를 만들고, 둘째, 예술저변을 확장시키기 위해 창작문예물의 균형 있는 전국적 보급과 국민대중의 예술활동 폭을 넓혀주는 지원사업추진, 셋째 문화와 공보를 분리하는 방향으로의 정부 기능 재편성과 문화예산비중의 향상 등을 연구과제로 내놓았다. 50년 전 정부 발표이지만 근래의 정부 입장과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이런 입장에 대한 민간 문화예술계의 반응은 어땠을까? 민간의 패널로 나섰던 곽종원 건국대 총장(문학평론가)은 예술 각 분야의 질적 향상 도모, 예술의 국제적 진출 도모, “안보에 저촉되지 않는 한창작의 자유 보호, 창작 기금 내지 금고 설치, 소극장 운동 지원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홍이섭 교수(사학자)시급히 어떤 안의 강행보다 장시간에 걸친 자유로운 개인의 창조적인 성과를 효율적으로 선용할 방안을 강구할 것을 제기하며 식민지적 의식의 정리, 문화유산의 보존, 민족정신의 역사적 추구 등의 기초적인 방안을 수립하고 인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특히 대학, 개인 또는 전문연구소에서 자유롭고 창조적이고 공정하게 문화정책을 조사연구하게 하고 이를 통해 인적 자원을 생성하는데 기본방향을 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기사로만 접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전모를 알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문화예술정책을 위한 제도를 만들고 기구와 예산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 없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지만 민간의 두 패널이 공통적으로 자유를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부 주도의 문화예술지원정책 추진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우려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아주 초기부터 발견되는 지점이다.

 

꽤 길게 옛날 얘기를 끄집어낸 이유는 문화예술지원정책 추진에 대한 관점의 차이와 논쟁이 아주 초창기부터 늘 일정한 틀 안에서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정부 측에서는 늘 강력한 제도와 예산 투여 등 힘 있는 추진을 통해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하게 존재하고 민간에서는 자칫 그런 과정에서 다양성이나 자율성이 무시되거나 훼손될 수 있기 때문에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자율적이고 개방적인 방식으로 민간의 역량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입장이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해(1971) 11월에 나온 문화예술진흥법 초안에 대한 민간의 반응도 마찬가지인데 법 초안에서 추진기구인 문예진흥원이 지나치게 정부중심이란 의견이 꽤 많았다. 백철 팬클럽위원장(문학평론가)외국의 경우는 정부가 하는 것은 재정지원일뿐 다른 모든 것은 자율적으로 맡기고 있다”라고 해외의 예를 들며 진흥원의 구성 내지 성격은 순수 민간예술단체가 되어야 하며 진흥위원회의 위원선정 등에 객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문화예술진흥법안 대로라면 주체가 정부인 점은 재고할 여지가 많을 것이란 우회적 비판을 하고 있다. 문예진흥원의 지나친 정부 주도성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특정 장르(문학)에 대한 편중이 심하다”(조상현 국악인), “기금 이자로 각 분야에 얼마나 도움을 줄지 의문이다”(김영중 조각가)와 같이 문예진흥원을 거쳐 아르코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논란과 본질적 지적이 아주 초창기, 아니 문예진흥사업이 시작도 되기 이전 시점부터 존재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안에도 서로 다르거나 상충되는 입장이 존재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원조직 운영을 정부관료조직(당시 문공부)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간에게 자율과 책임으로 맡겨야 하며, 이를 위해서 안정적인 재원(기금) 구조를 확보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대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여준다. 많이 들어본 얘기들 아닌가? 다름이 아니라 2020여 년 전 문예진흥원이 아르코로 전환될 때 가장 강하게 주장되었던 전환의 논리이며 최근까지도 아르코가 논란과 부침을 겪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얘기들이기도 하다.

 

 

20년 전, 민주화의 민간자율성과 신공공관리행정의 민간자율성의 혼재 혹은 묵살

 

아르코가 만들어지던 20여 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아르코 전환은 2005년에 이루어졌지만 그 전환의 추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2003년 노무현 정부 초기부터의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아르코 전환이 노무현 정부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입장들도 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1970년대 초반 문예진흥원이 만들어지던 시절부터 국가 문화예술지원기구가 민간자율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늘 강하게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보자면 오랜 숙제를 풀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늘 주장되었지만 잘 이루어지지 않던 문예진흥원의 민간자율기구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 가지는 정치경제적 상황의 변화였다. 1980년대 후반 군사정권이 막을 내리고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며 특히 노무현 정부는 민간자율을 그 어느 정권보다도 강하게 국정운영방향으로 내세우고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선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의 결과였다면 경제적 측면을 보자면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사태를 겪으며 정부에서도 대대적인 구조조정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자유주의가 대세였고 정부 운영에 있어서는 이와 한 세트로 묶이는 신공공관리행정의 시대로 넘어갔다. 정부가 직접 관리하는 문예진흥원은 전형적인 전통적 관료행정의 산물이었고 구조조정 대상이었던 셈이다. 민주화의 측면에서 민간자율성과 신공공관리행정에서의 민간자율성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이 마구 혼재되어 쓰였으며 서로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묵살하고 넘어가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두 번째는 문예진흥원이 오랫동안 현장에서 좋은 지원기구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 큰 원인이었다. 지금은 기억하는 이들도 별로 없겠지만 문예진흥원은 이미 1990년대 후반 한바탕 크게 개혁의 요구를 받았던 바가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문예진흥원 직원들이 공채로 뽑히기 시작했지만 그 이전의 문예진흥원은 문화부 전직 관료들이나 그 주변인들이 낙하산으로 자리 잡고 예술계에 지원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는 곳이란 이미지가 강했다. 그런 이유로 1998년 전후하여 공채 세대들을 중심으로 한 문예진흥원 개혁이 강하게 주장되었고 실제 상당수 그런 식으로 자리잡고 있던 중간 간부급 이상이 문예진흥원을 떠났던 일이 있는데 그들이 퇴직금으로 가져간 돈이 엄청나서 크게 논란이 되기도 했다. “지난해 퇴직한 문예진흥원 중간 간부 한사람의 퇴직금이 작가 수백 명의 몇 년간 원고료에 해당한다면 누구를 위한 문예진흥원인지 의문이 생긴다”(장석용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이사) 19993월 어느 일간지에 실린 기고문의 한 대목이다. 문예진흥의 폐쇄적인 구조로는 도저히 정상적인 예술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일반의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문예진흥원 시절에, 이런 부정적인 인식에도 불구하고, 예술지원전문인력이 꽤 많이 생겨났다는 점이었다. 1971년에는 당장 민간자율기구를 만들어도 관료보다 더 능숙하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이가 거의 없었다면 2003년에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문예진흥원의 아르코 전환은 나름의 필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 예술계에서 오랜 바램이었고, 정치적 분위기도 전환되었고,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민간자율성이 요구되고 있었고, 기존의 기관(문예진흥원)은 예술계의 적폐세력으로 낙인찍혀 있었고, 민간역량도 어느 정도 성장한 상태였으니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었다고 비춰진 것이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성공이란 표현을 도저히 쓸 수 없다. 왜 잘 안된 걸까? 그 이유를 다음 호에 본격적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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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화예술진흥법  문예진흥5개년계획  신공공관리행정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