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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에 대한 이야기는 끊임없이 쏟아지지만 정작 결론 없이 마무리되는 것 같다. 공적인 장에서의 논의뿐만 아니라 상당히 생각의 결이 같은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도 대개 마무리는 그렇게 된다. 우주나 종교에 대한 이야기처럼 중요하지만 정작 이야기를 하는 우리가 그 문제에 영향력을 행사하기엔 너무나 미미해서 그저 이야기를 할 뿐인 그런 것은 아니다. 그러기엔 아르코라는 대상은 너무 구체적이다. 그렇다고, 수십 번이나 민원을 넣어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동네 사거리 쓰레기 무단 투기 문제나, 보행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분명한데도 장사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무단주차를 용인하는, 그런 오래된 불합리 같은 것도 아니다. 이런 문제는 대개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조정이 힘들기 때문인데, 아르코는 그런 경합적인 이해관계가 있는지도 모호하다. 오히려 현재 아르코에 대한 이야기가 겉도는 것은, 마치 가격에 맞춰서 구매한 오디오 장비의 한계 같은 것이나 여야를 막론하고 최선보다는 차악을 골라야만 하는 정치인들만 가득한 국회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낮은 퍼포먼스를 보이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인정하는 동시에, 애당초 큰 기대를 가지고 정염을 쏟아부을 만한 대상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현상유지가 가장 최선인 사람이나 단체 혹은 집단에게는 최고의 환경이다. 이를테면 2000년 이후 수많은 정당성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버티고 있는 장르별 협단체의 입장에선 아르코가 장르별 구조를 벗어나는 건 바라는 방향이 아니다. 오랜 기간 공모사업을 하면서 때때로 사업심사에 참여하면서 작업을 해온 예술인에겐 아르코는 가장 손에 익숙한 장갑 같은 것이다. 이들에게도 아르코의 변화라는 것은 왠지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일과 같고 자칫 안정적인 작가 활동의 토대가 되어온 지원사업 구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는 불안감이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예술인이라면 현재의 아르코가 오히려 기득권 구조의 화신 같아야 할 것 같지만 예술대학과 그로부터 파생된 학연구조의 예술시장보다 아르코가 가지고 있는 정책시장이 조금 더 공정해 보일 수밖에 없다. 관료체계가 가진 최소한이 특정한 생태계에서는 최대한의 상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아르코의 혁신은 그 자체가 아르코의 현재를 연장시키는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고 해도 무방하다.
사업 소비자와 공모자판기
현재 아르코의 기능을 가장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은 ‘공모자판기’라는 말이다. 비하의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시스템의 고정성을 고려할 때, 소비자가 바라는 물건을 손쉽게 구할 수 있도록 하는, 높은 수용성을 의미하는 찬사에 가깝다. 실제 아르코가 가지고 있는 경직성을 고려할 때 예술계의 변화에 따라 발생하는 다양한 욕구를 공모사업으로 산출해 내는 것은 최고의 퍼포먼스에 가깝다. 지난 시기 아르코의 혁신은 많은 경우 시스템의 변화보다는 사업방식의 변화로 나타났다. 이를테면 공모사업에 있어 적정 단가를 반영한다거나, 신진예술인들을 위한 사업을 만들어내거나 아니면 심사과정에 변화를 주는 등이 그렇다. 그런 점에서 지난 4년 간의 아르코 혁신의 본질은 자판기라는 시스템의 변화에 초점이 맞춰졌다기보다는 사업 방식의 구조 그러니까 기존보다 자판기에서 고를 수 있는 상품을 늘리고, 상품의 내용물을 개선하고, 자판기의 접근성을 높이는 등등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르코의 경직성은 크게 두 가지의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외부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부적인 것이다. 우선 외부적인 것이라면 문화체육관광부라는 정부 부처의 사업전달체계로서의 기능에 대한 것이다. 지난 시기 아르코에 요구했던 자율성은 전달체계 자체의 변화라기보다는 전달하는 대상을 사업에서 정책으로 바꾸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미 정책의 세부 구조까지 다 만들어져서 오로지 상품으로서 뱉어내기만 하는 기능이 아니라, 구체적인 정책목표를 전달받아서 이를 사업화하는 자율성 정도를 요구해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문화예술진흥기금을 통한 사업의 경우에는 최소한 아르코에서 설정한 정책과 그에 따르는 사업이 상향식으로 강제될 수 있는 힘 같은 것이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한적인 상향식의 권한은 기금 자체가 가지고 있는 물리적인 한계 탓에 별다른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외려 현행 예술인생활안정자금 융자사업과 같이 새로운 사업의 돈주머니 이전 수단으로써 활용도가 높아졌을 뿐이다. 민간위탁 사업으로 진행했던 공공미술사업이 아르코로 이전되었는데 이것이 과거 타 기관에서 수행했던 사업과의 차별점이라곤 사업 내에서의 변화에 불과하지 사업구조나 정책목표 자체가 변화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지난 4년 간 아르코가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인 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어디까지나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안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고 안 한 것도 아니고 조금만 한 것이라 개선된 것처럼 보이는 착시인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직접적인 것은 내부적 경직성이다. 내부적 경직성이란 일차적으로 조직체계를 떠올리지만 공모자판기라는 성격을 고려할 때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은 의견수렴-사업개선 구조 자체다. 알다시피 모든 행정기관은 새로운 사업에 대한 지향보다 기존 사업에 대한 지향이 더욱 크다. 그래야 사업 집행 과정에서의 모호성을 줄일 수 있고 사업 실패의 리스크를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혁신이라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사업을 하는 당사자들의 수용 여부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최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논의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주제가 새로운 사업의 증가에 비해 과소한 조직 구조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일은 많아지는데 일을 할 수 있는 조직이 되지 못함에 따라, 실제 기대치를 자체적으로 다운 그레이드 하는 일이 벌어진다. 아르코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인식적인 다운 그레이드는 오래 전의 일이다. 그 결과로 혁신 자체를 새로운 일의 증가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래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실행할 역량이 되지 않는다’는 논의가 반복된다. 그 결과 혁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새로운 인풋 과정의 설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난 4년 동안 아르코의 새로운 의제에 대한 논의에 초대된 예술인들은 바뀐 아르코 위원들의 네트워크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의제의 인풋 과정이 만들어지려면 새로운 참여의 통로가 있어야 하지만 현재 아르코의 기관 운영 구조에선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혁신의 담론은 갱신되지만 혁신 자체는 지체되는 일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것의 결과가 바로 공모자판기로서의 아르코라는 형태다. 이것이 아르코 혁신의 결과물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비하가 아니라, 최선의 결과물로서 그마나 예술인이라는 사업 소비자들의 욕구를 잘 반영했다는 의미이다.
공론장 없는 ‘합의제 기구’
만약 현재의 조건에서 괜찮은 공모자판기로서 아르코의 변화가 뭐가 문제인가라고 한다면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사업 전달체계로서 아르코는 분명 유능한 조직이 맞다.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업 소비자로서 예술계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고 상품의 다양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한다. 하지만 아르코가 그보다는 좀 더 다른 의미를 가진 조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민해봐야 하는 과제가 있다. 그것은 예술계가 아르코에 대해 가지고 있는 당사자성을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아르코가 ‘예술인들을 위한’ 조직이 아니라 ‘예술인들의’ 조직이 되려면 따져보아야 할 조건들이 있다. 예술계와 아르코의 관계, 아르코와 다른 예술기관과의 관계, 그리고 아르코와 시민들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우선 공모사업을 매개로 하지 않는 아르코와 예술인의 관계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의 경험을 놓고 보면 이런 사례를 찾기 힘들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코는 예술인들에게 한번도 ‘공통자원’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아르코의 혁신과제 논의에서 잠깐 나왔다가 마치 공상적인 이야기인 것으로 치부되어 사라진 ‘예술인의회’에 대한 논의를 재론할 필요가 있다. 기존의 예술인의회가 마치 낮은 수준으로는 집단적/지역적 민원인 모임 같은 것으로 치부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건 아르코가 장르를 벗어나 새로운 예술계의 현장성을 획득하는 방식으로서의 의미다. 장기적으로는 상호 간의 자율성이 극대화하는 방식을 지향할 수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하나의 공통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틀로 구축하면 어떤가 싶다. 이를테면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존치와 관련한 의제에 집중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진흥기금은 현재 재원구조가 상실되어 있다. 하지만 과거 광역시도의 지역문화예술진흥기금의 마중물을 만들었을 정도로 공통자원 만들기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국가 기금의 고갈로 지역별 기금의 쓸모에 대하 무관심을 만들어냈다. 물론 아르코가 문화예술진흥기금의 재원 확보를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화체육관광부 눈치 보고 기획재정부 의중을 고려하여 수세적으로 접근한 것이 전부다. 필요하다면 아르코 차원에서 별도 사업 용역을 내서 최소 전국 8개 광역지역 중심으로 중앙기금과 지역기금의 필요성과 존치방안에 대한 공론장을 만들고 구체적인 의견을 청취할 필요가 있다.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활동증명 완료자들에 대한 설문조사와 더불어, 그동안 아르코의 공모사업 소비자들에 대한 인식 조사도 광범위 하게 실시할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이 정도는 해야 아르코가 별도의 기금을 조성하고 관리하는 기관으로서의 책임을 하는 것일 테다. 이번 아르코 신임위원회 임기 동안 문화예술진흥기금에 대한 기관으로서의 방향성이 뚜렷하게 설정하지 못한다면 아르코는 공모자판기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하는 기관으로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아르코와 예술기관에 대한 관계다. 이상하게도 아르코는 지역문화재단이나 다른 예술기관과의 관계를 ‘협력 관계’로만 좁혀서 접근하는 경향이 크다. 하지만 아르코는 그와 동시에 여타 예술기관에 대한 의제를 직접적으로 다룰 수 있는 기구다. 실제 위상에 있어서 아르코는 한국의 예술지원정책을 총괄하는 역할과 동시에 예술계와 국가기관을 매개하는 기구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아르코는 단순히 협력관계로 다른 예술기관과의 관계를 축소할 것이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아르코가 다른 예술기관 이를테면 지역문화재단에 대해 강제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럴 권한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키고 좀 더 괜찮은 방향으로 여타 예술기관들이 변화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은 가능하겠다. 이를테면 2022년 지방선거 이후 지역 문화기관은 엄청난 변화를 겪고 있다. 한편으로는 예술기관의 통폐합에 의해 전통적인 예술지원 기능의 축소가 우려되는 것이 있고 다른 하나는 단체장의 교체에 따라 유공자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문화재단 대표자 선임의 문제다. 이런 논의를 아르코가 협력관계로 생각하고 있는 문화재단협의회 같은 조직과 할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아르코가 협력해야 하는 것은 사업이지만, 아르코가 주도해야 하는 것은 의제다. 그러니까, 아르코가 기타 예술기관하고 맺는 관계를 사업 관계로 앙상하게 접근할 것이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기관 자체에 대한 의제와 논의들을 개발하고 공론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매년 정례화된 아르코 대토론회의 주제들을 예술기관들과 협력해서 하는 기관 세션이 존재한다면, 오히려 예술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대해 자율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자율 세션을 구성해서 진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지금과 같이 한 자리에서 대규모로 진행할 것이 아니라 2~3일 정도로 하나의 장소에서 다양한 공간을 활용하여 펼쳐지는 방식으로 구성한다. 여기서 더 나가면 건당 100만원 정도의 주제 연구를 10건 정도 모집해서 대토론회가 벌어지기 2달 전에 진행하고 이 내용이 발표될 수 있도록 조직하는 등, 예술인이나 관련 현장연구자들이 예술정책 자체에 대하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촉진할 필요가 있다.
시민과의 관계, 시혜와 프로파간다에 머물러 있는
마지막은 아르코가 끝끝내 시도조차 못하고 있는 아르코와 시민과의 관계다. 후원이나 기부, 바우처를 빼놓고 아르코와 시민의 관계는 문화복지의 수혜자로서가 유일하다. 거의 모든 예술지원 정책에는 ‘지역주민들의 예술향유’ 같은’ 것들이 이야기되지만 정작 아르코는 한국의 시민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그저 몇몇 전문가들이 일방적으로 해석한 이야기를 전달받거나 다른 나라 시민들의 이야기를 정리하여 만들어진 해외 사례들을 가지고 들어와서, 역으로 시민들을 개조시키려고 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아르코는 적극적으로 시민과의 관계성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예술인과 시민이 구분되는 이들이 아니라, 예술인 역시 예술을 하는 시민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시민이라는 총체적 개념은 예술하는 시민의 상대성을 확인하는 척도로서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예술정책의 갈라파고스화를 막을 수 있다. 솔직히 현재 예술정책은 가난한 예술인에 대한 시혜적 정책이나, 아니면 문화국가의 이념에 따라 ‘문화 중요하지’라는 관념의 산물이거나, 아니면 예술지원이 마치 ‘직접적으로’ K-문화의 토대가 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정책 프로파간다의 결과물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시민들이 예술을 하는 시민들에게 연대의식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공동자원으로서 재정을 특수하게 분배받을 수 있는 정당성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000년 이후 새로운 문화예술정책의 변화는 시민들의 욕구 변화라기보다는 대학에 기반을 둔 교수들이 정책전문가로서 국회나 정부 등 국가의 상층부를 설득함으로써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시혜적인 예술정책 속에서 ‘기왕에 하려면 유명한 사람의 것’이라는 문화소비자로서 시민들의 인식은 변함이 없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예술정책의 변화나 예술계 내에서의 전환이 모두 내부지향적인 움직임이었다는 것에 기인한다. 아르코는 예술과 시민의 관계를 추상적이고 담론적으로 조정할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시민들이 당대의 예술(문화가 아니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묻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현행 문화향유조사와는 다르게 예술인식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공모사업을 수행하는 예술인이나 지역 수행기관에게만 떠맡겨온 사업수혜자에 대한 만족도 조사 등을 아르코가 직접 수행함으로써 아르코의 정책과 연결된 바 있는 시민들의 목록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사업 종료 직후뿐만 아니라 사업 시행 1년 후, 그리고 2년 후 등과 같이 사후에도 해당 예술지원사업이 어떻게 남았는지를 추적하는데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노력들이 궁극적으로 시민들에게 예술정책의 쓸모에 대해 공감할 수 있게 만들 것이다.
하면 좋지만, 될까?
안될 것이다. 아마도 이런 제안들이 지금 구성된 아르코에서 진행될 가능성에 대해 높게 보는 사람은 거의 없겠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서, 과거에는 되었을까? 만약 아르코의 ‘리즈 시절’이라는 것이 존재했었다면 그때엔 이런 시도들이 가능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러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제안을 하는 것은 그저 악감정의 표출일 뿐이고 누구도 할 수 없는 그럴 듯한 말을 늘어놓는 허영인가. 아니다. 진짜 진지하게 아르코의 무용론을 생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나마 아르코가 진흥원이 아니라 아르코로서 있어야 한다면이라고 생각할 때의 조건일 뿐이다. 아르코 위원 선임을 둘러싼 논의가 SNS 상에서만 부는 바람이 되어버리는 광경을 보면서 우리는 왜 아르코에 대해 대단한 것들을 기대하는 것조차 포기하게 되었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얻은 결론은, 현재의 아르코는 만족을 극대화하기 위한 구조가 아니라 불만족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라는 점이다. 결국 아르코에 대한 글이지만 사실은 그런 아르코에 만족하고 있는 예술계에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도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2023년 지금의 분위기를 비판적인 정서의 기록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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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연대 집행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집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예술인금고의 전 단계인 예술인생활안정자금 관리위원회 위원이다. 현재는 문화/예술 재정과 예술활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2022년에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에 대한 연구'(한국예술인복지재단)와 '동네 예술일자리 연결센터 실행방안 연구'(성북문화재단)의 책임연구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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