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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온라인 영상 콘텐츠 정책] 온라인 콘텐츠의 현장성- 온라인 상영 토론회 후기

CP_NET 2020. 11. 5. 18:16

올해 꽤 여러 차례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온라인 토론회에 참여할 기회가 있었다.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으니 당연히 오프라인 토론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일은 아니다. 어찌 보면 토론회는 공연이나 전시처럼 높은 수준의 영상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주로 패널들의 말에 의존하는 과정이다 보니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데에 큰 기술적/심리적 장벽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온라인토론회라고 해서 모두 같은 포맷은 아니다.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으로 실시간 중계되며 관객들의 참여가 가능한 형식이 있는가 하면, 녹화방식으로 진행되어 편집과정을 거쳐 공개되는 형태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쪽을 두루 경험하며 좀 헛헛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새롭고 낯선 형식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오는 부작용일 수도 있겠으나 토론의 현장감을 살리기는 쉽지 않고, 미디어 송출이나 영상콘텐츠 제작이라는 형식에 매몰된다는 인상을 많이 받게 된다.

 

물론, 온라인 토론회는 여러 가지 장점을 지닌다. 공간이 압축되는 덕분에 더 많은 사람이 토론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토론회는 평범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 특정 영역에 종사하는 이들을 염두에 둔 의제 설정을 위해 진행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보니, 어지간한 규모나 뜨거운 이슈가 아니라면 평소에도 토론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3~40명을 웃돌기 어려웠던 게 현실이다.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토론회에 참여할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온라인 토론회는 그런 장벽을 비약적으로 낮춰주었다. 현장에 가지 않더라도 집이나 사무실에서, 또는 이동 중에라도 토론회에 접속해 참여할 수 있다.

 

, 현장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토론회에서는 객석에서 참여하는 토론이 많지 않다. 하지만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토론을 진행할 경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제법 여러 개의 질문이나 의견이 댓글 등을 통해 올라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질문을 누군가 비웃으면 어떻게 하지?’, ‘내 의견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여겨지면 어떻게 하지?’라는 두려움을 넘어설 수 있는 기제가 현실 발화와 온라인 키보딩 사이에서 뚜렷하다. 그래서 한편으론 일반론에 가까운 이야기를 반복하거나 받아들여지기 곤란한 엉뚱한 주장을 내세우는 경우들이 없지 않지만, 그런 과정마저 사실은 청자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사실, 담론 활성화를 위해 토론회가 하는 역할이란 것에 대해 약간의 회의가 이전부터 없지는 않았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 토론회가 실제 현장의 논의를 수렴하기 위한 것인지, 그저 결정되어 있던 사실을 공표하는 용도, 기관의 면피용 행사, 몇몇 스피커들의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발제는 새로운 의견들을 보여주지 못하고, 토론은 발제의 자장을 벗어나지 않는 안전한 말놀이에 머물기 일쑤다. 종종 참신한 주장과 의견을 가진 이들을 발견할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특히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됐던 토론회는 패널들이 자신들이 참여한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였다. 나를 비롯한 참여자들이 주최 측이 행사를 진행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소품 또는 알리바이 이상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분노를 억누르며 어떻게든 토론을 만들어내려 애썼던 기억이 난다. 불행하게도, 그 자리에서 나는 진행자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토론회에 대한 또 다른 불만 중 하나는 발화권이 지나치게 패널들에게 쏠려있다는 점이다. 앞서 관객들의 질의나 발화가 오프라인에서보다 온라인에서 활성화된다는 경험을 소개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패널들의 발화독점을 깨는 방식의 토론회가 등장하고 있기도 하다. 발제와 토론자가 시간과 순서를 지켜서 주욱 대본을 읊듯 이야기를 마치고 나면 선심쓰듯 관객들에게 질의시간이 주어지는 형태의 토론회는 아마 얼마 가지 않아 비약적으로 그 효용을 잃을 거라 생각한다. 패널들의 전문성에만 만족하기에는 사람들의 정보력과 판단력이 높아지는 양상이 뚜렷하다.

 

 

콘텐츠의 완성도를 위해 밀려난 것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몇 달 전 참석한 한 토론회였다. 사전촬영을 진행하고 편집본을 기관의 SNS 계정과 유튜브에 업로드 하는 방식이었다. 이날 가장 참여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일은 행사의 진행과정 일체를 영상 업체가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영상 촬영을 하는 테크니션들이 이니셔티브를 쥐고 행사 자체를 좌지우지하다보니, 토론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나는 이번에도 토론회의 진행자 역할을 맡고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참석자들은 발제자나 토론자를 막론하고 마치 방송국에서 차려놓은 세트장에 드라마를 촬영하러 온 배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때까지 참여한 토론회는 녹화방식을 채택한 경우에도 일단 큐 사인이 나면 원테이크로 진행자가 상황을 주도하는 식이었는데, 이 토론회는 달랐다. 나는 여는 말을 따로 녹화하고, 패널 소개를 별도로 넣고, 발제자의 발표를 정리하는 멘트를 따로 촬영해야 했다. 패널들도 마찬가지였다. 각각의 발제자별로 촬영을 하면서, 심지어는 발제자의 시선처리 문제로 중반까지 진행한 발제를 처음부터 다시 요구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당연하게도 따로따로 조각내서 진행되는 발표와 토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기는 쉽지 않았다. 물론, 영상으로 둔갑하면 그럭저럭 자연스럽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영상으로 발표된 토론회를 리뷰할 생각도 들지 않아, 공개된 영상을 보지 않았다.

 

토론의 현장성이 온데간데 없어진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지 난감한 순간이었다. 코로나 시대의 기술과 영상콘텐츠를 강조하는 흐름은 이런 방식으로 도래하는 것일까. 중요한 것은 사안에 대한 토론과 논의가 아니라, 하나의 콘텐츠를 완성도 있게 뽑아내는 것이 되어야 하는 걸까. 온라인 콘텐츠의 라이브니스, 현장성에 대한 논의도 이 지점에서 치열한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매끈한 콘텐츠를 산출해내는 게 문화예술계가 추진해야 하는 온라인 활동의 방향이라면, 그것은 유튜브의 수많은 콘텐츠들과 혹은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영화나 드라마 등과 무엇이 다른가. 현장성을 전달하려는 노력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구성해야 하는 걸까.

 

그날 토론회의 세팅과 진행방식에 크게 실망했음에도 현장에서 영상촬영업체의 요구에 그저 따랐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그들도 역시 주체성을 갖고 일을 하고 있기보다는 외주업체가 가질 법한 조바심과 조심스러움으로 쩔쩔 매고 있었던 것이다. 일테면 이런 식이다. 발표하는 사람이 마스크를 쓸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영상팀 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결국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가 문제가 생기면 다시 찍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현실론(?)이 우세해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현장에 실무적인 가이드라인을 결정해 줄 수 있는 기관 관계자가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작품의 퀄리티를 위해 토론회를 농단하는 거라면 차라리 이해를 했을지 모른다. 어떻게 하면 문제없이 영상을 납품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현장에서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제제기를 할 때가 아니라 어서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피로감만 몰려왔다. 다른 패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물지 못할 거면 짖지도 말라고 했던가. 아니, 나는 뒤늦게라도 짖어야겠다. 해당 기관이 다시 그런 방식의 토론회를 조직하지 않기를, 내가 겪은 이 울적한 경험이 다른 이들에게 반면교사가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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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호.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이사.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 웹진 예술경영 편집장.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활동가,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고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일했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 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 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