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가의 10% 이내 할인과 마일리지 5%를 포함한 할인율을 총 15%로 제한한 도서정가제가 2014년 11월 21일부터 시행되어 6년이 다 되어갑니다. 지금은 그 도서정가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현행 도서정가제로 다양한 기획력을 가진 작은 출판사와 독립서점이 크게 늘었고, 동네서점 역시 지역마다 잘 버티고 있습니다. 지난 6년 동안 색깔 있는 작은 출판사도 늘어났습니다. 독자들이 다양한 내용을 보고 책을 선택하고, 그 결과 큰 출판사와 작은 출판사, 구간과 신간을 따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구간보다 신간을 선택하는 확률이 높아지면서 신간 종수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2014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에 출범한 이다북스는 현재 50종 이상 다양한 책을 출간하고 있습니다. 도서정가제가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도서정가제가 흔들린다면 작은 출판사의 책들은 견디지 못하고 할인 경쟁에 밀려 살아남기 힘듭니다. 서점들 역시 대형 온오프 서점의 공정한 경쟁 유통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독립서점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도서정가제 전에는 출판사들이 큰 자본을 가진 대형서점에 휘둘리고 가격 경쟁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구간 할인 속에 신간이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였고, 소자본으로 시작하는 작은 출판사들은 버티기 힘든 구조였습니다. 동네서점 역시 큰 폭의 할인을 감당했다면 지금처럼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서정가제가 흔들린다면 서점, 출판사, 작가 모두의 생존권을 위협받아 출판산업은 무분별한 할인 경쟁을 벌이던 예전으로 돌아갈 것이며, 이는 결국 출판산업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대형 온오프 서점은 출판사에 갑질을 되풀이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홍보비, 그 피해로 출판사는 새롭고 창의적인 기획보다는 돈을 좇는 책에 전념할 것도 뻔합니다. 독자는 다양한 콘텐츠의 책을 접할 수 없고, 결국 출판사와 서점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사실 도서정가제가 큰 대행 출판사도 피해가 있을까, 물어보시는 분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출판사를 예로 들겠습니다. 도서정가제가 정착하기 전, 그분의 가장 큰 일이자 골칫거리는 서점에 공급률을 얼마나 할인해서 책을 보내느냐였습니다. 그렇게 스트레스받으면서 시작하는 아침을 다시는 맞이하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도서정가제로 건전한 유통질서 확립으로 출판 생태계가 지켜지고 있어서 지금은 다행이라고 합니다. 출판사가 좋은 책을 개발하고 펴내는 데 힘써야 하는데 책 할인율을 고민해야 합니까? 그분은 한숨을 쉬면서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하십니다.
물론 현행 도서정가제에는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코로나19 속에서도 견디고 있는 건 지금의 도서정가제가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도서정가제가 무너진다면 그나마 버티던 힘마저 송두리째 무너질 것입니다. 작은 출판사들은 경쟁력을 잃을 것입니다. 창업 4~5년 차 이내의 출판사, 출간 종수가 100종 미만인 출판사는 문을 닫을 확률이 높습니다.
도서정가제로 출판 생태계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그나마 버티는 저희로서는 다시 예전처럼 할인경쟁구도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합니다.
출판과 서점은 왜 과세를 하지 않을까요? 도서는 법적으로 부가가치세가 면제됩니다. 책은 우리 문화의 발전과 미래를 위한 대체 불가의 상품이기 때문입니다. 도서정가제는 작가, 출판사, 서점, 독자가 책의 건강한 생태계를 함께 만들어 가고자 하는 아름다운 약속입니다. 도서정가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책이 책다울 수 있도록, 저마다 공정한 환경에서 자신의 창의적인 노력으로 자유롭게 경쟁하는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도서정가제는 필요하고, 결코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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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미. 지학사에서 북디자인을 했으며 이후 10년 넘게 북디자인 회사를 운영했다. 북디자이너로는 한계를 느껴 2014년 이다북스를 세웠다. 책과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홍익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문화예술경영을 전공했고 <국내 스테디셀러의 형성 과정과 성공 요인에 관한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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