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창간1주년기념칼럼] 대구에서 출판사 꾸려가기

CP_NET 2020. 7. 1. 00:01

 

 

내가 일하는 출판사는 대구에 있다. 며칠 전 돌아가신 김종철 선생이 1991녹색평론을 창간하여, 2008년 말 소재지를 서울로 옮기기 전까지 쓰던 그 사무실에 깃들어 있다. 녹색평론이 대구에 있다는 인연 덕분에 1998년부터 약 10년 동안, 나는 부족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김종철 선생 곁에서 출판 일을 배우는 행운을 누렸다.

 

 

김종철 선생을 기리며

 

사상가’, ‘문학평론가’, ‘문필가로서 못지않게, 김종철 선생은 한국 출판 역사에서 반드시 기억하고 기려야 할 뛰어난 출판인이자 편집자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분이 손수 쓰고 번역한 수많은 책들, 밤잠을 설치며 일일이 교정 보고 편집하여 세상에 내놓은 기념비적인 출판물들을 새삼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위업은 앞으로 뛰어난 후학과 비평가들, 무엇보다 진지한 독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 고단하고 궁핍한 사업을 선생 곁에서 거들며 내가 배운 출판에 관한 소명의식과 직업윤리 등은, 지금도 그 일로 밥 먹고 사는 나에게 더없이 귀한 자산이다. 그것을 잊지 않고 이어가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두려운 마음마저 든다.

 

지금도 기억나는 선생의 경영 원칙중 하나는 새 책 나오면 인쇄소, 제본소 등 거래처에 지급할 돈부터 최대한 빨리 보내주라는 것이었다. 당장 돈이 없으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거래처에 줄 돈을 절대로 미루지 말라”고 늘 당부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는 실제로 다양한 밥줄들이 걸려 있다. 돈이 생기면 그 돈이 얼른 돌아, 책 만드는 일로 함께 먹고사는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글만 읽는 지식인이라 세상 돌아가는 데 어두울지 모른다고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런 경영 원칙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종철 선생은 출판의 협업 관계와 실물경제, 특히 이웃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매우 예민하신 분이었다. 선생이 평생 설파한 공생의 윤리는 당신이 종사한 출판 산업에서도 가장 먼저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가치였다. 지금은 현실정치 의제가 된 기본소득론녹색평론을 통해 한국사회에 거의 최초로 소개하고 깊이 연구한 것 역시, 단지 이론적 관심의 문제가 아니라 철저하게 민중의 삶이라는 현실 문제에 천착함으로써 비롯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공존을 위하여

 

아무튼 지금 내가 가족과 꾸려가고 있는 도서출판 한티재는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또 선생의 가르침을 기억하며 2010년부터 바로 그 둥지에서 출판업을 이어오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오늘 세대와 내일 세대가 공존하는 사회에 보탬이 되는 책을 만들기 위해라는 한티재 소개 문구는 사실 녹색평론의 발간 취지를 감히 그대로 따온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인연을 입에 담기가 송구스러울 만큼 여전히 배움도 실력도 모자라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구에서 출판의 명맥을 잇는다는 보람과 기쁨, 무엇보다 지역의 많은 이웃과 벗들의 격려 덕분에 지난 10년을 근근이 버텨왔다.

 

그러나 이러한 보람과 기쁨 한편에는 우리 같은 작은 출판사가 지역 출판본연의 역할을 다하면서 과연 앞으로 얼마나 더 생존이 가능하겠는가 하는 근심이 없지 않다. SNS 등 새로운 미디어 확산에 따른 지식과 정보 유통 구조의 급변, 책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과 구매 패턴의 다양화 같은 소위 시장 환경의 변화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급격하다. 그와 함께 전통적인 출판 시장의 규모는 축소되는 반면, 공급되는 상품의 종류와 양은 오히려 늘어나 시장에서 출판사 간의 경쟁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격렬한 실정이다. 출판 산업 내부의 양극화, 영세 출판사들의 도태와 사멸은 이런 조건 속에서 거의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전근대적이고 불합리한 출판 유통 시장의 관행 등은 여기에서 길게 언급하지 않겠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지식문화 산업으로서 사회적 공공성을 가지고 있는 출판업에 대해 공공의 지원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진단과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 등을 통한 중앙 정부의 지원 정책이라 할 수 있는 ‘세종도서’ 선정 사업, 각 지자체 등의 출판 및 저술 지원 사업 등이 연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 예산의 제약 등으로 실제 영세 출판사들이 체감하는 지원 효과는 언 발에 오줌 누기정도에 불과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처럼 열악한 현실을 직시한다면 지자체 차원의 좀 더 적극적이고 전향적인 지역 출판 산업 지원을 위한 관심과 노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공공을 통한 지역 출판 보호와 지원 정책 및 예산 확충이 시급하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20197월 대구시의회는 대구광역시 지역 출판 진흥조례’를 제정했다. 핵심 중 하나는 대구의 공공도서관에서 책을 살 때 지역에 주소를 둔 출판사의 책을 우선적으로 구입하도록 시장과 교육감이 노력한다는 것이다. 출판의 공공성과 지역 출판의 의의를 생각할 때 결코 그 기능을 외면할 수 없는 지역 공공도서관을 진흥을 위한 중요한 주체로 세웠다는 것은 매우 선진적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이 조례를 소개하고 또 자랑하기도 한다.

이 조례는 같은 해12월에 지역 서점 활성화를 위한 취지로, 원래 나뉘어져 있던 관련 조례와 통합하여 개정된다. “시장 및 대구광역시교육감은 지역 출판 간행물과 지역 서점의 도서를 우선 구매하도록 노력하고, ·군이 설치·운영하는 도서관에 지역 출판 간행물과 지역 서점의 도서를 우선 구매하여 비치하도록 권장할 수 있다는 것이 개정의 핵심 내용이다. 이 역시 환영할 만한 것이다.

 

지방자치체의 조례가 가진 구속력이 미약하다는 것, 관련 예산 편성으로 나아가지 못함으로써 그 실효성이 의심된다는 것, 결국 시장 등이 조례를 행정의 하위 개념으로 본다는 한계를 모르지는 않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다. 이렇게라도 공론을 만들고 가시화하고, 정책으로 구체화해가는 토대라도 만들어야 지역 출판이 그저 떠도는 유령 신세를 면하고, 그야말로 문화산업의 한 실체로 인정받고 보호받을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 그러면, 지역 출판과 서점을 활성화하는 중차대한 임무를 맡아야 할 대구의 공공도서관은 몇 개일까. (참고로, 전국의 공공도서관은, 2018년 현재 1,090여 개이다. 대략 5만 명당 한 개꼴. 적은 것은 아니지만, 소위 경제력에 비해서는 크게 모자란 수준이다. 게다가 도서 등 자료 구입 예산은 국제적 수준에 비해 매우 미미한 형편이다.) 대구의 공공도서관은 40개다. 인구 250만에 40. 대략 인구 65천 명당 한 개인 셈이다. 지역 출판 진흥을 위한 조례에 이어, 도시 규모와 경제력에 값할 만큼 공공도서관이 확충되기를 바란다. ‘시장(市場)’에만 의존하지 않는, 출판의 공공성을 지킬 수 있는 정책 중 하나로서 공공도서관 정책이 반드시 필요하다. (도서관 만들자고 하면 화려한 건물만 짓는 토건 중독 증상을 문화정책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다른 기회에 이야기하자.)

 

 

지역문화로서의 출판

 

물론 지역 출판사들은 지역 공동체에 출판 저변을 넓혀가는 일에 더욱 충실해야 하고, 어디에 내놓아도 내용과 형식이 부끄럽지 않은 좋은 책을 만들어내야 할 소임이 있다. 그러나 지역 출판사들이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생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지역의 공공 자원이 영세 출판사들에게까지 물과 영양분을 공급하도록 좀 더 세심한 보살핌과 협력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우리 지역에도 좋은 출판사들이 있다는 것을 시민과 행정이 기억하고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주로 수도권에 적을 둔 출판사들, 규모가 큰 출판사들뿐 아니라, 지역의 작은 출판사들도 공존해야 출판의 생태계도 다양성을 유지하고, 비로소 지역 문화의 보전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김종철 선생의 영전에 머리를 숙이며, 졸시 한 편을 향 대신 올린다.

 

 

 

비 내리기 전

대구 수성구 범어동

도서출판 한티재 사무실 입구

 

동네 고양이 밥 먹고 간 자리에

참새 한 마리 날아와

때늦은 점심 공양 중

 

1991년 창간한 『녹색평론』이

2008년까지 산실로 삼았던 공간

 

활자 같은, 웃음소리 같은

허공에 무량한 발자국들

 

포개고 가는 그대 날갯짓에

가만히 머리를 숙인다

 

가난할수록 고르게

나누며 살자고

 

헐리다 헐리다 한 뼘 남은

범어산 숲길

 

그이 오르내리던 발자국 따라

비낱 듣는다

 

― 졸시 「출판사」 (2020. 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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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홍철. 20년 남짓 출판업계에서 ‘종잇밥’을 먹고 있다. 현재 도서출판 한티재 편집장. 책 만드는 일 외에 동국대 경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로 출판편집에 대해 가르치고 있으며, 작은 도서관인 후마네르범어도서관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문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있다. 강냉이, 공부하다 빵 터지다, 강냉이, 담장을 넘다같은 책을 청소년들과 함께 펴내기도 했다. 시집으로 어린왕자, 후쿠시마 이후, 사계가 있으며, 산문집 시와 공화국이 있다. 출판업자로서, ‘모두가 조금씩 시인인 나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나라를 위한 불온한 책들을 펴내는 것이 꿈이긴 하지만, 출판시장의 현실 앞에서 뒷머리만 긁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