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하나, 어느 미술관
여느 때 같으면 가족 단위 관람객으로 북적거렸을 6월 어느 날의 오후 미술관은 한산하다. 미술관 입구엔 “코로나19 예방과 확산방지를 위해 모든 시설이 약 2주 동안 임시 휴관을 한다”는 문구가 관람객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가 내린 공공 및 다중이용시설의 임시 사용중단 조치에 따라 올해 들어 두 번째로 취해진 조치다. 더 많은 관람객을 주문받던 미술관에서 관람을 제한하거나 폐쇄해야 하는 낯선 풍경이 벌어졌다. 미술관이 만든 전시는 개점휴업 상태이거나 관람객을 마주할 일이 없이 철수될 위기에 놓였다. 큐레이터는 개막일정에 맞추어 전시를 준비하지만, 언제 관람객에게 선보일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때문에 전시들은 전보다 더 인터넷과 가상공간을 떠돌아다닌다.
사실, 필자는 꽤 오래전부터 동시대미술 전시가 SNS를 통해서 가상공간에서만 소비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것이 기정사실이 된 것 같다. 일부 열성적인 관람객은 물리적 작품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미술관의 예약페이지를 방문한다. 지금 미술관에서 ‘관람’은 ‘방역’의 의례 이후에 따라온다. 또한 관람객의 신체는 마스크로 봉쇄된 감시상태에 놓인다. ‘방역’의 의례를 감수하고서 마주한 ‘전시장’은 마치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림의 공간처럼 숭고해 보인다. ‘전시관람’ 행위가 이토록 특별한 적이 있었던가? 이 미술관이 잠시 예약제 개관을 선택했었던 몇 주 동안은 예약을 하지 않은 관람객들이 입장을 실랑이하는 낯선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전시를 보지 못해 언쟁하는 관객이라니?
미술관은 ‘전시’를 생산하는 공장인가? 질문했던 히토 슈타이얼처럼, 그동안 학예실의 큐레토리얼 실천은 ‘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전시’가 봉쇄된 미술관에서 큐레이터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많은 국공립미술관들은 서둘러 디지털 콘텐츠 예산을 확대 편성하고 있다. 봉쇄된 전시는 오픈에 맞추어 제작된 영상물로 개막을 알렸다. 전시의 뒷면에 숨어 있던 큐레이터는 도슨트가 되어 영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공들여 만든 전시일수록 할 말이 많은 법이다. 영상의 길이는 길어지고 봐야 될 영상의 숫자도 늘어난다. 금지된 전시 관람에 대한 갈증도 늘어난다. 전시를 할 수 없어서 기관을 유지할 수 없는 해외 유수의 미술관들이 문을 닫고 직원을 감축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박물관 미술관을 중심으로 VR기술과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갤러리 사업도 늘어났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도슨트나 아나운서의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면, 교육 담당 큐레이터는 방송작가가 되거나 교육 전문 나레이터가 되었다. 비대면 교육으로 학생을 교실에서 만날 수 없는 교사는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교육키트를 주문하고 화상수업을 보충할 미술관의 프로그램을 찾는다. 판데믹 이후에 대학이 사이버대학이 되어간다면, 미술관을 포함한 공공문화시설은 교육방송이나 비대면 교실을 지원하는 대체 프로그램 제작소가 되어가고 있다.
풍경 둘, 어느 지역문화재단
올해 공모지원사업의 개선안을 바탕으로 대대적인 사업을 시행했던 이 문화재단도 코로나19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지역문화재단의 지원사업은 ‘공모사업’을 기반으로 한다. 이 말은 즉, 사업의 공모에 응하지 않는 예술가를 지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재단은 예술가를 지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민의 문화향수 활동을 지원하기 때문에 이 ‘지원’은 ‘사업’의 형태를 띤다. 그러다보니 판데믹과 함께 위기에 빠진 것은 바로 이 ‘사업’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역문화재단 시각예술분야 지원도 거의 대부분 ‘전시’다. 가급적 많은 수의 시민에게 양질의 문화혜택을 주는 것을 목표로 구축된 ‘사업’이 ‘시민’을 만나지 못하도록 강제하는 기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자 작동을 멈췄다.
정부는 이 상황에서 판데믹으로 피해를 입은 예술가들을 구제하기 위해서 많은 예산을 편성했다. 문체부는 3,399억의 예산으로 일자리를 만들 계획이며 8,436명의 예술가들에게 벽화를 그리게 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한 번도 예술가들을 그냥 도와줘 본적이 없다. 때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는 예술프로젝트에 동원된다. 순수하게 예술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조차도 관행을 따라 ‘공모사업’의 형식을 취한다. 정말 이 예산으로 예술가를 지원한다면, 그저 ‘예술인재난지원금’이나 ‘어워드’, ‘작품구매’의 형식은 왜 안 되는 것일까? 이 ‘지원’의 결과는 판데믹이 사그라질 것으로 예측되는 가을 어느 시기 즈음을 기다려 ‘전시’의 형태로 쏟아져 나올 것이다. 어쩌면 그조차도 불가능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대여섯 개의 지원사업을 받고 고민에 빠진 작가들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언제 어떻게 이 많은 전시들을 다 만들어낼까?
작가에게 ‘창작’이란, 어느 순간이든 조건의 제약 없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판데믹 상황에서 ‘창작지원’이란, 수많은 제약조건에 가로막혀 있으며 관료화된 ‘사업’의 형식으로 공공의 이익을 위한 ‘봉사’의 형태로 포장된 채 배달된다. 평생 한 번도 작가 스스로 전시한 적이 없었다는 스위스의 한 작가 이야기는 전설처럼 들린다. 예의 작가는 그저 작업실에서 작업만 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단 전시는 그에게서 그림을 사간 갤러리나 컬렉터에 의해서 마련된 것이라 한다. 이처럼 ‘전시’가 막히고 나니 ‘창작’의 본질이 보인다.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불가능한 것인가?
풍경 셋, 큐레이터 A와의 대화
며칠 전 나는 선배 큐레이터 A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표준(Normal)’이 바뀌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는 큐레이터 A는 그간 활동이 뜸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그는 2005년 기획했던 박이소의 회고전 <탈속의 코미디>에 대해 말했다. 그 전시가 있었던 삼성의 로뎅갤러리에는 지옥문이 있었는데, 그 지옥문 위에 앉아 있는 ‘생각하는 사람’과 박이소가 꽤나 닮아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단테 『신곡(Divine Comedy)』에서 감행했던 영혼과 육신의 순례행위와 박이소의 작업세계를 연결하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1984년 밥솥을 매고 브루클린 다리를 건너고 있는 박이소의 <단식퍼포먼스Fasting performance>의 저 화질 사진을 지옥문 크기만큼 크게 출력해서 벽에 붙였다. 그는 왜 보름이 넘도록 밥을 굶고 무쇠 밥솥을 끌고 가는 행위를 자기 육체에게 명령했을까? 박이소는 세상의 상대적 가치들에 함몰하지 않으면서 내재와 초월을 향해서 나아가다가 마침내 촛불처럼 꺼졌다고 A는 말했다.
자기 생명을 갈아 먹는 ‘순례의 길’은 언제가 한계에 도달한다. 오늘은 우리가 죽지 않은 채 세계가 멈추는 것을 보고 있다. 세계의 역동성, 삶의 부조리, 비극, 알 수 없음, 우연성, 외로움 안에서 부동의 자세로 침묵한 채 ‘생각하는 사람’은 오늘을 사는 예술가의 표상이다. 나는 그 전시에서 보았던 ‘박이소와 그레고리마스의 인터뷰’ 영상을 이야기했다. 딱 5분을 정해놓고 마지못해 간신히 말을 이어갔던 박이소의 무기력증에 가득 찬 주저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인터뷰 영상이 상영되고 있는 공간 한구석에는 간장에 절여진 채 실린더에 담겨 있는 야구방망이 작업 <무제 (1994)>가 있었다. 이 야구방망이는 적당한 크기로 잘려 간장에 푹 절여져 있었다. 방망이는 적극적 방어와 공격성이 상실된 상태로 오랜 시간 숙성된 전통과 정체성의 간장에 몸을 깊숙이 담은 채 무기력의 욕조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었다. 이제 미술은 간신히 살아가기도 힘든 상황에 직면했다. 아니 어쩌면 오래전부터 미술은 이 사회에서 겨우 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전시’를 다시 할 수 있는 시간이 오면 좀 더 나아질까? 이 시기를 지난 뒤에 세상은 어떤 ‘표준’으로 대체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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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영. 1996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하였다. 2003년부터 문화예술정책 개선을 위한 미술인회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위원(시각예술, 다원예술)활동을 했고, 2009년부터 경기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 경기도미술관과 경기창작센터에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2006년 기관을 벗어나 광주의 의재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2007년 안산의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설립하고 아시아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2015)으로 일하다가 올해부터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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