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다리 건너 지인 중 민주시민교육 분야에서 일하시는 선생님이 있다. 그분은 촛불 이후, 소위 민주정부가 들어서고 지역자치, 거버넌스에 대한 강조가 다시 시작되면서 매우 바쁘게 이런저런 민주시민 교육 프로그램, 지역 거버넌스 프로그램을 정부와 지자체의 요구에 의해 진행해왔다. 그런데 그분이 최근 한통의 문자를 받았다. 신용카드 회사로부터 온 카드대금 연체 문자였다.. 바쁜 것만큼의 액수는 아니지만 이런저런 공공 프로그램을 기획 운영하며 받아오던 보조금이나 용역비가 코로나 사태 이후로 끊기다 보니 은행 잔고가 부족했던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각종 교육이나 행사가 불가능해졌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봉급 생활자들에게는 다소 낯선 상황이겠지만 프리랜서들에게는 매우 흔한 일이다.
뭐 이처럼 춥고 메마른 봄을 보내고 있는 이들은 문화예술계 이외에도 다양하게 많다. 그런데 그 선생님은 자신의 생계 이외에도 다른 걱정을 하고 계셨다. “이렇게 상반기를 보내고 나서, 정부나 지자체가 하반기에 예산털기에 나설까 봐 그게 더 겁나요.” 예산털기, 아는 사람들은 아는 표현이다. (지자체 포함한) 정부 예산 사업은 해당 연도의 책정된 예산을 다 쓰지 못할 경우, 이른바 불용처리가 될 경우에 그다음 연도에 불용된 만큼의 예산이 삭감되어버리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해당 연도에 책정된 예산을 다 써버리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연말에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도로를 정비하거나 보도블럭을 다시 깔면서 예산을 소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예산털기를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수 없는 게 정부 부처건, 지자체건 간에 일정한 규모의 예산 실링을 확보하는게 워낙 어렵고 불용된 예산은 삭감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예산털기라도 하지 않으면 다음 해에 그만큼의 예산을 확보하는 게 무척 어려운 게 현실이다. 그러니 이런 불합리한 관성이 작용하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그런 이유로 인해 정부와 지자체의 해당부서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민주주의 교육이나, 인권교육, 거버넌스 프로그램에 책정된 예산들을 해당부서에서 “방어”하기 위해 하반기에 졸속하게 사업규모만 키워서 진행할까 봐 겁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 내용보다 형식을 훨씬 중요시하는 관조직과 함께 이런 프로그램을 내실 있게 진행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나마 갑자기 예산이 만들어지거나 변경되어 마치 해치워버리듯 프로그램을 진행하면 정말 남는 것이 후회와 자조감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선생님은 차라리 그렇게 졸속하게 예산 몰아쓰기를 하느니 하반기에 사업이 차근차근 다시 시작되기를 희망하셨고 지금 이 대재난의 시대에는 쓰이지 못하는 재원은 오히려 대재난 시절에서의 인권과 민주주의 문제를 리서치하거나 담론을 형성하는데 쓰이길 희망했다. 이후 그쪽 분야에서 재원이 과연 그런 식으로 변경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선생의 우려와 걱정은 실은 문화예술 지원정책에 있어서도 그대로 대입될 수 있다.
강박적 불안의 진원
4월 말을 기점으로 표면적으로 한국에서는 코로나 사태가 조금씩 종식되어가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서구 사회가 여전히 코로나 판데믹에서 확실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한국은 급속히 신규 확진자들의 발생이 줄어들고 있으며 그나마 등장하는 신규 확진자들은 대부분은 해외에서 입국한 이들로, 국내에서의 유행은 끝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방역에 성공한 나라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면한 문제는 다른 곳에서 시작될 조짐이다. 비록 코로나 사태 자체는 진정 국민으로 접어들고 있으나 그 영향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인지 아닌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일국적으로는 사회가 멈춰서는 최악의 국면을 벗어나고 있을지언정 그것이 세계 전체가 맞물려 돌아가는 그야말로 글로벌한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해외 교역 의존도가 매우 높은 산업 환경을 조성해왔고 사회발전 모델도 거기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당장에 한국 사회에서의 방역 문제가 해결된 듯 보여도 사회가 유지되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 조건이 따를 수밖에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금과옥조와 같이 절대적 가치로 신봉되는 경제적 지표는 당연히 안 좋은 조건에 놓일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가 재정건전성이 뛰어난 편인데도 불구하고 기획재정부와 같은 경제부처에서 긴급지원금과 같은 사회적 지출에 대하여 극도로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이런 한국적 상황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의 시각에서 봤을 때, 한국은 언제라도 급전이 필요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나라이고 재정적 여유가 없으면 매우 불안해지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강박적 불안감을 한국 사회의 뇌리 깊숙히 꽂아놓은 것은 1990년대 후반 벌어진 IMF사태다.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IMF라는 국난을 극복했다”라는 지배집단의 상징적 언명이 반복되어 왔지만 실제로 우리의 사회적 삶을 돌아보면 결코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그 혹독한 구조조정의 시기를 거치며 비정규직은 폭증했고 노동자조합은 실체적 연대의 힘을 상당 부분 상실해버렸고 빈부의 격차는 엄청나게 심해졌다. IMF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자격박탈의 시기였지만 반대로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세상을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으로 재편할 수 있는 기회로 작동되었음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위기는, 모두에게 위기가 아니고 누군가에게는 강력한 기회였다. 한국에서의 신자유주의는 IMF사태를 불러온 것도, IMF사태를 촉발시킨 것도 아니다. IMF사태를 통해 발아되고 있던 한국적 신자유주의를 급격히 완성시킨 것이다. 여기서 외재적 영향과 내재적 욕망은 서로 충돌하는 듯 보였지만 실은 매우 적극적으로 내통하고 있었다.
창작 중심이냐, 향유 중심이냐는 거짓말
이런 내통을 통해 완성된 체제는 지난 20년 이상 우리의 일상을 지배했으며 우리가 문화정책이라고 여기는 것들, 예술지원정책이라고 여기는 것들을 뒷받침하는 논리들도 대부분 이런 체제의 지향에 의해 형식과 내용이 정해져 왔다. “더 이상 예술계에 대한 퍼주기식 지원을 할 수 없다”라는 경제관료들로부터의 발화는 정작 현장에 있는 입장에서는 “근데 도대체 언제 넉넉한 퍼주기식 예술지원을 했던가?”라는 질문이 나올 틈도 없이 “본 프로젝트를 통한 예술지원의 사회적 수혜자와 기대효과를 서술하시오”라는 매뉴얼화된 지원서류를 예술계에 집어던졌다. 비근한 예로 “이제 (예술)창작 중심의 지원에서 문화 향유 중심의 지원으로 전환합니다”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얘기 역시 마찬가지다. 유감스럽게도 1973년 문화예술진흥법이 만들어지고 문예진흥원과 문예진흥기금을 통해 공공적 예술지원이 시작된 이래 제대로 된 예술창작지원이 이루어진 적은 단 한 시기도 없다.
엄밀하게 되짚어보자면 1980년대 이전의 예술지원은 대부분 국가적 프로파간다에 복무하는 예술에 대한 지원이 주류였고, 사실상 반관변조직에 가까웠던 협단체 중심의 줄세우기식 지원이었고 넓게 보면 전시성 행정의 연장이었다. 그러니 예술 창작 중심의 지원에서 향유 중심의 지원으로 전환하겠다는 얘기는 애초 어폐가 있는 얘기였다. 왜냐하면, 단 한번도 예술의 창작력을 높이는 것을 진짜 정책목표로 놓고 지원한 시기 자체가 없었으니까 말이다. 다만 왜 그런 담론들이 IMF시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는가는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 가지는 문화예술을 사회적 규율과 통합성을 유지하는 도구적 솔루션으로 여기기 시작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비용대비 경제성’이 문화행정의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일정한 예산을 투여했을 때 얼마나 더 많은 불특정 다수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가가 무엇보다 우선한 기준인 것이다. 그런 기준에서는 개인이나 소수 집단에게 직접적 수혜 혜택이 돌아가는 창작 지원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더 많은 이들이 잠재적 수혜자로 추정되는 찾아가는 향유형 사업이 정책효과가 더 높아 보이는 것이다. 좀 극단적이고 과장된 상상을 해보면 이렇다. 같은 예술활동에 대한 지원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사업으로 포장하느냐에 따라 그 기준에 따라서는 완전히 다른 정책효과로 평가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마가타 트윅스터 같은 사회적 이슈를 독특한 형식으로 표현하는 퍼포먼스 아티스트가 광화문 한복판에서 코로나 판데믹에 따른 민주주의의 문제를 자기식으로 해석하여 퍼포먼스를 계획할 때, 그것이 개인의 창작 활동으로 본다면 수혜자가 예술가 한 명이 되는 것이지만 그것을 억지로 문화적 다양성과 문화민주주의를 위한 공공 향유 활동이라고 한다면 광화문 광장을 지나가는 유동인구 전부가 수혜자로 측정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퍼포먼스에 크게 반발감을 가질 것이 분명한 소위 “태극기 부대들”까지도 말이다.
요컨대 창작 중심의 지원이니 향유 중심의 지원이니 하는 수식어로 논점을 흐려놓았지만 결국은 정책공급자, 행정 중심의 지원을, 정부 성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진행해왔다는 것이 보다 실체적인 진실에 가깝다. 몇 년 전 흔히 “찾아가는”이라고 지칭되는 형태의 수혜형 문화 향유 프로그램의 정책 개선을 위한 사례조사 연구를 수행하면서 직면했던 매우 곤란한 난관 중 하나가 정책 개선을 위한 해외 사례를 조사하던 중 현재 어떤 나라에서도 한국과 같은 형태의 실체 없는 범국민 문화향유 프로그램을 뿌려대듯 돌리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즉 유사 사례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은 물론 그것이 우리 연구진의 부족한 조사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시기 유사한 연구를 하던 국책 연구기관의 연구원과 서로 고충을 나누던 자리에서 그 연구원도 똑같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 왜 이리,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상과 목적이 불분명한 범국민 향유 프로그램이 유독 많아진 것일까? 바로 앞서 언급했던 “비용대비 경제성”을 쉼 없이, 정권이 이렇게 바뀌건 저렇게 바뀌건 추구해온 탓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향유 프로그램이 정작 기존의 문화향유정책이 내세우고 있는 두 가지 목표지점인 문화복지와 잠재적 문화수요의 개발에 대하여 어느 한 가지도 실질적 성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이미 범국민적 문화향유 패턴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정책이란 실상 실체 없는 허공에 헛발질하기에 불과하다. 모두를 만족시키고 수혜자로 삼겠다는 것은 결국 누구의 취향도 제대로 깊이 들어가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정책의 무의미한 공전 속에서 정작 국민들의 문화 향유 형태는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성별에 따라, 무엇보다 매우 복합적으로 형성되는 취향에 따라 개별화되었고 이미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책 공급자 관점의 실체 없는 보편성
정부와 공공기관, 지자체들은 재단에 따른 예술계의 어려움에 대한 대책을 하나씩 내놓고 있다. 그중에는 실효적이거나 사태의 성격에 깊이 천착되어 고민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역시 주어진 실링을 어떻게 재난 상황에서 기관 입장에서, 최대한 제도적 안정성을 방어하며 배분할 것인가에 쏠려져 있는 듯하다. 긴급한 듯 마련되는 예술지원 프로그램에서 뭔가 도움을 얻기 위해 접근했다가 의외로 높은 장벽에 좌절하는 경우나, 자신의 예술활동 중단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증명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는 예술가들을 꽤 많이 접하고 있다. 어떤 공연예술가는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실 딱히 지난 해 봄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없어요. 그때는 잡힌 공연이 있었지만 그것이 수입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정신적으로는 훨씬 힘들어요. 뭔가 사람들을 만나서 (되든 안 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게 언제부터일지를 알 수 없으니.” 비슷한 얘기를 다른 기획자에게도 들었다. 본래 겨울에서 봄에 이르는 시기는 매우 힘든 시기이고 그러니 그 피해 정도를 어찌 경제적 수치로 증명할지 난감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예술계가 어렵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하지만 그 어려움이 존재하는 방식이나 실체는 매우 복잡하며 최소한 정부 당국자들이 바라보는 시선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모 예술단체가 예술계 피해액이라고 언론에 발표한 수치 역시도 예술 현장에서는 전혀 체감되지 않는 숫자노름일 뿐이다. 이 모든 풀리지 않을 난감함의 출발은 결국 한국의 예술지원이 정부를 비롯한 지원기구와 제도를 중심으로 짜여진 프레임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단어 몇 개만 바꾸면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재난의 시대를 맞이하여 긴급한 예술계에 대해 예술행정과 지원정책의 기민성이 떨어지는 데서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질본의 방역 시스템에서 드러나듯 한국의 공공조직은 굉장히 빠르고 치밀하고 무식할 정도로 열심히 일한다. 다만 지금의 정책공급자 위주로 실체 없는 보편성과 단지 숫자노름인 비용 대비 경제성 위에서 자기 완결성을 찾는 프레임에서는 그 어떤 긴급대책도 현장에서의 긴급함에 주파수를 맞추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재난의 시대를 통해 드러난 예술지원 정책의 기저질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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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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