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판데믹과 문화정책] 통찰의 시간이 왔다

CP_NET 2020. 4. 6. 12:58

불과 한달 전만해도 코로나19로 인한 사회활동 파행이 이렇게 장기화 될 줄 짐작하기 힘들었다. 초창기 이 바이러스에 대해 특정 국가나 특정 지역의 문제로 바라보는 인식이 강했고 최근 몇 차례 지나갔던 사스나 메르스처럼 비교적 단기간의 국지적 확산이 이루어지고 사그라들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적 기대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바이러스 상황은 잠잠해지기는커녕 국경을 빠르게 횡단하며 거의 전 세계를 일시중지 상태로 몰아넣었다. 무엇보다 오랫동안 은연 중에 선진적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왔던 유럽과 미주의 주요국가들에서 엄청난 확산이 이루어졌다는 것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정확히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아베 정부가 적극적인 의료 대책을 미룬다는 의심을 받아가면서까지 강행하려고 했던 2020 도쿄올림픽이 전격 연기된 것은 코로나 충격이 거의 세계 전쟁 상황을 방불케하는 심각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20세기 이후 올림픽이 취소된 것은 세계대전 때가 유일했다.

 

한국은 특정 종교 집단과 관련하여 대구 경북지역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시기를 제외하면 비교적 다른 국가들에 비해 확진자들이나 사망자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로서는 정부가 방역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바이러스가 확산되었던 예측불가한 양상을 보자면 어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상당히 이른 감이 있다. 다만 만일 한국이 이 정도 수준에서 피해가 폭발적으로 더 증가하지 않고 멈춘다면 최소한 방역에 있어서만큼은 정부의 대처를 비판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초창기 한국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봉쇄 정책을 펼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적인 여론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그런 봉쇄정책을 펼쳤던 나라들조차도 대만이나 싱가포르 정도를 제외하고는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 하기 어렵다. 게다가 대만이나 싱가포르가 특수한 조건에 놓인 국가들, 즉 비교적 좁은 면적의 국가이며 엄청나게 규율화 된 사회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란 점을 감안하면 그런 철두철미한 관리 모델이 한국 사회에서는 애시당초 가능했을까가 의심스럽기도 하다. 20세기 후반 이후 한국 산업사회를 유지하고 이끌고 가고 있는 동력이 엄청난 이동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말이다.

 

198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모빌리티 패러다임(New Mobilities Paradigm)21세기 한국만큼 잘 부합되어있는 사회가 보기 드물다. 현대 사회의 높은 이동성이 그 다양한 양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자본 회전율을 최대한 높이는 이윤을 위한 효율을 극대화 하는 것에 복무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그런 측면에서는 매우 앞선 사회다. IMF사태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사회구조조정을 거치며 상품과 노동 모두 국경의 경계를 넘나드는 구조를 최대한 허용하는, 아니 허용이라기보다도 거의 강제하는 방향으로 자리잡아온 사회이다. 외국인들이 한국, 특히 서울에 처음 도착했을 때 겪는 놀라운 경외감은 밤낮없이 사람과 상품이 돌아다니는 풍경이다. 이런 사회적 조건을 전제한다면 코로나19와 같은 무서운 전파력을 지닌 바이러스가 유입된 상황에서 심각한 대파국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신기한 노릇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최소한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접속되는 대부분 지구 상의 지역들이 결국은 각 국가의 행정적 통제로는 관리될 수 없는 조건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현대 사회와 함께 도래한 높은 이동성, 이를 통해 도시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주장한 시공간 압축의 세상은 바이러스 전파에 있어서는 과거의 개념으로 접근할 수 없는 동시다발성을 발생시키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코로나19로 인한 질환이 잠복기간이 길고 무증상자가 다수 존재하는 것이 결정적 이유이기도 하다.)

 

 

지독하게 불평등한 노동 사회

 

여하간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가져온 매우 예외적이었던 상황은 이제 일상이 되어가고 있다. 초중고 학생들의 개학이 계속 늦춰지고 있고 대학생들은 온라인을 통해 강의가 이뤄지고 있다. 노동여건이 갖춰진 기업들은 재택근무가 권장되고 있으며 대부분의 공공적 다중이용시설들, 시민체육관이나 도서관 등이 문을 닫았다. 대다수의 종교 행사에 대한 자제가 요구되고 있고 정치사회적 이슈에 대한 집회, 시위도 자제를 요구받고 있다. 이 밖에도 공공에서 열리는 많은 행사들이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있다. 민간에서 스스로 만드는 행사나 사적인 모임에 대해서도 엄격한 자제가 요구되고 있다. 이른바 사회적 거리두기로 번역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두기가 광범위하게 요구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출근이 이뤄지고 있는 일부 공공기관의 구내식당에서 식사시간이 2부제로 운영되며 마주보지 않고 일렬로, 그것도 떨어져 앉아 식사를 하는 진귀한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사람 간 접촉에 대한 특별한 관리는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 아니다. 독일 등 유럽 주요 국가들 중에 시민들의 외출 자체를 자제시키는 국가가 있으며 산책 중인 시민들에게 멈춰서 대화하지 말고 각자 계속 걸을 것을 방송하는 공공차량들이 돌아다닌다고 한다. 이런 특이한 상황이 잠시 지나쳐갈 것이라 여겨졌던 시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기간을 지나치며 피로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폭증하는 온라인 쇼핑으로 인해 택배 노동자들의 과노동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고 반면에 다수의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노동 계층은 생계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물론 부자들은 예외다. 보유한 자산이 아주 많은 유럽과 미국의 부자들은 자기들만의 섬에서 휴가를 즐기며 바이러스를 피하고 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다시 한번 지난 호 글에서 언급했던 앨런 포우의 <붉은 죽음의 가면>과 프로스패로 대공이 떠오른다. “[도시와문화정책] 바이러스, 도시, 문화정책https://culture-policy-review.tistory.com/64) 비교적 안정적인 봉급생활자도 불안하지만 어찌 되었건 견딜만한 시기일 수 있다. 여기서 안정적인 봉급생활자란 공무원, 교사, 교수와 같은 공공적인 직업을 가진 이들, 대기업 본사의 노동자들, 그리고 흔히 전문직이라고 불리고 있는 노동시장의 서열에서 상위 그룹에 속하는 이들이다. 반면에 노동시장 서열의 아랫단에 놓인 이들은 상당수가 매우 불안하고 또 일부에게는 그 불안이 심각한 현실이 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특별히, 혹은 갑자기 닥친 현실인가? 그렇지 않다. 바이러스 상황이 상황을 좀 더 노골적으로 확장시킨 것일 뿐이다. 노동의 불평등한 위계구조는 상존해왔으며 단순한 임금 격차 이상의 위협들, 해고를 포함하여 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협들이 전체 노동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대다수 노동자들과 농민들, 니트족과 비자발적 실업자들을 괴롭혀왔다. 특히 한국 사회의 민중들은 일자리가 사라지며 생존의 근거가 삭제되어버리는 극단적 체험을 불과 20여년 전인 1990년대 말에 실제로 체험한 바 있다. 누군가들은 한국 사회가 IMF라는 국난을 극복했다고 주장해왔지만 실제 IMF가 강제한 질서에 민중들이 종속되어왔을 뿐이다. 이런 질서 아래서 일이 사라지는 위협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들은 매우 역설적으로 끔찍하게 불평등한 임금 구조와 각종 사회적 갑질 속에서도 기층 노동자들이 순응하게 만든 살벌한 자본축적 구조의 이데올로기 엔진이었다. 바이러스 상황은 바로 그런 사회 심층의 기저질환을 순간적으로 노출시킨다. 노출시킬 뿐만 아니라 어떤 지배 집단들은 이런 상황마저도 민중을 길들이거나 지배질서를 강화하는, 자본의 이윤추구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쉽게 통합과 치유를 얘기하지 말자

 

고통을 견뎌야 하는 시간을 이용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가 이야기 하듯 장작을 베고 누워서라도 원수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거나 곰 쓸개 즙을 핥아먹으면서라도 분함을 잊지 않는 결기로 인고의 세월을 이기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사마천처럼 궁형을 당하고 수형생활을 하면서도 시대를 곱씹어 읽으며 역사를 기록하려 한 이도 있다. 어쩔 수 없이 손발이 묶인 문화예술계도 다양한 방향으로의 모색이 필요한 시기이다. 문화정책 역시 마찬가지이다. 발 묶인 예술계의 배고픔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고 취소된 축제와 관광이 이 업계에 끼칠 영향에 대한 고민도 물론 현실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문화정책이 판데믹의 강제된 휴가를 겪으며 도달할 통찰의 전부는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바이러스의 공포와 고통은 실상 이 사회 심층까지 퍼져있는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착취구조를 끄집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회통합을 모토로 내세우고 있는 기존 공공 문화정책의 가치들은 또다시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공공 문화정책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작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조리를 은폐하거나 갈등을 적당한 선에서 봉합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실제는 대부분의 민중들이 어떤 선택의 가능성이 봉쇄된 불공정하고 차별적인 세상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가 모든 것이 허용된 세상에서 새롭고 가치 있는 것을 상상하며 그것을 통해서 세상을 바꿔나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착시현상을 하게 만들기 위해 문화정책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극단적 의심들 말이다.

 

바이마르 헌법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우리의 법 체계는 형식적이건 아니건 제헌헌법 시절부터 줄곧 문화국가론을 요체로 삼아왔다. 즉 국민들의 문화적인 권리를 국가가 책임지고 보장해주고 그것을 통해 국가의 문화를 성장시키는 나라를 지향하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를 중심으로 한 공공의 문화정책에는 반드시 대다수 국민의 문화적 권리와의 관련성을 단서조항으로 붙이곤 한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에서 국가 운영의 원리로 주장하는 만큼 국민들의 문화적 일상을 관리해주고 있는가? “정부=국가로 인식되는 체제에서 정부가 국민의 문화를 관리(혹은 간섭)해 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일단 미뤄놓고 보더라도 실제로 그런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려면 정부는 문화분야에 관한 엄청난 재정 지출을 감내해야 한다. 하지만 디행인지 불행인지 그 원리는 그냥 법학적 원리로, 관료들의 언어체계에서만 존재한다. 이런 국면에서 문화정책이 실체 없는 수사학으로 떠돌고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이 든다. 단편적인 예를 들어, 실제 사회적 다양성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으나 다양성에 대한 문화정책 사업을 하는 것을 통해 정부가 문화국가의 원리를 실현하고 있다는 착각이 존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다.

 

마치 정부는 문화국가의 원리에 기인한 문화정책의 수사법을 만능키처럼 사용하며 사회 곳곳의 파열들을 땜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면 바이러스의 시간들은 한편으론 고통이지만, 고통을 통해 우리 시야를 막고 있는 실재계의 민낯을 드러나게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 원고를 작성하는 도중 친환경적 축제로 오랫동안 선전되었던 모 지자체의 산천어 축제가 바이러스로 취소되었고 그 여파로 양어장 대형 수조 안에 갖혀 있던 산천어들이 떼죽음 당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참담한 노릇이다. 참담함을 감내하고 감히 쓰자면 비유컨대 이제 거대한 수조를 생태하천처럼 보이게 하는 문화정책에서 거센 하천을 감내하고라도 수조를 깨고 나가는 문화정책을 고민해야 할 때다. 그리고 그것은 정부와 권력이 결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민간이건 시민이건 백성이건 민중이건 다중이건, 그 어떤 표현이라도 상관 없지만 권력 바깥에서 작동하고 발화하는 연대와 운동, 혹은 활동을 다시 고민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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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