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기획연재_ 도시와문화정책⑨] 바이러스, 도시, 문화정책

CP_NET 2020. 3. 6. 13:37

병마로 인하여 뒤숭숭해진 도시를 목전에 두고 문화도시, 혹은 도시의 문화를 이야기하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도시의 모든 문화프로그램과 행사는 멈췄고 연기되고 취소되었다. 모든 이벤트는 바이러스 이후로 미뤄졌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명명된 바이러스성 폐렴이 전파되기 시작된 지 근 한 달여가 넘었으나 잦아들 기세가 보이지 않는다.

 

현대 인간 사회에서 질병은 단지 의학적인 치료나 예방의 대상만은 아니다. 이번 코로나19 상황에서 드러나듯 질병은 그 자체로서는 가치중립적인 것이지만 사회적인 담론을 생산하고 정치적인 변곡점을 만들어낸다. 특히 존재하지 않던, 그래서 치료법이 확실하지 않은 새롭게 변형된 병균이나 바이러스가 등장할 때의 파장은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니다. 극복되지 못한 고통과 죽음이라는 전제 앞에서 가뜩이나 현대의 불안을 겪는 사람들이 팽팽한 이성의 끈을 유지하고 있기란 쉬운 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 아프리카에서 에이즈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공포를 지금도 기억한다. 전염성은 높지만 비교적 치사률은 낮은 코로나19와는 달리 에이즈는 치사률이 매우 높은 병이었고 치료 자체가, 그 당시 의학 수준에서는 불가능한 불치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 공포가 한층 더 크게 작용했다. 이 공포는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되었는데 우선 한 가지는 대대적인 호모포비아 현상으로 이어졌다. 에이즈가 동성 간의 성접촉으로 전염된다는, 사실과는 차이가 있는 주장이 오랫동안 대중들에게 믿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인종적 편견과 연결되었다. 에이즈가 아프리카 원숭이들과 접촉한 지역 원주민들에 의해 생겨난 병이라는 주장이 근거가 되었다. 에이즈가 아프리카 원숭이와 유관한 질병인 것은 사실이지만 실상 이 병이 어떤 과정을 통해 인류에게 퍼졌는지 알 수 없음에도 마치 흑인 = 아프리카 원숭이 = 불순한 어떤 것이란 식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앞서 언급한 호모포비아 현상과 마찬가지로 흑인에 대한 배제의 논리는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것은 한편으론 1960년대 중후반부터 서구 사회를 온통 흔들었던 저항 문화 담론에 대한 역공의 이데올로기화이기도 했다. 동성애를 포함한 성적 자유와 인종 간의 경계 허물기는 68세대 이후 서구 사회 청년문화의 주된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1980년대 초중반 에이즈에 대한 서구 사회, 특히 미국 사회의 대응 논리는 병을 근거로 하여 사회를 다시 보수화시키는 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매우 치밀하게 엮여 있었다. 에이즈가 당시 아주 심각한 피해를 보였음에도 당시 레이건 행정부가 이 병에 대하여 성소수자들이 걸리는 병이라는 것을 이유로 공식적인 자리에서 언급조차 잘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그런 사실을 보여준다. 레이건 대통령이 에이스의 희생자였던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제로 아웃팅 당한 게이인) 배우 록 허드슨과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실상 이런 새로운 질병에 대한 피해는 매우 유서 깊은 것이었다. 과거 공공의료체계가 매우 미미하게 존재했던 시절에는 역병에 의한 피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벌어졌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14세기 아시아와 유럽을 덮친 흑사병(페스트)은 당시 대략 45000만 명 정도 되었던 세계 인구를 35000만 명 수준으로 줄여놓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이것이 정확한 통계라고 할 수는 없지만 거의 20%에 달하는 세계 인류가 흑사병의 창궐에 희생당한 것이다. 병마에 의한 인류의 대규모 희생은 의외로 20세기 초반까지도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라고 불리는 변형 인플루엔자(독감) 바이러스는 1918년 등장하여 2년 간 당시 16억 세계 인류 중의 30% 수준인 5억에 이르는 감염자를 낳았고 대략 적게 잡았을 때 2500만 명에서, 많게는 1억 명으로 추산되는 사망자를 낳았다고 전해진다. 이 독감에 대한 기록은 일제 강점기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조선인 약 1,678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742만 명(44%) 정도가 감염되었고 이중 139,128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전체 감염자의 1.87%, 전체인구의 0.83%가 일종의 변종 독감에 의해 희생된 것이다. 중세 시대의 흑사병에 비하면 현저하게 떨어진 사망률이지만 최근에 국제 사회에서 이슈가 되었던 감염병들인 조류독감이나 메르스,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19에 비하면 훨씬 높은 피해가 나타났다. 그렇지만 중세의 흑사병과는 매우 눈에 띄는 차이가 있긴 했다. 흑사병이 일단 감염된 이들의 생존률이 극히 낮았던 것에 비해 스페인 독감은 감염률은 매우 높았지만 사망률은 훨씬 떨어졌다는 것이다. 특히 스페인 독감에 의해 심각한 사망이 나타난 곳이 의료 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는 전쟁터나 근대 문물이 들어가지 않고 있던 사모아 원주민이나 이누이트(에스키모) 집단으로 나타났다. 사모아 원주민들의 경우 거의 90%가 감염되었고 30% 가까이 사망했다고 한다. 반면 전쟁터와 거리가 멀고 근대적 국가체계가 들어서 있던 곳에서의 사망률은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경우처럼 1%에 못 미쳤다. 역사를 가정할 수 없지만 만일 조선이 운좋게 일본의 식민지가 되지 않았는데 자체적인 근대화도 이뤄지지 않은 채 조선왕조의 전근대적 질서가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로 스페인 독감의 상황을 겪었다면 어떤 참극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 힘든 노릇이다. 근대적인 도시화가 이루어질수록 개개인이 밀접하게 어울리는 생활 환경으로 인해 집단 감염의 가능성은 높아졌고, 그래서 실제 서구 사회가 도시화되는 초창기에 여러 가지 종류의 역병을 경험하면서 공공 위생이란 개념이 생겼고 공공에서 질병을 관리하는 체계를 계속 갱신하는 과정을 거쳐왔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근대 사회 체계는 어떤 심각한 감염병이라도 어느 정도 수준에서는 관리할 수 있는 방법을 100여 년 이상 전에 갖추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염병과 근대도시

 

물론 이 과정이 언제나 매끄럽고 합리적이거나 친절하거나, 혹은 평등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 스페인 독감 유행 시기에 그럭저럭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되는 소위 일제 시대의 식민지 위생 행정을 봐도 드러난다. 일제 조선총독부는 <전염병 예방령>을 제정하여 집행했는데 이 법률에서는 전염병 예방에 대한 경찰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는 3개월 이하의 징역, 100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되어있다. 이는 당시 일본 정부가 같은 시기에 일본 본토에서 집행한 위생 행정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일본 본토에서는 어떤 이가 전염병 의심자로 지목되더라도 의사에 의한 진단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어떤 강제적 조치도 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전염병 예방령>이 무소불위의 도구가 되었다. 특정인이나 마을이 전염병으로 의심되면 무조건 그 지역을 전면 봉쇄하는 방식을 택했다. 어떤 마을에 전염병 환자가 나오면 그 마을 자체의 통행을 물리적 강제력으로 모두 막아버렸다. 그 안에서 나오는 희생자를 사실상 방치하는 것이었다. 식민지 피지배 계층의 인권 자체가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 경제적 효율성 때문이었다. 공공에 의한 적극적 치료가 아닌 희생자, 피해자를 배제함으로써 감염의 고리를 끊어내는 방식이었다. 발병한 환자에 대한 치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일제의 위생 행정 정책에서 병원이란 조선인에게는 사실상 치료소가 아니라 감금과 격리의 장소였다. 병원에서는 적극적인 치료 대신 아주 기본적인 간호만 이루어졌고 그래서 조선인에게 일제시대의 병원이란 죽음을 위한 대기소로 비추어졌다. 그래서 일제 시대 초창기 조선에서는 전염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환자들과 병원 입원을 강제 집행하는 공권력과의 실랑이가 흔한 광경이었다고 한다. 물론 힘없는 식민지 백성이 공권력을 당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이즈가 서구 사회의 신보수주의와 만나서 만들어 낸 각종 혐오증, 일제 시대의 위생 행정에서 나타나는 인종과 계급이 복합된 폭력적 배제와 격리의 방법론은, 물론 질병을 대하는 현대 사회의 모습으로 일반화시킬 수 있는 것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시시때때로 새로운 모습으로 변형되어 창궐하는 감염병 바이러스가 갑자기 전지전능하게 관리되던 (혹은 관리된다고 믿어지던) 근대 사회와 돌출적으로 만났을 때 벌어지는 매우 거칠고 왜곡된 반응이거나 경제주의적 대응에 가깝다. 근대 사회는 감염병과 100년 이상을 대결해오며 훨씬 유연하고 인격적인 대응 방식을 만들어냈고 시스템을 갖춰왔다. 한국 사회의 경우도 특히 최근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국민의 안전이 정부의 최우선적 과제라는 강력한 신념 체계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 시국을 거치고 있는 한국 사회 담론 영역의 일각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공공의 안전을 이유로 개개인의 인권이 쉽게 무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나 질병의 원인에 대해 인종주의적으로 접근하려는 시도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코로나19라는 정부의 공식명칭이나 COVID-19라는 국제보건기구의 공식 명칭에도 불구하고 유독 중국의 특정 지역과 엮어진 명칭으로 보도하고 있는 언론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 여담이지만 본문에서 언급한 20세기 초반의 스페인 독감 - 변형 인플루엔자 - 의 경우 사실 최초 발병지는 미국이었다. 다만 당시가 세계1차대전의 막바지여서 각국 정부가 이 병에 대해서 지독하게 언론 통제를 했고 이 와중에 스페인 언론에서만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스페인 독감이란 엉뚱한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런 감염병의 사회적 반응을 보고 있노라면 애드거 앨런 포우가 1840년대에 쓴 단편 소설인 <붉은 죽음의 가면>이라는 작품이 떠오른다. 가상의 시공간, 대강 중세 중후반의 유럽이라 추정되는 지역의 어느 도시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세상은 몇 개월 째 적사병(Red Death)’이라는 무시무시한 질병으로 가득 차 있다. 명칭만 봐도 흑사병(Black Death)을 연상하게 만드는 이 병은, 사실 죽음 그 자체이다. 이 병균에 감염되면 곧 코피를 쏟고 무조건 죽는다. 환자의 몸과 얼굴에 생기는 진홍색 반점은 적사병의 조짐으로, 그 조짐이 보이고 반 시간 안에 모두 죽는다. 동정도, 치료도 불가능한 질병이다. 도시 인구의 절반 정도가 적사병으로 희생되자 도시의 지배자인 프로스페로 대공은 그런 죽음의 역병을 피해 자신을 추종하는 1000여 명의 상류층들과 함께 피신처에 머문다. 굳은 성벽과 쇠를 녹여 용접한 쇠문으로 둘러쌓인 사원은 주인장의 호사스럽고 기괴한 취향에 맞춰 장엄하고도 매우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곳에서는 죽음의 공포나 슬픔의 심연은 잊혀져 갔다. “대공은 그 안에 모든 오락거리를 다 가져다 놓았다. 광대가 있었고, 즉흥시를 짓는 시인이 있었고, 발레리나가 있었고, 음악가들이 있었고, 미인들이 있었고 술이 있었다. 이 모든 것과 함께 안전함이 사원 안에 있었다. 적사병만이 없었다.” 그러나 대공이 자랑하는 은신처에서의 쾌락의 파티가 절정에 이르는 어느 저녁 적사병은 붉은 희생자의 가면을 쓴 인격체의 모습으로 그곳을 엄습한다. 다분히 암울하기 짝이 없는 결말로 마무리되는 이 소설은 환상 문학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평생 가난에 시달리며 전염병(결핵)으로 가족을 모두 잃어야 했던 포우가 바라본 19세기 자본주의 산업화 초창기의 잔혹한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러스는, 그 자체로서도 심각한 재난이겠지만 그 상황을 거치며 사회에 잠복해있는 다양한 고질적 질환들을 이끌어 낸다. 실제 코로나19의 사망 희생자들이 평소에 지병을 안고 있던 고위험군 환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이러스 사태를 겪어내며 쏟아져 나오는 비정상적이거나 위험해 보이는 사회적 대응 방식은 실상 평소에 언제나 사회의 구성원들의 무의식 지층에 깔려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눈에 띄게 선정적이고 공격적인 반응뿐만 아니라 각자도생을 위해 타인의 안전이나 권리 따위는 쉽게 희생할 수 있다는 태도들도 코로나19가 그 진짜 근본 원인은 아니다.

 

 

멈춰선 지금 그리고 이후 우리는

 

코로나19의 사회적 염려 속에서 대부분의 사회적 행사가 멈춰있는 이 시기, 문화기획 분야 역시도 어쩔 수 없이 잠시 숨 고르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 비의도적으로 놓여있다. 모든 문화 이벤트가 정지되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문화예술계라는 특정 분야에 국한해보자면 국가적 사태 못지 않게 심각한 위기의 국면이다. 사회가 유사한 국가적 재앙을 겪을 때마다 공공 문화 사업의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높은 많은 문화단체, 문화기획자, 예술가들은 매우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국가적 재앙이 지나고 난 이후, 운영난에 해산되어 사라지는 예술단체가 실제로 적지 않다는 것 또한 재난의 병통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 사회의 취약한 속살 중 한 단면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사태 이후에는 의례히 국민 통합을 명분으로 한 대규모 국가 주도 문화 이벤트가 마련되어지고는 하는데 어려운 한 시절을 견뎌낸 문화단체들이 이런 전형적 국가 문화이벤트에 또한 어떻게든 호명되어 끼어들어가고자 하는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씁쓸한 모습도 숱하게 보아봤다.

 

이런 예상되는 국면에서 단순한 불편함이나 호불호를 떠나 찬찬히 고민해야 하는 지점 몇 가지가 여기서 도출된다.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드러난 한국 사회의 속살, 담론 구성체의 복잡한 지형 속에서 문화예술이 분열된 사회 갈등을 조정하고 국민 통합을 이끌어낸다는 식의, 숱하게 써먹고 있지만 그 어떤 근거로 설명하기 힘든 비논리적인 주장 말고 어떠한 기여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앞서 언급했던 포우의 단편 소설은 결코 병마 속에서 통합되는 세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 위기의 본질을 상상하게 하고 암시하는 것을 통해 원인을 향하여 한발 더 나아갔다. 문화, 혹은 문화정책이 단순한 즉효약이나 도구적 솔루션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적 의제들과의 팽팽한 긴장을 만들며 궁극적으로는 기여할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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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