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정책과 정책을 실행하는 행정에 대한 현장의 비판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 과정 거쳐 수립된 정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행되는 과정에서 이슈들이 발생하게 마련입니다. 그만큼 현장은 역동적이며, 그 과정에서 정책과 행정은 회색을 벗고 현실에서 작동합니다. 그러나 중앙정부 정책부터 기초문화재단 불통까지 그야말로 사건, 사고라 할 일들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의 사건들은 익숙하다면 익숙하지만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문제적입니다. [문화정책리뷰]는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파행, 불통의 사건들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와 진단을 게재합니다.
① 문화도시에서 거버넌스는 왜 실패하는가? - 신뢰자산을 허무는 조급함과 얕음에 대하여
나는 영도에 10년째 살고 있는60대 후반의 남성이다. 보통의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지역사회와 유리되어 살고 있었다. 내 직업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경쟁과 실적 쌓기에 분주하여 지역사회에 눈 돌릴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영도로 이사 온 후 비로소 지역사회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알고 지내는 영도사람의 절반 이상은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아침저녁 일정한 시간에 바다숲길을 산보하니 이 사람 저 사람 매일 마주치면서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며 생겨난 인연이다.
수십 명의 동네 마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면서 지역사회를 알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주민자치위원회, 나아가 시민단체 ‘영도희망21’에 참여하게 되었다. ‘영도희망21’에서 영도주민들의 독서모임, 남성모임 등을 꾸려가고 있던 차에 영도문화도시센터를 알게 되어 동아리 지원 프로그램에 신청하게 되었다. 영도문화도시센터 사업 4년 차였던 작년이었다. 신청한 팀들 대표가 모두 한 공간에 모여 조별로 나누고 각 팀의 주제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다. 각 팀의 주제와 내용을 소개하는 A4 종이가 벽에 줄줄이 붙어 있어, 소속 조 이외 다른 팀들의 아이디어를 살필 수 있었다.
이런 자리가 처음이었던 나는 두 가지 놀랐다. 조별 모임 때, <공존선언문>을 먼저 함께 읽고 시작한 것이 하나이다. <공존선언문>은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존엄하며 평등하다’의 5개 항목과 ‘성평등한 문화도시 영도를 위해 약속해요!’의 3개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항목들 가운데 하나는 “우리는 나이, 성별, 성 정체성, 장애와 혼인 여부, 출신 지역, 학력, 직업 등을 이유로 차별하지 않으며 상호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 갑니다”였다. 영도문화도시센터를 이끄는 젊은 세대의 인권의식이 이렇게 구체적인 내용을 갖추고 있어 놀란 것이다. 최근에 서울의 주민자치회에 관한 강연을 들었다. 첫 모임에서 규칙의 하나는 참가자들이 서로 나이와 직업 그리고 학력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여전히 우리 일상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성별 이분법 시각, 서열의식, 능력주의가 바탕에 깔린 우월/차별 의식을 깨뜨리고자 하는 시도로 해석된다. 여성들이 대부분인 모임에 기꺼이 참석하고, 얼마 전 ‘영도희망21’의 기금마련 일일주점에서 체면 구겨지길 꺼리는 내가 삐에로 모자를 쓰고 손님맞이에 나섰다. 내 일상 행동에 일어난 변화에 <공존선언문>도 일조했다.
문화예술의 힘이 인간행동을 변화시키는 현상은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도문화도시센터의 지원으로 신선동 할머니들은 자신의 삶을 구술하여 책으로 내었다. “울고 웃고 주저앉았다 다시 일어서고” 했던 삶이 작년에 『도래; 삶』으로 모아졌다. 이분들은 최근 ‘영도 시민행동의 날 기자회견’ 행사에 들 피켓 문구를 만들었다. “80에 연극 배워 90에 데뷔할 건데, 끝내면 어쩌라고?” “문화도시 끝나면 나 집에서 뭐하노? 한약방 가서 침이나 마즈까?” 등등. 피켓 문구를 만든 창의력은 ‘영도할매 마을 강사 육성 프로젝트’를 통해 평범한 할매가 대중 앞에서 강의할 수 있었던 것이 원천이었을 터이다.
또 하나는 주민들이 제안한 동아리 모임의 다양하고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뜨개질, 악기, 독서, 그림 등 전통적인 콘텐츠 외에도 많았다. 전통놀이 즐기기, 골목 놀이, 어르신 도시락 나눔, 네 컷 만화, 발달장애 부모 마음 치유, 바닷가 쓰레기 줍기, 탄소중립 실천, 고립 어르신 찾아가기, 아파트 주민 소통, 영도숲 탐방 등은 영도문화도시센터의 사업이라는 마중물이 잠자고 있던 시민들의 창의력을 퍼 올린 결과이다. 세대 간 교류, 환경 감수성 제고, 소외계층 돌봄, 환경생태 등 예술 이외에도 영도가 지닌 지역사회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선정되지 못한 듯하나, 기억에 남는 주제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영도 일부 구간의 집 창문을 장식하자는 제안이었다. 저녁 어스름 무렵 스테인드글라스 불빛이 아롱다롱 색깔진 창문들로 연이어진 영도의 가로길. 상상만 해도 아름답다.
이후 내 동아리의 제안이 선정되어, 라운드테이블, 동아리 상호방문, 맺음공유회 등의 모임에 종종 참석했다. 선정된 개별 동아리당 100만 원 전후의 지원금,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액수이기는 한데, 오라 가라 성가신 요구가 마뜩찮았다. 찡그린 얼굴로 막상 참석하고 보니,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다른 세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런 교류 모임에 가면 40대 전후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비교적 많았다. 이들은 대개 초중등 학부모이리라. 참석 학부모들은 영도에서 바깥으로 이사 나갈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부모들이 많아 보였다. 사업에 참가하면서 자식을 ‘Best One’이 아니라 ‘Only one’으로 키우자고 생각이 바뀌었다는 학부모도 있었다. 내가 사는 소규모 아파트에서도 한집 두 집 젊은 부부들이 영도 밖으로 이사를 나가고 있는 걸 목격하고 있으니, 대비된다. 2023년도 영도구의 신입생이 초등학생은 511명, 중학생은 693명, 일반계 고등학생은 222명이다. 베이비부머 세대 어릴 때의 한 학교 정도에 불과한 입학생 수이다. 문화와 예술을 일구어가는 젊은 학부모들이 영도에 애정을 가지고 버티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있기에, 빠르게 추락하는 신입생 감소속도를 그나마 조금 낮추고 있으리라.
노년 세대와 학부모 세대가 변하고 있다면, 아이들은 어떨까? 어린이 문화예술교육 전용공간인 ‘보물섬 영도’. 조타실 선실 해도실 등으로 구성된 ‘보물섬 영도’에서 공구를 들고 웃고 떠들며 어린이들이 어른의 시야를 의식하지 않고 장난치고 작업한다. 아이들은 멍들고 놀면서 자라는 것이건만, 애지중지하는 한 자녀의 시대이다. 다치기만 하면 난리나는 것이 현실인 것을 생각하면, ‘보물섬 영도’는 부모와 점수로부터 자유로운 아이들의 아지트요 해방구이다. ‘보물섬 영도’에서의 자유로운 경험은 아이들에게 깊이 각인되어 있다. 여기다 최근 어린이가 직접 운영하는 일일마켓 행사도 새롭고 신나는 일이었다.
‘보물섬 영도’를 가능하게 했던 영도문화도시센터 사업이 종료되고 “영도 시민행동의 날 기자회견” 행사가 열린다는 소식을 아이들이 들었다. 아이들은 피켓 문구와 편지를 보내 자신들의 바람을 어른들에게 알리고 싶어 했다. 한 어린이는 정성 들여 지우고 고쳐 쓴 흔적을 남긴 그대로 한 장 가득 채워 “관계자 여러분께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영도 도시문화센터가 사라지지 않게 해 주세요”로” 끝맺은 손 편지를 보내왔다. 또 다른 아이는 ‘보물섬 영도’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는데‥‥‥정말 속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라고 토로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아이들의 피켓 문자와 손글씨 편지, 이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교육이 어디 있을까?
영도문화도시센터 사업 4년 차 초에 사업정보를 듣고 설명회에 참석했다. 센터장은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지속가능성을 강조했다. 도시재생사업이 집 담장에 그래피티를 그린다든지, 리모델링한 건물을 선보인다든지 하다가, 지원 자금이 끊기면 그것들이 흉물로 남겨지는 사례를 종종 보았다. “눈먼 돈은 빨리 찾아 먹는 자가 임자”. 공적 자금을 투입하는 영도문화도시센터 사업도 그럴 것이라고 나는 예단을 하고 있어서, 지속가능성에 반신반의했다. 영도도시문화센터의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영도 기획자의 집’을 운영했다. 실험문화기획자 과정, 생태문화기획자 과정 등 5개 과정으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전에는 여성기획자 워크숍도 개최되었다. 대학에서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문화기획자 양성이 현장 속에서 진행된 것이다. 영도문화도시센터가 찾아낸 지속가능성 돌파구의 또 하나는 지역사회 소상공인과의 사업연계로 보인다. 영도의 책방, 가게, 공방, 공예, 문화공간 등과 협업하는 ‘소상공인 매칭 프로젝트’, 그리고 올해 새로 선보인 ‘영도 로컬문화 비즈니스 커뮤니티 공동 프로젝트’는 문화기획자들의 비즈니스를 뒷받침하여 수익성을 팀색하려는 시도로 주목된다.
소멸위기 1,2위 자치구인 영도. 영도구청은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위기감을 가지고 실효성 있는 대책을 마련하고 있을까. 영도구청의 예산에 자치역량 강화, 문화산업육성, 취약계층 지원, 청년지원사업, 유치원 초중등 지원비 등이 할당되어 있다. 백발 할머니들이 물감 풀어 색칠하고 자신의 작품을 들고 만족한 표정, 문화예술로 행복감을 만끽하는 학부모, 문화기획자로 일자리를 찾는 청년, 구김살 없이 놀고 까부는 아이들. 세대 간 갈등이 차오르고 있는 현재, 전 세대에 걸치고 세대가 서로 어우러져 문화예술로 영도를 살리는 아이디어와 실천은 제도 속에 갇혀 있는 공무원들로서는 하기 어렵다. 구청장의 공약이나 구청 공무원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영도문화도시센터가 앞서서 하고 있는데, 일몰 마감한다? 거기다 윤석열 정부의 ‘문화도시’ 조성사업에 신청하는 도시마다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영도문화도시가 아닌가? 영도문화도시는 ‘영도 효과’ ‘영도 모델’로 진화하고 있다.
10분 20분 더 빨리 가자고 수천 억을 들여 영도에 터널을 뚫는다고 하고, 도시철도를 부설하자고 한다. 여전히 토건주의, 개발주의에 빠져 있는 발상이다. 영도주민이 행복해야, 대한민국이 행복해진다. 유형의 사회적 인프라 이상으로 무형의 문화예술이 더욱 중요해지는 시대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문화예술에 대한 투자는 줄어들 수 없다. 누구나 문화예술을 누리고 싶은 갈망을 채울 수 있을 때, 국민행복지수가 높아진다. 선진국이라는 한국이 국민행복지수는 세계에서 밑바닥이다. 출산율 급감은 GNP만 쫓아갔던 시대와 우리가 결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고이다.
하세봉. 대학에서 동아시아 역사를 가르친 적이 있다. 노인 일자리로 자폐아동을 돌보고 영도의 시민운동에 참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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