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⑧] 사반세기를 향해가는 지역문화정책 – 2001년 “지역문화의 해” 1

CP_NET 2024. 6. 23. 17:24

 

 

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시작하며- 기원을 입체적으로 복기하기_ 염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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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1_ 염신규
1996,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2_ 염신규
1996년,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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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지역문화정책을 얘기할 때 대다수의 정책가들은 2001년 전후를 기점으로 잡는다. 다름 아니라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이하 문화부)2001년을 지역문화의 해로 선포했었기 때문이다. 문화부가 특정한 연도를 “OO의 해로 지정하는 경우는 종종 있어왔다. 예를 들어 2020년의 경우는 연극의 해였고 1996년은 문학의 해였다. 주로 특정 예술 장르와 관련된 해를 지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2001년은 다소 특이했다. 지역문화를 공공정책에서 본격적으로 호명한 출발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지역문화란 개념이 문화정책 분야에서 너무 상식적인, 혹은 당연한 것이 되었기 때문에 딱히 특별한 감각이 느껴지지 않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 “지역문화의 해를 특별히 선포하고 사업을 만들어야 할 만큼 지역문화정책의 불모지에 가까웠다. 한국 사회에서 지역문화가 꽤 오랫동안 잘 부각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국가 수립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 전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다수 현대적인 국민국가들이 정부 수립 초창기에는 민족이나 국가 정체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문화정책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근대국가 초기에는 지역문화와 같은 내부적 개별성이 별로 주목되지 않고 국가문화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이런 경향은 꽤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내부적 동력에 의해 자연스럽게 수립된 근대국가보다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근대화가 강요된 후발 근대국가들에서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외부의존적 근대성에 대한 콤플렉스의 영향인지, 아니면 자기주도적 근대성을 다시 획득하기 위한 회복의 노력인지는 좀 더 면밀한 관찰과 연구가 필요하겠지만 분명한 것은 후발 근대국가들의 민족문화, 국민문화에 대한 강조는 한국에서만 나타난 특이한 현상이 아니라 한국과 유사한 상황에 처했던 여러 국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현상이었다는 점이다. 예를 하나 들자면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 집권 시기에 복고적 민족문화 중흥에 너무 많이 투자했다가 국가 재정에 어려움을 겪었던 인도네시아를 꼽을 수 있다.

 

이런 통합적 국가문화(혹은 민족문화)에 대한 강조 속에서 개별성이 강조되는 지역문화가 소외되는 근대국가 초기의 일반적 속성도 있었지만 그 못지않게 한국 사회가 조선 시대 이후 꽤 오랜 기간 상당히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형태를 유지했던 점도 지역문화가 빠르게 성장하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왕조인 동시에 성리학에 의해 지배되는 이념국가의 속성이 강했던 조선은 성리학적 윤리의 보편성을 강조하면서 지역이나 향토적인 속성을 낮고 천한 것으로 폄하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윤리적 보편성이란 이념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상은 조선이 집권 초기부터 취했던 통치 방식, 지방 호족들을 해체시키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지역을 강하게 통제하는 구조에 명분을 실어주기 위함이었다. 이런 경향은 근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으며 지역문화를 열등한 것으로 보는 선입관을 강하게 형성하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 수도권 중심의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가 더해졌다. 한국에서 지역 문제에 대해서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빨라도 1980년대 이후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각 지역에 대한 발전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런 계획들은 대부분 수도 서울을 정점에 둔 수직적 위계구조에서 지방의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의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지역은 각각의 주체화된 범주로 인식되기보다는 중앙, 혹은 대한민국이란 큰 틀의 권력구조에 종속된 하위범주로 취급되어 왔다..

 

 

지방자치제, 문화복지, 도시경쟁력

 

이렇게 지역문화가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공식적으로는 완전히 무시되거나, 아니면 향토문화란 이름으로 복고적 관점에서 지엽적으로 다루어지다가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문화정책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1990년대 전후로 본격화된 지방자치제도의 실시였을 것이다. 해방과 건국 당시 한국은 지방자치를 공식화한 국가였으나 1961년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방자치에 관한 임시조치법을 만들며 지방자치를 남북통일 이후 유보시켜 왔었다.. 그러다가 19876월 항쟁 이후 민주화조치가 이루어지면서 지방자치법을 부활시켰고 1991년 다시 지방선거를 치르기 시작했다. 현재와 같은 형태의, 비교적 완전한 형태의 지방자치가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이후로 볼 수 있다. 지방자치제도의 부활은 그 이전까지 중앙정부의 결정에 따라 단순하게 행정사무를 집행하는 기구에 불과했던 지방행정의 역할과 기능을 변화시키기 시작했고 문화정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지방정부가 지역 상황에 맞는 문화정책을 스스로 입안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한국 사회가 1990년대를 기점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확실히 중진국 이상의 역량을 갖춘 국가로 성장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는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 국민들의 삶의 질적 측면이 강조되었고 이는 결국 정책에선 문화와 복지의 문제로 귀결되었다. 이런 조짐은 실은 군사정권이 유지되던 1980년대에도 그 전조를 볼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각 지자체마다 조성되기 시작한 문화예술회관(문예회관)이다. 문화예술회관은 그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1983년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의 수정계획에 포함되며 1지자체(기초) 1문예회관이란 원칙이 공식화된 바 있다. 1983년 수정계획에서 문화시설의 전국적인 확충지방문화 육성을 통한 대국민 문화 향유 기회 확대를 천명했고 이를 근거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지자체별 문화예술회관 건립 정책이 마련되었다. 특히 199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시작된 문화복지·문화향유정책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도 중앙의 탁상행정에서 일률적으로 이뤄지는 문화정책 입안이 아닌 지역 상황을 고려한 정책이 필요했다.(지난 기사 참조)

 

국제적 흐름에서도 지역문화의 필요성이 강조되어야 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1970, 80년대를 지나며 세계적으로 지역 간 경쟁을 둘러싼 양상이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전통적인 지역 간 경쟁이 주로 국가를 단위로 이뤄졌다면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도시 간 경쟁이 중요한 요소로 떠올랐다.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도시경쟁력이 부쩍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전통적 제조업 중심의 산업도시의 시대가 저물면서 성장동력을 상실하고 있는 도시경쟁력을 어떻게 유지하거나 활성화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다양한 방법론이 등장했는데 여기에 문화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주목을 받았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문화도시 담론이나 세계금융위기 이전까지 매우 인기를 얻었던 창조도시 같은 개념이 모두 이 시기의 산물이다. 전통적인 문화도시 개념은 현대화·산업화에 의해 훼손되는 도시의 전통과 문화적 요소를 보존, 전승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지만 도시경쟁력이 강조되면서 그 차원을 넘어서 도시의 문화적 요소를 활용하여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거나 창의적 인적 자원(이른바 창조계급)을 모으고 성장시키는 전략이 도시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담론이 해외에서 들어오기 시작했다.

 

문화를 통한 도시성장 담론은, 실은 그 이면을 뜯어보면 도시의 장소적 매력을 끌어올려서 투자가치를 높이고 이를 통해 부유하는 국제 유동자산을 끌어들이는 것에 방점이 찍혀있었고 그 때문에 금융위기 이후 유동자산이 급감하면서 현재에는 한창 주목받던 20세기 막판만큼의 주목도가 떨어지기도 했고 젠트리피케션 같은 또 다른 도시 문제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는 측면이 있어서 반성적 성찰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지만 이런 것들이 사반세기 전에 미리 상상할 수 없는 부분들이었다. 오히려 막 지방자치제도를 도입하고 도시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1990년대 한국사회에선 문화도시 등의 새로운 도시전략에서 내세우고 있는 도시 브랜딩이란 개념이 생소하면서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이처럼 늦게 부활한 지방자치제도, 뒤늦게 관심을 갖게 된 시민들의 문화적 삶(문화복지), 문화적 측면에서의 도시(지역)경쟁력의 요구가 1990년대 한국 사회라는 시공간에서 동시에 집중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2001지역문화의 해를 선포한 문화부의 방향 설정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당시 문화부는 “2001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회”(위원장 이중한)를 발족하고 지역 간 문화격차 해소와 각 지역문화 정체성 재창조 등을 목표로 10개 사업을 만들었다. 당시 10대 사업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1 지역문화의 해 10대 기획 사업>


백가쟁명식 대토론회 - 전국지역문화 현역 활동가 100명이 접근성이 편리한 대전지역에서 열띤 지적 난장
지역문화 컨설팅 지원사업 - 지역문화의 기획력과 전문성 강화를 위한 노하우 지원
지역문화의 해 종합 웹사이트 운영 - 지역문화 정보교류 확대, 사이버 관련사업 네트워크 기능 강화
현장출동형 지역문화의 해 출범 문화 행사
지역특성 문화현장 탐방 및 현장 대화 - 출향예술인과 지역문화 관계자들의 입체적 지역문화 집중 조명
지역사회 발굴 지역특성화 프로그램 지원사업
지역문화예술 및 아마추어단체의 지역내외 순회프로그램 지원
지역청소년 주민대상 향토문화강좌 상설 운영
사이버이벤트 프로그램 운영
영상세대인 청소년 지역문화 영상물 공모

 

 

지역문화에 대한 주체들의 복합적인 입장

 

당시 이 사업들에 대한 문화 현장의 평가는 어땠을까? 당시 기사를 살펴보면 그다지 긍정적이진 않다. “백가쟁명 대토론회는 토론회 자료집에서 드러났듯 급하게 준비된 측면이 많으며 분과별 토론회 원고는 내용 편차가 너무 심하고 군데군데 발제문이 누락”, “지역문화 컨설팅 사업 또한 전화나 이메일 등을 통한 제한적인 방법을 통해서 진행됐기 때문에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고 그나마 몇몇 단체에 대한 집중적인 컨설팅의 결과로 인해 지역문화 컨설팅 사업 전체가 부정적 평가를 면한 것이 다행”, “나머지 사업들도 대체적으로 보여주기, 생색내기식으로 치러진 측면이 많으며 특히 사이버 이벤트 프로그램 운영이나 지역문화 영상물 공모 사업 등은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고 주제를 환기시키는데 실패함으로써 저조한 참여율등으로 기록되고 있다(“2001 지역문화의 해 무얼 남겼나”, 오마이뉴스, 20011221 )

 

그러면서 지역문화가 1년짜리 단발적정책사업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으며 1년 간의 사업의 미흡함을 출발점으로 잡고 중장기적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렇듯 현장에서 제기된 중장기적 지역문화 활성화 정책에 대한 의지와 요구는 바로 직후 집권하게 되는 참여정부의 문화정책에서 상당 부분 수용되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지점이 있다. 아주 초창기부터 지역문화에 대한 개념이나 인식, 지역문화가 활성화된다는 것을 바라보는 입장이 매우 복합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인식의 차이를 정리하여 지역문화정책의 큰 방향을 세우겠다는 것이 10대 사업 중 첫 번째 였던 백가쟁명식 대토론회였는데 그 기록을 읽어봐도 지역문화에 대한 각 주체들 간의 인식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다음 회에서는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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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본지 편집위원.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