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⑥]1996년,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3

CP_NET 2024. 5. 8. 22:58

 

 

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시작하며- 기원을 입체적으로 복기하기_ 염신규
이른바” 3S정책1: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_ 염신규
이른바” 3S정책2: 개방과 강력한 통제의 공존_ 염신규
1996,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1_ 염신규
1996,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2_ 염신규
1996,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4, “‘문화의집을 둘러싼 동상이몽”_ 우지연

 

 

앞서 언급했듯 한국의 문화향유·복지정책은 엄청난 양적 성장을 거듭해 온 것으로 스스로를 포장해 왔다.. 실제로 예산이 많이 늘어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단적인 예로 복권기금에서 전입하여 사용하고 있는 문화나눔사업 기금 규모의 변화추이를 살펴보면 2004년에 247억 원으로 시작하였고 2008년에는 198억 원으로 감축되었으나 2009년 이후 예산이 늘어 2011년에는 480억 원으로 증가하였고 2015년에는 600억 원이 넘는 예산이 배정되기도 하였다.

 

 

사업을 위한 사업, 여전히 남아있는 전시행정 구조

 

그런데 예산의 변화를 보면 대단히 복잡하게 이합집산(?)하는 과정을 거쳐왔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산 명목과 실제 그 예산으로 진행되는 사업의 성격이 불일치하거나 혼재된, 그래서 예산을 통한 정책 분석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만들어졌다. 각 정권이 그 시기마다 표면적으로 내세우고 있는 전시성 정책 사업에 우선적으로 편성되면서 금액이 조정되고 있다. 즉 국민들의 기본적인 문화적 수요나 사회적 상황에 따라 발생하는 문화적 자원의 투입 필요성에 따라서 정책이나 예산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 정부의 캐치프레이즈에 맞는 정책사업을 문화체육관광부가 명명하면 그것에 따라 제한된 기금예산을 이리저리 돌려서 막아내는 구조다. 비유컨대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방식으로 예산이 편성되어왔다. 문화부의 본 예산보다도 기금을 통한 사업이 특히 그렇고, 여기에 많은 재원을 의존하는 문화향유, 문화복지 사업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현상이다.

 

또한 사업예산의 전체규모에 비해서 각 사업에 붙은 목적이나 대상이 매우 복잡하고 광범위하다. 예컨대 문화나눔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의 경우 200440억 원 예산으로 시작하였고 꾸준히 늘어나서 2017년에는 211억 원 정도에 이르렀다.

 

<그림>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예산추이 2004~2017 (「대국민 향유증진을 위한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개선방안 연구」, 2018, 염신규)

 

 

그런데 이 사업을 보면 예산 규모에 비해 사업 대상이 턱없이 많은 데다 그 대상이 끝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사업의 형식 역시도 쉴 틈 없이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아래의 문장 읽어보라.

 

“2013년에는 공모사업에서 사회복지시설 농산어촌 임대주택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교정시설 군부대를 대상으로 했고 비공모 사업으로 새터민 중소기업 및 산업단지 근로자 소외계층 청소년 재래시장 등에 찾아가는 문화예술 프로그램 제공했는데 200여 개 단체가 2,000여 순회 대상처 방문하여 문화행사를 진행했다. 그러다가 2014년에는 정기공모대상에서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사라지고 자체추진사업으로 북한이탈주민정착지원사무소, 중소기업근로자 및 산업단지 등 정기공모 5개 유형을 제외한 특수지역을 순회하는 기타 시설 순회사업과 공모사업을 통해 수혜를 받기 힘든 소외 계층(쪽방촌, 섬마을 등 격오지 소외지역 주민 포함) 기획사업이 새롭게 신설되었다. 2015년에는 기타시설 순회사업이 발굴형 순회사업으로 명칭 변경되었으며 2016년에는 기존 공모사업 유형별 순회프로그램에서 학교 순회사업이 신설되었고, 발굴형 순회사업이 대규모 공연순회·도서산간 순회·혁신도시 순회 등 11개의 세분화된 소외지역을 순회하는 ‘기획순회’프로그램으로 확장되었다. 2017년에는 자발적 참여가 가능한 순회대상처를 중심으로 대상자 맞춤형프로그램과 자발적 참여가 어려운 순회대상처를 찾아내는 대상자 발굴형 프로그램으로 변경되었다.”(요약 발췌,대국민 향유증진을 위한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개선방안 연구, 2018, 염신규)

 

2013년부터 2017년까지 불과 4,5년 동안 벌어진 이 사업의 변화다. 물론 예산이 20132015년까지는 100억 원 남짓으로 진행되다가 2016년부터는 200억 원 정도로 2배 정도 늘어나긴 했지만 예산 규모의 그 변화에 비해 사업의 형식적 변화가 무척이나 과다하다. 한마디로 사업을 몇 년 꾸준히 해보고 그 결과를 환류하여 사업을 점차 변화해 가는 방식이 아니다. 문화정책사업의 성과를 평가하고 이를 다시 정책에 반영하는 작업은 최소한 3~5년의 텀을 두고 정책사업 결과에 대한 시계열적 평가에 기반하여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 사업이 변화하고 있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 그런 절차를 밟아서 성장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해마다 성과평가를 하고 있으나 거의 계량적 지표에 의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으며 이마저도 그 정확성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기 힘들고 몇 년에 한 번씩 소액으로 짧은 기간에 이뤄지는 성과분석연구 역시 정책 방향설계라고 하기엔 조악한 수준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과정에서도 사업의 변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 한마디로 거칠게 얘기하자면 사업을 위한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의 내용이나 문화향유의 질적 심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문화향유사업도 우리 부처, 혹은 우리 기관이 하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남기는 것에 방점이 찍혀서 설계된다. 향유자(시민)나 행위자(예술가, 기획자)가 아닌 상당히 공급자(행정조직, 공공기관) 관점에 기울어져 설계되고 진행된다. 잘 포장되어 있지만 뜯어보면 전시행정의 성격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

 

 

오래된, 잘 안 바뀌는 문제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가서 한국의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걸 도대체 왜 하는가? 가장 쉬운 답변은 국민 문화권의 보장이다. 그런데 지금 정부·지자체가 투여하고 있는 예산으로 국민 문화권을 제도 안에서 보장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노릇이다. 현재 관련 정책사업에 투여되는 예산으로는 전 국민의 5%에도 혜택이 돌아가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만들어진 논리가 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삼는 선별적 문화향유·문화복지였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 경제적 약자를 일차적 정책대상으로 삼았고, 신체적 요인으로 인한 소외계층인 장애인, 일시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교정시설 수용자 및 군인 등, 문화적 차이에 따른 이주민이나 새터민, 그 밖에 앞선 원인들이 복합된 이들을 정책의 수혜대상으로 삼아왔다. 얼핏 자발적으로 문화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 요인으로 인해 문화활동에서 소외된 이들을 정책대상으로 삼는 방식이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거의 해마다 실시하고 있는 대국민 문화향유조사나 지역별 문화향유조사 결과를 검토해보면 실은 국민 대다수가 심각하게 문화활동에서 소외되어 있거나 매우 제한된 활동만 하고 있다. 또한 문화 활동에 대해 시민들이 갖고 있는 욕구에 훨씬 못 미치는 활동만이 이루어지고 있다. 계층과 지역을 막론하고 비자발적 문화 소외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주된 원인은 시간 부족과 경제적 요인이었다. 이런 조사 결과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조심스럽지만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은 한국 사회에서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의 대상을 특정대상으로 삼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그렇게 대상 한정으로 정책이 짜여진 원인은 그 어떤 이유 때문도 아니라 턱없이 부족한 예산 때문이란 점에서 문제적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로 문화향유·문화복지 등과 관련된 각종 법, 제도들이 만들어졌지만 그것을 시행할 수 있는 예산이 제때 수립된 것은 아니다. 비단 이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예술정책 전반에서 벌어지는 문제이기도 하다. 제도는 끊임없이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예산 대책은 없다. 그러다보니 정책이 없는 것은 아닌데 제대로 작동은 하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문화향유정책의 목표를 약간 더 세분해서 보자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앞서 언급한 국민 문화권의 보장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시민들의 문화적 해득력, 소위 리터러시(literacy)를 성장시키고 잠재적 관객(audience)이나 능동적 참여자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전자가 시민의 기본권 보장이라면 후자는 문화예술시장 활성화와 맞닿아있다. 그런데 지난 근 30년 가까이 진행된 한국의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모두 실패하고 있다. 여전히 국민 대다수는 실질적인 문화소외 상태이고 문화예술시장의 자생성이 강화된 것도 아니다. 문화향유사업은 여전히 단발 행사성 사업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시장을 활성화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보다는 공공에서 공급하는 공짜 예술에 대한 기대심리만 키우고 있다.

 

여기 복류하는 또 다른 문제는 이런 공급형 문화향유정책사업이 실은 자생력이 매우 떨어져 있는 예술단체, 예술인에게 사실상 창작지원사업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반드시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술의 창작과 실연, 향유의 과정은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있고 따라서 문화향유사업과 예술지원사업은 하나의 플랫폼 안에서 상호보완적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현재 진행되고 있는 사업들의 문제는 이것들이 유기적인 연계성이 없으며 사업 목표가 혼재된 채 만들어져서 그 어느 쪽에서도 만족할 수 없는 상태란 점이다. 향유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업을 통해 자신의 취향과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참신하고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나기가 어렵다. 반대로 창작자 입장에서는 신나는 예술여행같은 종류의 사업에 지원되는 저렴한 예산 안에서 그것이 요구하는 사업 횟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작품의 질이나 참신성에서 한계를 갖게 된다. 좀 극단적인 표현을 쓰자면 예술가 입장에서 한국의 문화향유사업은 연명을 위해 존재하는 계륵 같은 존재다. 당장 활동의 지속이나 예술단체의 유지를 위해서 참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사업 구조에 적응해 버리면 점점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하기 힘들어지고 점점 더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지원금에 목을 매게 된다.

 

 

이것이 지속되어야 하는가

 

한국에 현존하는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이 지속될 필요가 있는가? 실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개인적으로, 많은 예술계 동료들의 당장 생계와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최대한 대상의 문화적 상황에 맞춤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와 기획자들을 여럿 알고 있기도 하다. 또한 그런 이들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성과가 만들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런 노력들이 이 정책과 제도의 오랜 방패막이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의 지속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다. 그 이유를 몇 가지 드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다.

 

첫째, 현재까지의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이 갖고 있는 문화적 계몽주의의 한계 때문이다. 정책의 설계 자체가 문화를 갖고 있고 누리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이란 이분법을 갖고 있고 문화예술을 중산층의 교양으로 이해하는 과거의 잣대가 깔려있다. 문화예술에 대한 고정적인 관념을 갖고 시민들의 문화향유 접근하다 보니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행하고 있는 다양한 문화적 행위들을 활성화시키는 것과는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

 

둘째, 절대적인 예산의 부족을 사업의 가짓수나 수혜자에 대한 계량적 접근으로 메꾸다 보니 사업의 질적 저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이에 대한 해법은 두 가지일 것이다. 우선 사업 예산을 파격적으로 늘리면 된다. 정말 1996년에 정책이 처음 설계되던 시기의 구상을 실현할 만큼 파격적인 국가 재정을 쓸 수 있다면 유의미한 정책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안으로 직접적 수혜효과가 아닌 파생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체적인 사업을 전환해야 한다. 이는 현재의 공연 등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대중들에게 뿌려주는 방식을 탈피해야 한다는 의미다.

 

셋째, 공공에서 공급하는 문화향유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보편성의 함정이다. 문화예술향유에 대한 공공정책에서는 늘 모든 세대, 계층이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게 된다. 그런데 단언컨대 그런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강박은 오히려 밋밋하고 재미없는 예술을 양산할 뿐이며 시민들의 문화적 역량을 성장시키는 데 기여하기 힘들다.

 

여담이지만 수년전 이와 관련된 연구를 하면서 해외사례를 조사하는데 소위 주요 국가 중 그 어느 나라에도 한국과 같은 형태의 문화향유정책이 거의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란 적이 있다. 당시 비슷한 과제 연구를 하고 있던 공공정책기관의 연구원과 사담 중에 비슷한 고민에 봉착해 있는 것을 알고 또 한 번 놀라기도 했다. 과거에는 그 국가들에도 이 비슷한 정책사업들이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최소한 현재는 그렇다. 물론 그 국가들에도 문화향유나 문화복지에 해당하는 정책개념이 존재하지만 한국에서와 같이 정부에서 지원조직들을 통해 현장에 뿌려지는 형태의 사업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시민들의 자발적 수요에 기반하며 참여와 향유의 과정 자체 모두가 매우 철저히 자발성에 근거하고 있다. 실은 한국에서 이런 정책들을 처음 설계할 때의 구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공급 중심의 문화향유정책은 시민들의 문화적 해득력을 높이기 위한 정책도입단계의 방법론이고 중장기적으로는 자율성, 자발성으로 정책의 중심을 옮겨가겠다는 계획들이 존재했다. 허나 지난 30년간을 되짚어보면 정책도입단계의 방법론이 하나의 고정적 방법론으로 자리 잡았고 근본적으로는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않은 채 사업의 몸통만 키워온 셈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너무 짧은 시간에 모든 영역을 고속성장시키는 것이 반복되어온 한국식 성장의 문화정책 버전이라고 할 수도 있다. 즉 한국의 문화향유정책은 이제 서른 살이 넘어가고 있지만 여전히 덩치 큰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