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⑤]- 1996년,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2

CP_NET 2024. 4. 8. 08:47

 

 

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① 시작하며- 기원을 입체적으로 복기하기_ 염신규
② “이른바” 3S정책1: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_ 염신규
③ “이른바” 3S정책2: 개방과 강력한 통제의 공존_ 염신규
1996년,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 1_ 염신규

 

 

 

지난 호에서 문민정부가 1996년을 기점으로 문화복지, 문화향유정책을 본격화하려 했던 시대적 정황과 맥락, 그리고 당시 정책 방향과 제기되었던 세부과제들을 간략하게 다루어보았다. 모든 내용을 복기할 수는 없으니 표를 통해 당시의 세부과제를 다시 한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정책과제 사업계획
최우선과제 우선과제 장기과제
기본적문화공간의 확충 문화의집 설치 지원
공공도서관의 건립
지방문예회관의 건립
국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 건립
종합문예회관 건립
문화지구와 문화의 거리 조성
문화복지지수 조사
전문박물관 및 미술관 설립
대중공연장 설치 및 건립
국립자연사박물관의 건립
첨단영상테마공원 건립
지역 문화복지시설 건립 촉진법 제정 검토
국민문화향수
기회확대
문화학교 및 문화동호인 모임 활성화
문화프로그램 개발 및 네트워크 운영
각종 교육연수과정에 현장중심의 문화체험 가회 확대
가정문화운동 전개
가족공연물 선정·지원
공연·스포츠경기의 온라인 티켓팅시스템 정착
지역축제 활성화 지원
문화정보서비스체계 확립을 위한 초고속 정보망 구축
생활문화복지 요원 양성
문화복지이념의 대국민 홍보 확산
문화공간·시설의 운영 개선
첨단과학 기술을 응용한 문화오락 프로그램의 개발·보급
함께누리는문화복지실현 문화나눔운동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 및 프로그램 확산
찾아가는 문화프로그램
민간 문화 봉사활동의 활성화
점자도서관 건립 및 점자 서적 제작 지원
수화 통역사 풀(pool)제 운영
특수언어 표준화 및 문화활동지원
 

출처 : 문화복지 중기계획 연구, 김세훈 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08.

 

 

문화향유·문화복지 정책의 근거들

 

거의 30년 가까이 지난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너무 당연하게 이뤄지고 있는 정책도 있고 이제는 좀 구태의연해 보이는 내용도 있다. 반면에 여전히 선언적 수준 이상으로 실현되지 못한 내용도 있다. 전반적인 기조를 요약하면 이제 한국 사회도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에서는 벗어났으니 선진국에 준하는 문화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배경에 당시 사회 전반에 강력하게 요구되었던 세계화담론이 놓여 있었던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세계화 담론은 국가가 일정한 수준 이상까지는 노동집약적 방식으로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는 식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그것이 실현된 상황에서는 소위 “글로벌스탠다드”(세계표준) 수준의 사회적 조건을 갖추어야 지속성장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문화향유나 문화복지 정책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도 단지 국민들에게 좋은 문화적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권력의 선의만이 존재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성장의 조건을 위해선 그 정도 사회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국가 성장 전략상의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민국이 건국 이래 헌법상 문화국가였다는 부분이다. 헌법상 문화국가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유래된 개념인데 국가로부터 문화활동의 자유가 보장되고 문화에 대하여 국가적 보호, 지원, 조정이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대한민국은 제헌헌법에서부터 민족문화를 배경으로 문화에 대한 기회균등과 자유권을 인정하는 문화국가원리가 담겨왔고 특히 1980년 제5공화국부터는 전통문화와 문화창달의 의무가 국가목적규정으로 들어오면서 국가의 문화진흥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문화국가원리가 헌법상 존재해 왔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쟁과 분단, 재건과 산업화를 거치는 과정에서 문화국가의 원리는 그저 헌법상의 개념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1990년대 중반 문화향유, 문화복지 정책을 본격적으로 도입하려고 했던 것은, 실은 진작부터 헌법상 국가 의무로 해야 하는데 안 하던 것을 뒤늦게 하기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로 2013년 무렵 제정된 문화기본법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화권의 개념 역시 헌법상 문화국가에 이미 담겨있던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단순하게 설명하면 대한민국 정부는 국민들의 문화적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문화적 향유와 참여의 기회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는 것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다.

 

당연히 모든 국가가 다 그런 의무를 갖고 있는 게 아니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는데 의외로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지 않은 국가들이 상당히 많다.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가 단순히 긍정적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며 이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한데 그것은 이후 다른 기회로 미루겠다.) 어찌 되었건 국가 수립 단계에서부터 국가의 의무사항이었던 국민의 문화적 권리 보장이 정부 수립 50년이 지난 후부터 시작되다 보니 문화국가 개념이 일반 국민들은 물론이고 행정 관료들에게도 익숙한 것이 아니어서 마치 국민들에게 특별한 시혜를 베풀어 준다는 식의 착각을 갖게 만드는 측면도 있었다.

 

 

당면했던 과제들과 방향

 

세부 사업들을 훑어보면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시설 인프라를 확충하기 위한 내용이 눈에 띈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문화시설 건립에 대해 여기서도 토건 사업이냐?”는 식의 삐딱한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1990년대 중반 시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존재했다. 시설 자체가 매우 부족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친숙한 시설인 공공도서관만 보더라도 2023년 기준으로 전국의 공공도서관이 1,236개소이다. 그런데 국가도서관통계시스템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료인 2007년 통계에서 공공도서관은 그 절반도 못 되는600개소였다. 또한 기사로 찾아보면 1996년 무렵 전국의 공공도서관이 229개였던 것으로 검색된다.(공공도서관 질적 수준 개선 미흡”, 매일신문, 1996.7. ) 현재의 20% 수준도 안 되는 수치다. 기초자치단체 1개소에 1개가 있을까 말까 한 수준인데 그나마 서울 등 대도시에 거의 집중되어 있었다. 공공도서관 같이 비교적 보급률이 높은, 필수적 시설이 그런 수준이었으니 문화예술회관이나 미술관, 박물관 같은 시설들의 보급은 더욱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본적인 문화기반시설을 갖추고자 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으며 문화기반시설 신규 건립 기조는 2010년대까지 지속된다. 이런 방향 설정 때문에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문화정책연구에서도 문화기반시설 설립 기준 등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뤄지기도 했다. 당시 주로 제시되었던 기준은 1개 기초지자체에 1개 이상의 도서관, 공연장(문화예술회관), 미술관(박물관)을 건립하거나 인구 10만 명 당 1개소 이상의 시설을 보급하자는 것이었는데 실상 현실성이 좀 떨어졌던 측면이 있다. 그래서 2010년대 이후로는 단순한 행정구역 구분이나 인구수에 비례한 건립이 아니라 교통수단 등 접근성과 지역 수요에 맞춤한 건립 기준도입이 적극적으로 검토되기 시작했다.

 

시설 관련하여 특히 눈에 띄는 것은 문화의 집설치 지원이다. 주민들의 자율적인 문화활동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복합문화시설의 지향을 갖고 시작된 문화의 집은 기존의 문화시설들과는 달리 창작자와 향유자를 이분화시키는 수동적 구조를 뛰어넘어서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공간을 중심으로 자율적인 문화활동을 펼치는 능동적 문화공간을 지향했으며 지역의 문화공동체 형성을 염두에 둔 매우 새롭고 야심 찬 시도였다. 199610월 서대문 문화체육회관 1층을 리모델링하여 조성했던 서대문 문화의 집이 1호로 개관되었는데 당시에는 문화부가 직접 공간조성을 지원했을 만큼 크게 보였던 사업이었다. 하지만 이후 정권이 몇 차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며 문화의 집 구상은 당초에 문화부가 발표했던 계획대로의 지원이 이뤄지지 않았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에 지역문화진흥법이 제정되면서 이 법 제도가 규정하는 생활문화센터로 사실상 개념이 대체된 상황이다. 문제는 문화의 집이 유명무실화되었던 것처럼 생활문화센터 역시도 2010년대 후반 이후로 사실상 유명무실화된 제도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겠다.

 

시설 등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프로그램 보급에 대한 내용도 담겨있었고 1990년대 초반부터 부분적으로 시도되고 있던 사랑티켓이나 찾아가는 문화활동등을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 계획도 있었으며 문화학교와 문화동호회 활성화, 문화나눔운동과 같이 2010년대 중반 이후 생활문화정책이 본격화되면서 도입된 제도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하드웨어와 관련된 정책이건 프로그램에 관련된 정책이건 이런 정부 방침은 시작과 동시에 크나큰 난관에 봉착했다.

 

 

IMF시대 문화향유·복지 정책

 

다름 아니라 IMF 상황이 닥쳐버린 것이다. 긴급한 국가부도상황에서 문화향유·복지 정책 의제 대부분은 후순위로 밀리거나 최대한 예산을 안 쓰는 절충적 방식으로 변형되었다. 예를 들어 시설 인프라의 확충의 경우는 BTL(임대형 민간투자사업)과 같은 민자유치방식이 대폭 도입되었는데 재정이 없는 상황에서 시설을 건립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부정적 측면이 더 많이 나타났다. 이런 건립방식은 이후 문화기반시설 운영에서 공공성보다는 수익성을 앞세우는 부작용과 지방정부에 장기적인 재정적 부담을 안기는 악영향을 낳았고 무엇보다 지자체들이 해당 지역의 규모나 문화적 수요를 고려하지 않고 치적과시를 위해 과도한 대형시설을 짓는 폐단을 낳기도 했다. 그러니까 정작 국가 재정 위기 때문에 검토되기 시작한 민자유치방식이 역설적으로 예산 낭비의 원인이 된 것이다.

 

프로그램과 인력지원 정책은 IMF 이후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성과주의 행정에서의 평가방식이 문제였다. 문화향유·복지에서는 양적 확대와 질적 심화가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데 성과주의 행정구조에서는 이런 심층적인 평가방식이 정착되기 힘들었다. 가뜩이나 예산을 대폭 확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성과주의 평가방식이 도입되다 보니 문화향유의 질적 측면이나 파생적 효과가 고려된 정책이나 사업보다는, 단순히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이에게 수혜를 주는, 아니 수혜를 주는 것처럼 보고서를 꾸밀 수 있는 방식의 사업만 점점 늘어났고 그 과정에서 공공이 예술인과 예술단체를 공공연하게 착취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측면도 있다. 이런 공공연한 착취와 연명의 구조를 포함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Since1996” 한국 문화향유·복지 정책의 문제점은 다음 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