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시작하며- 기원을 입체적으로 복기하기_ 염신규
[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②] “이른바” 3S정책1: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_ 염신규
5공화국의 3S정책은 꽤 오랫동안 상식처럼 알려졌다. 소위 진보진영을 중심으로 많이 퍼지기도 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1987년을 전후하여 군사독재정부가 물러난 이후로는 공식적인 채널에서도 5공화국을 대표하는 문화정책, 혹은 문화정책 상황으로 3S정책을 통한 우민화란 표현이 공공연하게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 지난 호에 다루었듯 실제 당시 정부의 공식적 문화정책이 3S정책이라고 표현될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다보니 5공화국에서 3S정책이 실제로 강하게 작동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2010년대 이후 등장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강하게 이런 3S정책 허구론의 프레임을 뽑아 든 곳은 자유기업권, 조선일보 등의 우파성향 매체들이다.
이들은 3S정책이란 주장이 근거가 부족하며 앞뒤가 안 맞는 허상의 개념이고 실제로는 “도시전설”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지난 장에서 다루었듯 3S정책의 내용을 채우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4공화국 시절에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사회문화적 자유”를 확대하고자 하는 정책이었으며 이것을 우민화 정책으로 몰아붙인 것은 당시 학생운동권과 야당 등의 음모론에 가까웠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우파 성향의 매체에서만 제기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 5공화국 초기의 3S정책과 우민화 경향에 대한 글을 쓰기도 했던 강준만 같은 논객도 2020년 『한류의 역사』를 쓴 이후에 했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의 대중문화산업의 성장을 3S정책이나 우민화의 결과로 보는 시각이 다소 과도하게 부각된 측면이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한국을 대중문화공화국이라 규정하며 압축성장과정에서 벌어진 살벌한 생존경쟁을 통과하는 동안 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의 탈출구로 대중문화산업이 강력하게 작동했음을 지적한다. “한국의 압축성장 과정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의 스트레스와 고통 등을 해소, 완화하는 데 대중문화가 엄청난 기여를 해온 거죠. 비판적 시각에서 대중 마취나 3S(스크린, 스포츠, 섹스)의 관점으로 보는 것만으론 부족해요. 그러니까 한국은 대중문화로 생존경쟁 문제를 해소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대중문화공화국이라는 거죠.”(“강준만, 청와대 의전·부동산약탈·어용지식인·검찰개혁·대선’을 말하다” 경향신문 2020.8.8.) 물론 이런 사후 해석들은 서로 상당히 다른 입장에 놓여있다. 우파 진영이 3S에 대하여 완전히 조작된 운동권들의 마타도어 선전이었다는 공격이라면 강준만의 경우는 분명 정치적인 억압 상황에서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거나 민심을 수습하려고 했던 권력의 의도가 존재하긴 했지만 모든 게 그렇게만 해석될 수 없는 대중들의 자생적인 역동성이 함께 작동했다는 것이다.
우선 최근 역사 수정주의의 바람을 타고 우파 진영이 주장하는 3S조작론 내지 음모론은 1980년대 초반 3S우민화를 주장했던 이들의 논리만큼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약점이 있다. 거의 “답정너” 수준의 앞뒤 맥락을 거두절미한 논리전개이다. 물론 이들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난 연재에서 썼듯 분명 1970년대 중후반 유신정권이 과도하게 억압적이고 금욕적인 사회분위기를 강요했고 이는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이 진척된 한국 사회 대중들의 욕망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 그에 비해 5공화국 신군부 관계자들은 이런 변화의 징후를 어느 정도 중요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부마사태 등 1970년대 후반에 격렬해지던 민주화운동은 유신정권에 대한 정치적 저항만을 담고 있는 게 아니었다. 장발 단속이나 미니스커트 단속과 같이 일상에 침투한 문화적 측면에서 부자연스러움과 권위주의 역시 대중들이 반정부적인 입장을 갖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또한 농촌공동체를 벗어나 도시 공업노동자가 된 젊은 노동자 그룹들이 “노동”을 매개로 한 저항도 다른 한축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다. 5공화국이 이런 상황에서 모든 것을 1970년대와 같은 억압적인 통제로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치적인 측면이나 노동자의 권리 같은, 권력을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지는 분야까지는 풀어줄 수 없었지만 대중문화와 같이 직접적이지 않거나 이미 산업과 시장의 측면에서 개방이 요구되고 있던 분야에 대해서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방적 태도의 표면 아래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통제
하지만 5공화국이 문화적인 측면에서 유신정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태도를 취한 것을 우파 진영이 주장하는 “사회문화적 자유의 확대”였다고 단순하게 평가하기 힘든 면이 함께 존재한다. 일단 태도의 변화가 자발적인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1970년대 말 극심한 반정부적 분위기와 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등 비정상적 권력창출과정으로 인해 겉으로 비치는 철옹성 같은 모습과 달리 매 순간 신군부 권력은 처음부터 위기와 내부적 불안감을 끌어안고 있었다. 같은 군부 정권이라고 하더라도 1,2공화국의 혼란과 부패 국면에서 꽤 많은 지식인과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초창기 박정희 정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5공화국의 개방적 태도는 다분히 떠밀린 측면이 있었고 그런 분위기에서 유신정권과 같이 강압적 통제와 금지 방식을 다소 완화시키기는 했지만 전면적인 것이 아니었고 이데올로기 개입이란 또 다른 통제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컬러텔레비젼 시대를 열었다고 했지만 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우선 진행한 것은 언론통폐합이었다는 것이 그 시절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개방적 태도 안에는 각종 문화 프로그램에 대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심는, 앞뒤가 다른 이중적 태도가 함께 진행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5공화국 초기의 언론, 문화 정책을 좌지우지하며 “전두환의 괴벨스”라 불렸던 허문도였다. 본래 언론인(조선일보 기자)이었고 일본특파원을 하며 메이지 유신과 김옥균 등을 공부했던 허문도는 단순히 권력에 굴복한 언론인이라기보다 우파적 국가주의를 내면화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실제 그는 12.12군사반란을 통해 전두환이 정치적 실권을 잡자 일본에서 스스로 입국하여 자발적으로 신군부에 접근하여 언론통제방향 등을 자문하며 권력의 내부로 들어간 인물이다. 그는 신군부가 본격적으로 새정부를 출범하기 이전의 짧은 공백기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화공보위원으로 시작해서 5공화국 청와대 공보비서관,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역임하며 대표적인 관제 문화축제인 <국풍81>을 기획하고 언론통폐합 등을 주도했다.
특히 <국풍81>은 단발성 축제에 그쳤지만 5공화국 문화정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는 행사였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바로 1년 뒤인 1981년 5월28일~6월1일에 열린 이 축제는 그 이전의 관제 행사와는 달리 1970년대 대학가 등지에서 싹텄던 청년문화의 요소를 교묘하게 끌어안으려는 시도를 담고 있었다, 대학가에서 유행했던 탈춤이나 마당극 등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으며 이런 요소들을 상징했던 김지하, 임진택 등 70년대 “저항적” 청년문화 아이콘들을 행사에 섭외하려고 애썼다는 후문이 있다. 물론 이런 시도들의 대부분은 강한 반발에 부딪쳐 좌절되었지만 대학풍물패 출신의 공무원들을 그 학교 풍물패인 것처럼 꾸며서 출연시키는 등 청년문화를 끌어안는 외관을 갖추려 애를 썼다. 그런 한편으론 각급 학교, 공무원 조직을 총동원하고 임시로 통행금지를 해지하는 등 강력한 권력의 지원을 통해 행사에 동원된 인원만 5일간 16만 명, 여의도에 다녀간 연인원은 600만에서 많게는 1000만 명까지 추정되는 전무후무한 대규모 행사로 치러졌다. 청년문화(마당극, 록밴드)의 외관을 둘러쓰고 있었지만 강력한 국가의 통제와 지원 속에 권력이 홍보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내는 도구로 축제가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5공화국 정책은 대부분 유신정권의 문화에 대한 강력한 국가 통제를 다소 완화시키며 자유주의적 측면의 개방성으로 해석될 여지가 분명히 있었고 그것 자체를 일방적인 우민화정책으로 해석하는 것은 분명 과잉해석의 여지가 존재했다. 이런 5공의 자율화, 개방화는 대내적으로는 대중문화(엔터테인먼트산업, 스포츠)가 1970년대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것을 일부 허용해야 했던 산업적 이유를 껴안고 있었고 한국이 저성장국가에서 수출중심의 중진국 이상으로 성장하면서 통상분야를 포함한 개방압력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유신정권의 통제주의와 보호주의가 대외적으로 더 이상 불가능해졌고 세계체제를 향한 개방이 수순으로 놓여있었다. 대외 개방을 위해서라도 내부적 자유가 어느 정도 필요해진 시점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대형스포츠이벤트(올림픽) 유치, 국제미인대회(미스 유니버스) 유치, <국풍81> 같은 대규모 문화이벤트 등 지배 이데올로기를 관철하기 위한 문화의 활용에서 우민화 정책으로 해석될 수 있는 요소들이 발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의 규제완화와 자율화에서 정치적 금기나 사회적 이슈는 대부분 배제되었다, 금지도서 목록은 여전히 만들어졌고 “창작과 비평사”의 출판사 등록 취소 사태에서 드러나듯 정치이념에 대한 규제는 강력하게 이루어졌다. 공연대본사전 검열도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80년대 후반까지 공연장은 엄연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이런 엇박자는 수용자들의 입장에서 부정적 의미에서 “5공화국 문화정책 = 3S정책”이라는 해석을 형성하게 만든 측면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5공화국의 문화정책이 3S, 문화를 통한 우민화정책으로 표현하는 것은 단순화의 오류가 있다고 볼 수 있지만 5공화국 문화정책이 사회적으로 파생시켰던 효과나 맥락으로 보면 그런 비판을 받을 요소가 다분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3S정책에 대한 논란은 80년대란 시대가 문화적인 측면에서 갖는 격변을 매우 다중적(혹은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고 본격적인 문화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문화가 더 이상 국내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통상질서 안에 들어가기 시작한 조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고 문화적 자율성과 이에 대한 정부 개입의 다양한 방식에 대한 오랜 진지전이 본격화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1990년대 일본 문화 개방을 거쳐 2000년대 이후의 전면 개방화되어간 문화산업의 구조적 메커니즘의 맹아가 뿌려졌던 시기인 동시에 2016년 블랙리스트 사태로 귀결되는 정치권력과 문화적 자율성의 불편한 관계맺음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했다. 이에 대한 각각의 후속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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