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정책시선: 읽다] 『측정의 역사』문화예술정책 측정 경관에 대한 편린

CP_NET 2022. 2. 11. 10:19
편집자 주: [정책시선: 읽다]를 새롭게 시작합니다. [정책시선: 읽다]는 문화정책 분야의 의미 있는 책을 소개하거나 문화정책의 시선으로 다양한 분야의 담론을 소개하는 서평을 다룰 예정입니다. 단행본만이 아니라 함께 이야기 나누고자 하는 보고서, 자료집 등도 다룹니다. 격월로 발행될 예정이니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측정이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게 된 측정의 역사(로버트 P. 크리스, 노승영 역, 에이도스2012. 원제 “World in the Balance” (2011))는 문화예술이나 그에 대한 정책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은 아니다. 측정이란 단어는 측정의 도구, 기준, 척도, 평가 등의 어휘들이 꼬리잡기 하듯이 연속적으로 떠올리게 하는데, 정책 업무를 하기도 했고 여전히 관심을 놓지 못하고 있는 일상에서 측정은 언제나 늘 짐이기도 하다. 절대 측정을 향한 인류의 꿈과 여정이라는 책의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본 도서의 핵심 내용은 물리적 측정에 대한 것이다. 특히 내용의 절반 이상은 질량과 길이를 측정하는 기준 설정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변하지 않는 절대 기준의 설정은 측정의 절대성과 일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인류의 삶에서 보편성, 접근성, 호환성 환경을 만들어 준다. 그것이 인류의 급격한 생산성 산출의 토대가 되기도 한다. 측정이 다양성을 포괄하면 측정의 효과는 감소하고, 측정의 지위는 낮아진다.

 

측정은 물리적 환경에 국한되지 않고 있다. 어떤 측면에서 우리의 일상과 삶 자체가 측정의 연속적인 구조 속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서 측정은 측정이란 단어보다는 평가, 척도, 순위 등의 단어가 더 일반적이다. 최근에는 데이터라는 중립적 인상을 주는 어휘가 더 익숙해졌다. 데이터는 측정을 위한 요소이자 한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데이터의 설계는 측정의 프레임을 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데이터는 일방향적이고, 지표, 척도가 대표되면서 (다양한 요소와 가치가 단일한 또는 소수의 측정 기준으로 치환되면서) 절대성 지위를 획득한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적 권력은 측정으로부터 나온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은 측정이 어떤 절대적 기준을 결정하고 그에 근거하여 생활을 재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환경 도구라는 일반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혹은 상호작용적인 과정을 통해 측정을 하는 아프리카 부족의 측정 역사는 그 자체로 상당히 흥미롭다. 상호성에 기반한 합의가 측정의 근거가 된다는 것은 측정은 관계성 놀이(문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저자는 현재 그러한 측정은 사라졌다고 한다. 아마도 측정의 절대적 지위와 효과는 놀이를 수용하기에는, 다양성의 변화를 포괄하기에는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많은가 라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이 책에 대한 소개는 여기까지이다. 사실 이 글은 측정의 역사라는 책에 대한 서평과 같은 글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문화예술 정책과 관련한 지면에서 절대 측정의 여정을 따라가는 본 도서의 내용은 그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다만 이 글은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본 도서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다음의 내용 때문이다. (좀 길지만 인용함)

 

사회과학도 측정경관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굿하트의 법칙에 따르면(*경제학자 찰스 굿하트가 정식화한 개념으로 원래는 “어떤 현상에서 통계적 규칙성이 관찰되었더라도, 이를 조절하려고 압력을 가하면 규칙성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274쪽), 어떤 척도를 정책 목표로 삼으면 금세 척도로서의 가치를 잃는다. 따라서 교육위원회가 수능 점수 향상을 학교 발전의 목표로 삼거나 정부가 GNP 증가를 복지의 척도로 삼으면, 이들 척도를 끌어올리기 위한 조치가 애초에 의도한 목표에 이바지하지 못하며 (따라서) 척도가 척도 노릇을 하지 못한다. ...(중략) ... 측정이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과거에는 측정 체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측정의 사회적 맥락을 뚜렷이 인식했다. 아칸족은 금가루 무게를 달 때 자신의 행동이 어떤 뉘앙스로 읽히는지 알았고, 중국 황실 관리들은 정확성의 정쟁을 벌였으며, 근대 이전 유럽의 농민들은 척도가 착취에 악용될 수 있음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하지만 현대 측정경관에서는 측정의 사회적 맥락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지능을 측정하는 행위, 즉 교육 제도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더 알아차리기 힘들다. 학교는 측정되는 것을 중시하고 측정되지 않는 것을 홀대한다. 274쪽~275쪽

 

 

위의 인용문에서 밑줄 친 어떤 척도를 정책 목표로 삼으면 금세 척도로서의 가치를 잃는다라는 문장이 반짝거린다. (밑줄은 필자가 강조) 그동안 측정의 결과물에 대해 적절한 측정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이러한 질문은 어떻게(how)라는 측정의 방법론 문제로 나아갔고, 그에 집중했다. 측정의 방법론 문제와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지만, 위 인용 문장은 측정의 설계를 정책 목표와의 관계성에서 설정하는 질문에 그동안 매우 소홀했다는 것을 일깨운다. 문화예술 정책의 목표치를 만들고, 그 목표치를 초과 달성하기 위한 측정을 한 것은 아닌가? 어쩌면 그동안 문화예술 정책의 척도라는 것이 있기는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없지는 않다. 시설물의 수치, 관람객의 수치, 수출액의 수치, 정책 예산의 수치 등등 많은 측정의 결과물들이 있다. 그러한 결과물들로 현장을 진단하고, 그러한 결과물들이 정책의 방향과 목표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고 또 반복된다. 예산 실적이 정책 목표가 아니라면 문화예술 정책의 목표는 무엇인가?

 

다양성이 중요하고 그것이 창의성의 기반이 된다는 높고 넓은 소리들이 있다. 맞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측정하는 결과물은 그러한 소리들의 의미가 반영되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측정의 절대 기준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측정이 무엇인가를 ()구성하는 토대라고 한다면, 그리고 측정이란 개념을 좀 추상화한다면, 어쩌면 세계관이란 것도 측정 프레임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보면 문화예술은 다양한 측정들이 공존하는 세계이다. 측정의 기준과 단위가 다양하게 자유롭게 표현되는 것이 문화예술의 세계이다. 측정의 다양성은 기준의 변화 가능성을 포괄한다. AI도 학습하며 성장하는데 인간은 말할 것도 없이 늘 변화한다. 변화하는 세계와 환경을 전제로 하는 척도는 절대 기준이 아닌 가변 기준이란 틀을 고려해야 할까? 수직이 아닌 수평의 측정을 고려해야 할까?

 

기존의 측정으로 문화예술정책의 정책 효과를 확인하기 어렵다면, 정책 목표와 측정 설계의 관계성에 대한 질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아직도 정책 효과에 근접하기까지 변화의 시간을 기다려야 할까. 측정의 역사를 보면서 아직은 답변할 수 없는 자문을 던져보게 된다. 그런데 여전히 측정의 방법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바다라는 세계에서 고정된 채로 서서 뱃길을 밝히는 등대, 바다로부터의 위협받는 배들을 보호하기 위해 바다에 굳건하게 벽을 쌓은 방파제, 표시를 위해 바다의 흔들리는 물결 위에 떠 있는 부표. 바닷길을 메워 생산을 위해 육지로 만든 간척지. 문화예술이란 바다에서 정책은 어디에 가까울까? 문화예술정책에서 측정은 무엇에 가까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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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규. (사)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대학 시절 연극이 좋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문화운동과 조우하였다. 90년대 초반 석사 과정 시절 국내 최초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생활실태조사를 했다. 2000년대 초 인디문화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게임산업 진흥기관에서 정책, 기획 업무를 총괄하고 문화산업과 예술 분야 정책 및 법제도 개선에 참여했다. 지금의 관심은 예술과 문화산업에서의 공정 환경, 문화예술 분야의 노동 환경, 디지털시대의 문화운동은 무엇일까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