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도시와 문화정책 ⑮] 세 번째 쓰는 기획의 변: 부동산 신성국가에서의 도시, 그리고 문화

CP_NET 2021. 4. 5. 12:28

문화 분야 혹은 문화 업계에서는 문화도시니, 쇠퇴지역 문화적 재생이니, 지역문화니 하며 담론적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는 동안 누군가들은 농지를 구입하여 왕버드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농지들은 X기 신도시로 예정되거나, 신도시 배후지가 되면서 내일 지구가 망하건 말건 일단 땅을 사서 버드나무를 심었던 양반들은 엄청난 이익을 남겼다. 정보를 빼먹을 수 있는 정치인들이, 해당 분야 관료들이, 공공 주택 공급을 위해 존재하는 공기업 직원들이 그랬다. 위로부터 아랫까지, 너나할 것 없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말 광범위하게 그랬다고 한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가 집중적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LH만 그런 것도 아니며, 현 정부가 집중적으로 욕을 먹고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지만 현 정부 시기에 유독 그런 것도 아니다. 얼핏 기억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따져봐도 1970년대 이래 한국은 늘 부동산 공화국이었고 신도시는 늘 투기의 대상이었고 권력자들은 늘 겉으로는 부동산 투기는 망국병이라고 하면서도 투기의 이익을 뒤로 챙기고 있었고 고위 관료들이 모여 사는 동네의 집값은 불패였다.

 

대강 청년기가 지나면 누구나 대충은 알게 되는 것이 한국의 중산계층 상당수에게 부동산은 거주와 생활의 공간인 동시에 재산을 보호하거나 증식시킬 수 있는 가장 안정적인 수단이라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유독 아파트, 그것도 초고층의 단지형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도 사실 거기 있다. 재건축을 할 때 건축법상 아파트에 대해서만 유독 적용하고 있는 특혜성 보상 기준이 숨어있는 것이 잘 안 보이는 제도적 원인이라면 시세 형성이 용이하고 거래 자체가 쉬워 환금성이 뛰어난 상품이란 것이 사람들에게 체감되는 결정적 이유이다. 물론 생활의 편리성 같은 이유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빈약하다. 아파트는 쉽게 돈으로 바꿀 수 있으며 전쟁 같은 예상하기 힘든 사태가 아니라면 금전적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이 없다. 아니 금전적 가치가 떨어졌던 적이 거의 없다. 일시적으로 주춤했던 시기는 있었으나 언제나 회복되곤 했다.

 

특히 흔히 똘똘한이란 기이한 수식어가 붙곤 하는 서울의 주요 지역에서는 그렇다. 과거에는 그 똘똘한 지역이 주로 강남, 송파권역에 국한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용산, 마포, 종로 등지까지 훨씬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2000년대 중반 인구소멸에 따른 수요의 감소와 지나치게 고평가 된 아파트의 가격 등의 이유를 들며 아파트 시대의 종언이 올 것이라 예측한 이들이 있었지만, 그 예측은 하나도 맞지 않았다. 대단지 아파트로 표상되는 한국의 부동산 문제는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경제법칙으로만은 설명되지 않는다. 6,70년대 고도성장기 이래 아파트는 한국인들의 진정한 경배 대상이요 압도적인 토템이라 할 수 있다. 신앙이며 문화적 습속이며 모더니티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변화에 대한 믿음과 무엇을’ ‘어떻게에 작동하는 욕망

 

사실 누구나 알고 있는 부동산 문제를 다소 길고 과장 되게 쓴 이유는 이런 문제가 최근 도시와 지역에서의 문화가 새롭게 재인식되는 문제와 일정하게 관련되어있기 때문이다. 문화도시니 문화적 지역재생이니 하는 말들은 언제 들어도 좀 이상한 조어라고 생각되지만, 사람이 모이면 당연히 어떤 문화건 있기 마련이고 문화를 기능적으로 사용하는 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을 터인데, 이 다소 알 듯 말듯 모호한 표현은 문화를 통해 도시와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그것이 전통적 문화주의자들의 관점에서의 문화, 즉 중산계급의 문화적 교양에 부합하는 도시의 단장이건, 도시가 갖고 있다고 주장되는 문화적 정체성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창의적 경쟁력을 높이겠다는 지역 브랜딩 차원의 접근이건, 혹은 도시와 지역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공공 자원들을 문화적 방식의 협업과 선순환을 통해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던지 말이다. 문화를 통해 도시와 지역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나 혹은 사회변화와 혁신에서 문화가 중요하게 기능해야 한다는 명분론은 모두 문화가 지역의 현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거두절미하고, 문화는 지역의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데 정작 무엇을, 어떤 방향으로 바꿀 수 있는가란 지역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민들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역에 대한 욕망과 분리될 수 없다.

 

지역이 성장한다는 것이 지역의 지가가 올라간다는 것과 손쉽게 등치 되는 상황을 현실로 겪고 있으며 문화를 통한 다양한 지역의 계획들도 막상 현실에서는 그런 욕망의 구조와 분리되기 어려운 현실을 여러 차례 목도해왔다. 단적으로 공공문화시설의 입지가 결정되는 과정마다 인근 지역의 부동산 관계자들은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으며 2000년대 이후 문화지구로 보존·육성하고자 했던 지역들은 대부분 여지없이 문화의 외양을 쓴 상업지구로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며 당초에 주목을 받았던 문화적 요소들을 상실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인사동이 그랬고 대학로가 그랬고 홍대 지구가 그랬다. 지역의 개발과 발전에 관하여 다양한 수식들이 존재하지만 결국 결론적으로 성과로 외화 되는 것은 그 지역이 얼마나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발휘했는가로 측정되었고 그렇게 유치된 자본의 힘은 투자를 훨씬 상회하는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고자 지역을 재구조화하는 전철을 밟곤 했다. 이것은 단지 한국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자유주의에 기반한 창조도시 관점의 방법론이 각광을 받았던 20세기 후반에서 최근까지 전 지구적으로 유사하게 반복되었던 일들이다. 다만 그 방법론이 좀더 세련되었는가 아니면 좀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는가의 차이가 존재했다고 평가한다면 너무 시니컬한 입장일까.

 

아직 코로나가 전 세계를 뒤덮기 이전인 2019년 여름 잠시 터키를 여행할 때 느꼈던 감각 중 하나가 묘한 기시감이었다. 특히 그런 감각을 느꼈던 것은 이스탄불에서였다. 이스탄불이란 도시는 동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거치며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오랜 중심지였고 어떤 측면에서는 전 세기까지, 20세기 이후의 파리나 뉴욕과 같이 세계의 문명이 충돌하고 융합되었던 오래된 국제도시라 할 수 있다. 도시의 물리적 구조나, 역사나 모든 것이 우리가 한국에서 경험하는 도시와는 아주 다른 조건에 놓여 있는 곳인데 마치 여러 차례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줬다. 그 이유를 시간이 한참 지나서 곰곰이 다시 생각해보니 서로 매우 다름에도 불구하고 유사하게 상호 대응하는 장소적 기호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톱카피 궁전이나 하기야소피아 성당 같은 역사 유적들이 모여있는 역사지구(Historic Areas of Istanbul)는 마치 서울의 4대문 안, 주로 인사동과 창경궁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 도심지구나 경주 등 고도의 유적 중심의 역사문화지구를 연상시켰고, 바다를 건너 아시아 지구에 있는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 모다 거리(Moda Street)는 흡사 홍대나 연남동 지역을 연상되었다. 또한 본래 유태인들의 거주지였다가 새롭게 도시재생이 이뤄지고 있는 발랏(Balat) 같은 지역은 한국에서 최근 벌어지고 있는 문화적 도시재생 지역을 연상시켰다. 전통과 역사가 있는 곳(역사 지구)과 젊은이의 거리(모다 거리), 쇠퇴한 지역에 대한 문화적 재생(발랏)이라는 것은 우리가 한국에서도 이제 흔하게 마주치는 도시의 문화적 해석을 표상화한 기호와 상징들이다.

 

물론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도시가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장소란 원칙적인 시각으로 되돌아와서 생각하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곳들은 외부인들에 의해 구경되는, 마케팅되는 장소이기 이전에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들이며 단일한 목표로 그 지향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가 상상하는 문화적 도시의 모습이 그런 그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 결국 시설이나 이벤트로 제한된다. 역사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도시들은 이미 일상에서 멀어진, 단절된 전통을 대리체험하게 하는 형태로 작동하고 있으며 젊음과 창의성이란 것도 하나의 상업적 기호가 되어버렸다. 2010년대 후반 대다수 시민들은 이미 숱하게 많은 도시 재생을 둘러싼 이벤트들을 경험했거나 체험하며 너무 뻔한 답들을 체화하고 있다. 발전전략으로서의 도시에 대한 문화적 접근은 이렇게 돌아가건 저렇게 질러가건 결국 상업적 매력으로 귀결되고 지가 상승을 기준으로 결론 내려진다.

 

이스탄불 역사 지구 Historic Areas of Istanbul

 

 

젊은이의 거리인 모다 거리Moda Street의 록클럽

 

문화적 도시재생이 이뤄지고 있는 쇠퇴 지구 발랏Balat

 

방법론으로서의 문화를 넘어

 

도시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해왔고 변화해가고 있다. 특히 매우 빠른 근대화를 경험한 한국의 도시의 경우 그 변화의 속도가 특히 매우 빠르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방향은 일방향적이다. 멈춤 없는 재개발과 신도시가 당근처럼 주어지고 있는 것에서 보이듯 여전히 우리의 위정자들은 개발이라는 범국민적 신앙 체계를 유지할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도시 개발에 대한 문화적 방법론이 다소 감속적 기능을 할 수 있는 여지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럴수록 시민들에게 문화적인 방법론의 도시에 대한 계획은 빠르게 질러갈 수 있는 지름길을 우회해서 가는 비효율적인 여정으로 보이거나 일상적 현실과는 별개의 시뮬라르크의 경관으로 자리할 수도 있다. 방법론이 아닌 지향과 관점에서 다른 해답을 향한 출구를 제시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2021년에도 지속될 이 기획에서는 그런 이유 때문에, 방법론으로서의 문화가 아닌 다른 가치와 지향에 대한 도시에서의 시도들을 찾아내고 이에 따른 논점들을 발굴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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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신규.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