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 지역의 도시재생 활성화 계획을 뒤늦게 살펴보다가 놀라움이 밀려왔다.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지역에 조성되는 커뮤니티 거점공간(어울림센터)이 구역 내 유일한 오픈스페이스인 어린이공원 위에 계획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복합화와 상생이라는 단어로 공원의 일부가 유지되는 것처럼 서술되었지만, 지하에 주차장을 짓고 지상에 상가가 입주하는 계획에 작은 놀이터의 기능이 남아날 리 만무했다. 이것이 일반적인 일인가 싶어 다른 계획들을 찾아보니, 우려했던 상황들이 이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공원부지의 지목변경 반대’를 외치는 주민들의 서명운동과 ‘당해년도 예산 소진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행정당국의 이해할 수 없는 설명이 한 페이지에 나란히 검색된다. 가장 힘없는 아이들의 공간을 거두어 그럴듯한 문화적, 경제적 성과로 포장하는 것은 과연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실질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지원하자’는 도시재생의 근본 취지에 조금이라도 부합하는 구석이 있는 것일까. 재개발을 내려놓고 재생을 선택한 이 지역에서, 주민들은 쫓겨나지 않은 것 외에 무엇을 얻었을까, 근본적인 회의가 밀려온다.
판데믹이 끝나지 않는 도시의 우울은 깊어가고 있다. 일상이 뒤흔들린 채로 1년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그간 무엇이 비대면으로 가능하며 오히려 효율적일 수도 있는지, 반면 어떤 것들은 절대로 대체될 수 없는지에 대해 온몸으로 경험하고 있다. 장거리 이동을 자제하는 분위기 속에서 동네의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는 것은 일견 반가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지역별로 지니고 있는 자원의 격차로 인해 주민의 삶이 받는 타격 역시 평등하지 않음을 실감한다. 온라인 세상에서의 장보기는 돈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같은 조건이지만, 공원이나 놀이터와 같이 몸의 감각을 통해 경험해야만 의미가 있는 공간들을 온라인으로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역 간 오픈스페이스의 격차는 그래서 부모의 도움 없이는 동네를 벗어나기 힘든, ‘이동 독립성’이 확보되지 못한 아이들에게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미세먼지 이슈가 지역간 실내문화공간의 격차를 드러냈다면, 감염병의 유행은 아이들이 기대고 있던 외부공간의 속성을 폭로한다. 어떤 형태일지는 모르지만 인간이 지구를 괴롭힌 대가로서 치러야 할 재난 상황이 확장되고 변주될수록, 인간다운 삶의 지속을 위해 우선적으로 해소되어야 하는 격차가 어느 지점인지도 또렷해져 간다. 지금 “우리 동네에 아이들이 별로 없으니 놀이터는 없어져도 된다”는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사실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에서도, 이미 아이들의 놀이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다. 6,70년대 자연 속을 넘나들며 동네 전체를 무대로 삼던 아이들의 활동공간이 어떤 도시화 과정을 거쳐 고립된 놀이터로, 거대 자본이 움직이는 실내 공간 속으로, 스마트폰 속으로 쪼그라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차량과 보행자의 공존만으로도 충분히 위태롭던 거리는 이제 오토바이와 택배 트럭, 자전거와 퍼스널 모빌리티까지 뒤섞여 어른들에게조차 심각하게 위협적인 공간이 되었다. 몇 년 전 성미산 마을에서, 인솔자를 따라 공동육아 방과후 교실로 이동하는 아이들이 차량을 피해가며 길에서 하고 있던 술래잡기는 ‘즐거운 오후의 한때’ 의 느낌이 아니라 모종의 저항정신이 담겨 있는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했다.
사라져 가고 있는 바깥놀이문화 속에서도, 지역별 격차는 분명히 존재한다. 아이들 놀이에 대한 가장 흔한 편견 중 하나가 그들이 ‘시간이 없어서’ 놀지 못한다는 것인데, 너무 빠른 하교시간 때문에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부모들의 상황을 떠올려 보면 이는 적어도 초등학교 저학년에 보편적으로 해당되는 말은 아닌 듯싶다. 평일 하교 후 학원 1~2개를 소화하며, 일몰 전 적어도 2시간 정도의 자유시간을 갖는 것이 이 시기 아이들의 전형적인 하루 일과다. 그러나 꽉 짜인 학원 일정 속에서도 아이들이 저녁 늦게까지 나와 노는 지역이 있는가 하면, 자유시간이 의외로 많은데도 바깥놀이가 좀처럼 일상화되지 않는 지역 또한 존재한다. 남아 있는 자유시간이 친구들과 뛰어노는 데 사용될 수 있는지, 또는 집에서 크고 작은 화면에 노출되며 보내게 될지를 좌우하는 주요한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동네 환경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비싼 아파트 단지 내 잘 꾸며진 조경시설 속 놀이터와 운동시설이 많다고 해서 그것이 곧 ‘놀기 좋은 동네 환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이들의 바깥놀이 문화는 ‘소득’, ‘동네 교육열’, ‘놀이터 개수’, ‘거주하는 주택 유형’과 같은 단일한 요인들에 따라 줄 세우듯 차등적으로 양산되지 않는다. 놀이활동의 성립과 지속에는 약속 없이도 친구들을 쉽게 마주칠 수 있는 동네 공간 구조가 갖춰졌는지가 관건인데, 이는 강풀의 그림책 『얼음 땡!』에 나오는, “내일 다시 만나자고 약속할 필요도 없었어. 공터에 가면 늘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라는 한마디로 정리된다. 이 말을 도시설계 언어로 다시 풀어내면 ‘동네 주요 목적지들과 연결되는 좋은 입지에 비교적 넓은 놀이장소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 된다. 아이들이 많이 노는 동네에서는 어김없이 이러한 놀이의 구심점이 발견되지만, 주거지 형성의 맥락이나 시기에 따라 중심 공간의 형태와 속성은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북촌과 양재동, 목동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 동네지만 세 곳 모두 아이들이 많이 나와 놀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각 지역에서 놀이활동의 중심이 되는 공간의 성격은 매우 달랐고, 이 차이는 코로나19 이후 아이들의 일상에 가해진 타격의 수준을 결정했다. 아침에 등교하면 정규수업이 끝난 뒤에도 운동장 놀이와 도서관, 방과 후 수업을 오가며 어둑해질 때까지 학교에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가던 북촌의 아이들은 등교 중지 이후 생활과 놀이의 터전을 한꺼번에 잃었다. 젠트리피케이션이 극에 달하고 동네 전체가 관광객들로 떠들썩했던 2015년 무렵에도, 정독도서관이나 현대미술관의 벚꽃과 낙엽이 흐드러진 넓은 마당에서 최신형 아파트보다 더 풍요로운 놀이자원을 누렸던 아이들은 공공시설의 선제적 폐쇄로 인해 이제 집 밖으로 나가도 딱히 갈 곳이 없다. 반면 목동과 같이 아파트 단지 내에 넉넉한 어린이공원과 보행로가 함께 결합되어 하나의 완결된 놀이환경을 제공하거나, 학교에 부속된 운동장이 없는 대신 넓은 근린공원이 교문 밖에 펼쳐진 양재동과 같은 특수한 환경에서는 아이들의 놀이가 그리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고 발생 책임에 대한 부담으로 학교공간은 점점 폐쇄적으로 변해 가는 가운데, 감염병 시대에 아이들의 일상을 이어가기 위한 장소들은 어떻게 확보되어야 하는지, 공공 영역에 속해 있지만 정부 정책이나 운영 주체의 방침에 따라 언제 개방 또는 폐쇄될지 모르는 교육 ․ 문화시설의 외부공간들은 어떤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지, 동네 단위에서의 고민이 필요해지는 시점이다.
오픈스페이스와 예술의 상상력
다시 도시재생 사업에서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현상들을 생각해 본다. 각종 사업을 빌미로 일어나는 이해관계의 충돌과 크고 작은 폭력들은 결국 디테일을 들여다보지 않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동네의 고령화 현상을 심각하게 여기면서도 아이들이 왜 공원으로 나오지 못하는지, 이 공원의 이용률이 낮은 이유는 무엇인지, 아이를 가진 부모가 왜 자꾸만 동네를 떠나는지에 대한 고민을 현장지원센터, 주민대표 협의체, 행정 중 한 곳에서라도 제대로 했다면 이런 결과가 쉽사리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향후 도시 삶의 질 개선을 목표로 하는 각종 사업들에서는 좀더 과감하게, 무언가를 발굴하고 채워 넣는 작업보다는 동네의 핵심적인 구역을 오픈스페이스로 비워내는 작업에 주력했으면 좋겠다. 흔히 지역의 부동산 가치로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교육환경이나 교통환경, 상업지구 접근성과 같이 거시적인 도시경제 구조에 좌우되는 조건들은 동네 단위에서 변화시키기 어려운 부분이다. 반면 넉넉한 공원녹지를 조성하는 일은 동네에 거주하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일뿐더러, 어울림센터처럼 건립 후 운영주체를 찾지 못해 방치되고․ 폐쇄되는 지경에 처할 일도 없다. 부지 매입이 어렵다면 기존의 운동장이나 공공시설, 문화시설 부속공간의 개방성을 높이는 작업을 관련 주체들과의 협의를 통해 먼저 실험해볼 수 있다.
일상에 필요한 공원녹지 공간을 찾고 만들어가는 과정에 문화예술적 상상력이 결합된다면 엔지니어링 업체의 손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생산되는 공원의 풍경도 조금은 달라질 것이다. 순진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믿고 싶은 마음이 크다. 판데믹은 어쩌면 거대 자본에 종속된 실내공간에서 지극히 소비적인 형태로 흘러갔던 아이들의 놀이문화를 또래와의 동네 바깥놀이로 조금이나마 회복,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고. 아이들에게 좋은 동네가 고령자에게 나쁠 이유는 하나도 없다. 동네에서 함께 놀고 성장하던 친구들 때문에 지역을 떠나고 싶지 않은 아이와 부모들이 많아진다면, 그보다 더한 사업 성공의 지표가 또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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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이명. ㈜두리공간연구소 부소장. 대학원에서 도시설계를 전공하고 동네 연구자로 살아가고 있다. 나의 생활과 다를 것 없는 동네 거주자들의 일상적 경로를 따라다니며 걷기 좋은 동네, 놀기 좋은 동네의 본질적 의미와 구체적 윤곽을 탐색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참여자들과 밀착된 대면연구 방법론을 앞으로의 연구에 어떻게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고민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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