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선언] 균열과 긴장의 담론장을 위하여- 사회적 의제로서의 문화정책

CP_NET 2020. 9. 10. 14:49

 

 

우리는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에 대해 가능한 다양한 발화들을 담아보려 했다. 지면의 한계, 우리 역량과 지평의 부족과 협소함으로 말미암아 때로는 편협한 시각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어떤 치우침, 혹은 경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존재하고 그것들이 상생, 경쟁하는 것으로부터 문화정책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무의미한 작업은 아니었다고 본다. 어떤 치우침이 있을지언정 그것이 특정한 이해관계를 관철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추상적이나마 한국문화정책연구소와 [문화정책리뷰]가 추구하는 문화민주주의와 현재적 의미에서의 예술적 진정성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제도적 변화를 촉발시키고자 하는, 공공성이란 대전제를 접어둔 적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현장으로부터 시작되는 문화예술환경의 쉼 없는 변화의 흐름에 어떤 방식으로라도 대응하고 소통하고 답을 구해보고자 했다.

 

뼈아픈 것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논의 역시 기존의 제도화된 프레임의 한계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문화정책 담론은 지나치게 국가중심주의에 기울어 있고, 경제적 환원 논리에 발목 잡혀있으며, 정권이 내세우는 단기적 정책성과에서 결코 자유롭지않다. 이 한계를 내내 지적해왔지만 막상 그것을 벗어난 상상과 제안을 내놓기는 쉽지 않다. 우리 스스로도 한국 문화예술정책의 만들어진 전통에서 자유롭지않다는 점을 다시 한번 자각한다. 시민 일상의 구성원리로서의 폭넓은 가치지향을 담아야 한다는, 매우 일반론적인 대답이 어떻게 현실에서 유효한 대응력을 가진 정책과 담론으로 구체화할 것인가의 질문 앞에서 우리는 머뭇거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공공 문화정책의 방향타를 잡아온 것은 언제나 중앙정부를 정점으로 한 범국가 조직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군사독재라 불리는 과거의 권위주의적 권력이건, 아니면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의 다소 연성화된 권력이건 간에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목도하고 있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 제도와 예산으로 대표되는 대부분의 주요한 통치수단을 국가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가 지속적으로 발신하고 있는 통치의 유효한 수단으로서의 문화정책을 외면할 수도 없고 외면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민들을 통합하고 규범화시키는 솔루션들이 문화정책 담론의 전부가 되어서도 안 된다. 정부는, 그 정부의 이념과 성격이 무엇이든 자신들이 추구하는 체제를 유효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문화정책을 제도화, 고착화하는 속성이 있다. 이를 규범적 문화정책이라고 할 때, 규범적 문화정책은 사회의 문화적 자산과 전통을 지키고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란 측면에서 기능하는 한편, 사회의 역동적 변화와 가치에 대한 새로운 접근, 새로운 문화적 경향을 반영하는 것에는 한계를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규범적 문화정책은 때때로 금지와 배제라는 반동적 역행을 보여주기도 한다.

 

규범적 문화정책은 문화민주주의가 지향하는 문화의 다원적 가치를 담아내는 데에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사회적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한 발본적 고민이 담긴 가치지향을 문화정책에 담아내기 위해서는 문화정책의 지평을 확대하고, 얼핏 관련 없어 보이는 다양한 영역과 연결시키고, 때로는 매우 도발적인 제도의 전복과 탈주를 상상하고 실천하는 시도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이는 국가주도의 규범적 문화정책 안과 밖에 공존할 때 가능하다. 규범적 문화정책 경계 밖에서 혹은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경계를 재설정하면서 전개되어야 한다. 우리에 외부는 또 다른 공론장을 의미한다. 그런 다른 공론장을 가능하게 만드는 새로운 마이크와 확성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이러한 주장은 공허한 당위가 아니다. 당장 직접적으로는 코로나19와 유례없는 긴 장마 등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조건들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러한 징후적 현상 이면에 축적되어온 삶의 양식에 대한 전환적 사고의 요구들 때문이다. 우리가 믿어 의심치 않고 지내왔던 시장과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조절되는 일상이, 당위성이나 옳고 그름을 떠나, 지속가능할 것인가?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자연의 섭리와 같이 우리의 삶 역시 임계점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문화정책은 무엇을 해야 할까? 문화정책 역시도 비국가의 영역에서 사회 전환 담론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갱신의 균열과 긴장을 다시 벼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과거란 언제나 우리에게 현재의 그림자다. 현재가 변화하면 과거에 대한 해석도 변화한다. 과거의 사건들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담고 있는 가치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다시 구성된다. 담론은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유산과의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계속 새롭게 구성되지만 현재라고 불리는 우리 눈앞의 일상적 구체성을 통과했을 때 유의미한 전망으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문화정책을 둘러싼 사유와 담론도 마찬가지다. 현실에 대한 제언으로서 문화정책이 역능을 획득하고자 한다면 우리 시대에 주어진 매우 물질적인 (구체적인) 상황을 직면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구체적인 전환의 조건과 상황들을 문화정책의 자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불편부당함과 보편성을 염두에 두기보다는 당파성과 특수성을 근거로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하고자 하는 것이고 문답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을 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언제든 우리 이야기가 가진 한계들을 전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이 전환의 시기에 한국문화정책 역시 스스로를 갱신함으로써 사회의 변화를 만들어가는 데에 함께 할 것이다.

 

 

 

[문화정책리뷰] 편집위원 일동(김민규, 김상철, 김소연, 김정원, 안태호, 염신규, 이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