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

[협업 '오롯위드유': 사법적 판단 너머, 무용계는 무엇을 할 것인가]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든다는 것 - 무용(예술)계 현장에서 행동강령을 말하다

CP_NET 2020. 8. 12. 12:25
편집자 주: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이하 오롯 위드유)는 "사법적 판단 너머, 무용계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주제로 5차례에 걸쳐 집담회, 워크숍, 세미나 등 현장연구모임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예술공동체, 그중에서도 무용 생태계의 관점에서 성폭력 문제를 바라보고, 미래를 위한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입니다. 오롯 위드유는 현장연구모임을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자 리뷰를 게재하고 있습니다. 본 기사는 오롯 위드유가 기획하였으며 [문화정책리뷰]가 함께 발행하고 있습니다. 오롯 위드유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문화정책리뷰]는 앞으로도 다양한 문화예술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담론 작업을 소개하는 "협업"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이하 오롯 위드유)는 지난 7월 31일 서교동에 위치한 댄서스라운지에서 ‘안전한 활동을 위한 무용(예술) 자치규약 만들기’ 워크숍을 개최했다. 이는 「사법적 판단 너머, 무용계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구성한 총 5회의 현장 연구모임 중 두 번째로,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사전 신청을 한 모든 예술인과 문화기관 관계자들이 자리해 성평등하고 안전한 작업에 대한 현장의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는 오롯 위드유 연구진이자 무용계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김윤진 안무가가 맡았으며, 워크숍은 다음의 세 단계로 진행되었다.

 

① 국내 무용계 단체들의 실제 규약 적용사례를 공유하고,

② 참여자를 네 그룹으로 나누어 토론을 통해 참여자에게 맞는 창작규약을 직접 만들었으며,

③ 각 조에서 제작한 창작규약을 발표하고 느낀 점을 나누었다.

무용계 단체 규약 적용사례 나누기

 

장혜진(혜진장댄스), 서경선(툿 네트워크)

윤상은(페미플로어), 천샘(오후의 예술공방)

 

 

나에게 맞는 창작규약 만들기

 

4개 소모임 토론

 

창작규약 발표 및 느낀 점 말하기

 

각 모임 대표 발표

 

 

 

자치규약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며 되뇌는 주문 같은 것

우리가 모여 있는 이 순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장혜진 안무가(혜진장댄스) ‘미소서식지 몸’ 무용 작업을 통해 팀원들과 지켰던 협업 약속을 공유했다. 평등한 작업 환경을 위한 보편적 규약부터 무용 작업의 예술성과 즉흥성을 고려한 세부 규약까지 총 열 한 가지의 협업 약속과 배경을 이야기했다. 그중 몇 가지 규약을 소개한다.

 

  • 규약 1. 우리는 모두 전문가다.

  • 규약 2. 매 순간 누구든 리드할 수 있고 누구든 리드에 따라갈 수 있다. 그 누구도 그 리드를 그대로 따라갈 의무는 없다.

  • 규약 5. 반대의 의무를 가진다.

  • 규약 6. 인정하고 긍정하고 싶을 때도 주저하지 않는다.

  • 규약 7. 필요한 순간, 타임아웃의 공간이 주어진다.

  • 규약 9. 비판적 문자 피드백에 함께 열려있자.

 

규약 1은 작업 환경에서 안무가나 경력이 높은 사람이 상위에 있고,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누구를 키워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지양하기 위해 만든 규약으로, 각자의 경력이나 배경에 상관없이 모두 무대의 전문가로 만났다는 것과 무용의 즉흥성에 따라 연습 중에 리더가 바뀌는 과정이 생길 수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장혜진 안무가는 밝혔다.

 규약 2와 5는 누구든 아니다 싶을 때 반대의 견해를 말할 수 있으며, 아름다움을 느낄 때는 작은 것일지라도 진심으로 표현하자는 뜻에서 만든 규약이다.

 

규약 6과 7은 연습 과정에서 내적이고 사적인 순간이 누구에게도 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육체적·심리적·감정적으로 극에 몰렸다고 느끼는 순간 누구나 잠시 연습을 중단할 수 있다.

 

규약 9는 작업 당시 불편했던 점을 이야기할 수 없을 때 혹은 뒤늦게 불편함이 느껴졌을 때 작업 이후 문자 피드백을 통해 의견을 말할 수 있도록 만든 약속이다.

    

끝으로 장혜진 안무가는 ‘이 자치규약들은 무용 단체뿐 아니라 지금 모인 이 워크숍에서도 적용될 수 있다’며, ‘예술적인,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되뇌는 주문과도 같은 협업 약속들이 잘 지켜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약속문을 구성원들과 끊임없이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을 느껴

 

서경선 안무가(늑대여 오라)는 ‘늑대여 오라’ 프로젝트를 위해 만든 약속문을 공유했다. 규약을 만들게 된 배경에 대해 ‘작업을 위해 처음 만나게 되면 각자의 환경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길 수 있는 불편함이 있다. 이것을 어떻게 각자가 곤란하지 않게 전달하고 풀어나갈 수 있을지 고민했고, ‘약속하는 언니들’이라는 단체에서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1를 배경으로 만든 <안전한 창작환경을 위한 약속문>을 참고해 규약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했다. 약속문을 만든 뒤에도 주기적으로 구성원들과 논의하여 규약을 수정해 왔다고 밝혔으며, 최근 ‘늑대여 오라’ <2020년 프로젝트를 위한 약속>으로 새롭게 추가된 몇 가지 규약과 배경을 소개했다.

 

  • 구성원은 모임 전과 후, 어느 때건, 부상, 불편함, 피곤함을 느낄 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다시 한번 질문하는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되돌아보고 함께 정리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 개인에게 민감한 사항을 언급할 때 조심성을 갖습니다.

  •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은 모임, 연습 시간, 프로젝트 의도와 계획한 바를 정확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 구성원 간 명시된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우, 논의에 따라 공지나 약속을 종료하고 프로젝트에서 배제하는 사유가 될 수 있습니다.

서경선 안무가는 특히 책임감에 대한 규약을 소개하면서 ‘구성원 모두가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는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리더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을 지양해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규약을 정한 뒤로 구성원 간 언행에 있어 서로 더욱 신중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첫 약속문을 만들었을 때 구성원 모두가 읽어보지 않았던 점이 아쉽지만 이후 주기적으로 약속문을 수정하면서 함께 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며 느낀 점을 공유했다.

 

 

<무용계 내 행동강령>

위계가 뚜렷한 무용창작환경에서 어떻게 적용할지 고민

성희롱, 성폭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

 

윤상은 안무가(페미플로어)는 무용계의 전반적이고 표준적인 규칙에 중점에 둔 <무용계 내 행동강령>을 소개했다. 처음 행동강령을 만들 당시 개념의 생소함을 느꼈지만,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에서 ‘성희롱, 성폭력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을 참고하여 ‘무용계 안에서의 성희롱 성폭력이란 무엇인가’로 행동강령을 시작하게 되었음을 언급했다.

 

  • 무용계 내 성희롱, 성폭력이란 무용 연습이나 공연, 뒤풀이 등에서 상대방의 동의 없이 물리적, 신체적, 심리적 공간을 침범함으로써 불쾌, 모욕, 공포를 조장하고, 이 모든 것들에 불편함을 드러낼 수 없는 분위기와 상황을 용인하는 것이다.

  • 또한 무용 교육, 공연 기획, 창작, 관람 시에 획일화된 미적 기준을 강요하고 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으며 고정화된 성 역할로 개인을 규정하고, 기대하고, 의무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상대방의 학습권, 창작권, 노동권, 성적자기결정권을 훼손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 신체적 특성을 비하하는 언어로 학생을 호명하지 않는다.

  • 지도 시 학생의 몸무게를 측정하거나 공개하지 않으며 평가에 반영하지 않는다.

  • 수업 시간에 생긴 유대감을 빌미로 학생의 심리적, 신체적 영역과 사생활을 침범하지 않는다.

  • 작품 내용과 상관없이 고정된 성역할에 따라 행위나 동작, 의상을 구분하지 않는다.

  • 연습 전, 모든 구성원이 성평등, 성인지 감수성 교육을 받고, 프로젝트 내의 행동강령을 정한 뒤 함께 읽고 숙지하는 시간을 갖는다.

  • 작업 공간에는 행동강령과 성폭력 신고/상담센터, 피해지원 내용을 안내하는 게시물을 부착해야 한다.

윤상은 안무가는 특히 무용계 성폭력 사례들이 위계가 뚜렷한 교육 환경에서 발생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스승이 제자에게 일상적으로 반말과 신체적 비하 발언을 하므로 트라우마를 겪는 학생들이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지 않도록 교육 환경에서 지켜야 할 행동강령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무용 창작과정 중 지켜야 할 행동강령으로 남자와 여자 출연자의 합의 없이 작품 안에서 성적 역할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에 제동을 걸어야 함과 동시에, 무용계의 성인지 감수성을 높이고 사건 발생 시 즉각 대처할 수 있도록 신고체계에 대한 행동강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예술계_내_행동강령 홈페이지2를 통해 <무용계 내 행동강령>을 오픈소스로 공유하며, ‘과정은 물론 쉽지 않았지만, 팀원들과 힘을 합쳐 <무용계 내 행동강령>을 정리한 것 그 자체로 선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창작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변화된 것은 나 자신

규약에 새긴 단어 하나하나가 마음에도 새겨진 느낌

 

천샘 안무가(오후의 예술공방)는 <창작할 때 지켜야 할 우리의 약속>을 소개했다. 무용계 미투 사건의 법정 투쟁에 연대하며 ‘우리가 속해 있는 환경에서 일어난 일이란 걸 알았을 때 이 일은 남의 일이 아닌 내 일이 되는 것’임을 느꼈다고 말했다. ‘무용인에게는 발언의 도구가 몸인데, 미투 사건으로 이 근본적인 도구인 신체 주권이 심각하게 침해당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라는 화두가 깊었다’고 술회했다.

 

이후 3·8 여성의 날 헌정 공연을 제작하면서 경각심을 가지고 모든 과정을 재점검하며 창작규약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와 <무용계 내 행동강령>을 참고하여 만든 창작규약을 통해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목소리를 내면 환경이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며, 창작규약에 단어를 새기고 편집하며 스스로 바뀐 지점들을 공유했다.

 

[창작환경 전반에 대한 규약]

  • 규약 1. 안무자는 합의를 통해 연습 시작·종료 시간을 명시하고, 창작자 전원은 연습 시간을 지킵니다.

  • 규약 5. 창작자 전원은 늘 서로의 안부를 묻습니다. 특히 안무자는 연습 시작 전후 무용수들이 자신의 상태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여 적극적으로 소통합니다.

  • 규약 6. 창작자 전원은 작품에 대한 책임을 1순위로 하여 서로를 배려합니다.

창작환경 전반에 대한 규약을 소개하며 안무가의 컨디션에 따라 연습 시간을 바꾸는 것을 지양하고, 어떻게 규약 5를 통해 규약 6이 성취되었는지를 설명했다. 천샘 안무가는 규약 5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규약으로 꼽았다. ‘전에는 빨리 시작해서 빨리 끝내는 것이 안부보다 우선이었다. 함께 무용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를 그동안 놓쳤던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의 안부를 묻고 나면 못해도 30분 이상이 소요되고 그만큼 연습시간이 줄어들지만 그렇다고 무용수들의 에너지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여러 활동을 하는 무용수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1순위였으면 하는 것이 모든 안무가의 바람이지만, 이를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그러한 바람은 안무가의 권위가 아니라 무용수에 대한 배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번 작업을 통해 깨달았다’고 말했다.

 

[계약서 및 출연료에 대한 규약]

  • 규약 4. 연습에 참여한 무용수가 부상이나 개인 사정으로 공연 전 하차할 경우, 안무자는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무용수의 전체 연습 시간을 계산한 뒤 공연에 미친 영향을 고려하여 이에 합당한 연습 수당을 지급합니다.

 

공연을 한 달여 앞두고 그만둔 팀원의 상황을 예로 들어 계약서 및 출연료에 대한 규약을 설명하였다. 당시 제작비가 부족한 상황이었지만, 함께 적은 창작규약을 끝까지 지켜보자는 생각에 그동안 일한 날만큼의 시간에 최저시급을 적용하여 총 계산한 뒤, 공연에 미친 피해액을 고려하여 1/3을 제외한 2/3를 지급했고, 결과적으로 서로가 떳떳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했다.

 

  • 나의 상사는 내가 성과를 개선하는 데 도움 될 실행 가능한 피드백을 제공한다.

  • 나의 상사는 팀원들이 팀에 우선적으로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한다.

 

마지막으로 천샘 안무가는 구글의 직장 내 상사에 대한 피드백 내용을 공유하며, ‘무용계에 상사에 대한 부담이 많지 않나. 나부터 적용을 해봐야겠다’라는 생각으로 발표에 추가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규약을 통해 팀원들 간 불필요한 침묵으로 인한 오해가 줄어드는 것을 느꼈다’며, ‘계속 지키다 보면 계속 발전하는 것이 보인다’고 발표를 마무리했다.

 

 

 

#서로_존중하고_경청하기

 

각 단체의 자치규약 사례 발표가 끝난 후 참가자들은 네 개의 소모임으로 모여 창작규약을 스스로 만들어 보고 다른 참가자들과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토론에 앞서 오롯 위드유에서 준비한 <토론을 시작하기 전,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을 함께 읽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필요함을 공감했다. 워크숍에 참석한 참가자들은 무용계 외에도 미술계, 방송계, 기관 등 다양한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었고, 자신이 속한 곳에 자치규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거나, 위력에 의한 성추행, 성폭행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화계를 변화시키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 [각자의 현장]_내_행동강령_쓰기

 

무용계_내_행동강령 양식을 참조하며 각자의 현장에서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성희롱 성폭력 개념’을 적은 후 토론을 이어갔다. 각자의 업무의 환경 속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관습들을 시·공간별로 적어보고 지양해야 하는 태도들을 논의했으며, 상황별 대응 매뉴얼로 내가 피해자일 때, 가해자라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삼자일 때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생각해본 후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중요한 지점은 참가자들의 현장이 달랐기에 경험과 태도의 차이는 있었으나, 많은 이들이 상사나 선배, 교수와 같은 위력을 가진 이들에 의해 여러 불평등한 환경에 놓여 있던 경험이 있으며, 이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기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스크를 쓴 채로 잘 모르는 다른 환경의 사람들이 만나 비슷한 고민을 하며 함께 분노하고 행동강령을 적어 나가면서 짙은 연대를 느끼는 순간이었다.

 

 

이후 조별로 대표자가 나와서 모임에서 논의한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조별로 하나의 행동강령을 발표하기도 하고 개인이 지키고 싶은 행동강령을 말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참가자들이 나눈 행동강령과 그들이 느낀 점을 공유하고자 한다.

 

가해자로 지목된 후 활동을 그만두는 것은 책임지는 자세가 아니라 회피일 뿐

제대로 된 사과가 우선시 되어야

 

“저는 상황별 대응 매뉴얼에서 '내가 가해자로 지목이 될 때는 어떤 게 가장 중요한가?'에 대해 얘기를 했었는데요. 최근에 미술계 Y 작가가 가해 지목을 받았을 때나 연예계에서 가수나 배우들이 가해 지목을 받았을 때 그들이 하는 말이 ‘창작 활동을 그만두겠습니다’ 혹은 ‘연예계 활동을 그만두겠습니다’거든요.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게 좀 어이없었어요. 사과는 사과인데, 내가 창작활동을 그만두는 게 되게 엄청난 결심을 한 듯,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사과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이요. 그래서 만약 가해 지목을 받는다면 그런 회피 방법을 쓰지 않고 정말 진솔하게 사과는 사과로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 따라 성차별 발언 다르게 일어나

여자 무용수에게 ‘여성스럽게 해라’

여자 조연출에게 ‘꾸미고 다니지 마라’

 

“이전에 방송계에서 일한 경험이 있고요. 성희롱 성폭력에 대한 금지조항을 논의하면서 ‘상대방의 성 정체성에 관해 부담을 주는 발언 및 행동을 지양하자’는 얘기를 했어요. 성차별 발언에 대해서는 무용계와 방송계가 다른 사례가 나왔는데요. 무용계 같은 경우는 여자는 치마를 입어야 하고 여성스러운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을 받는다고 해요. 하지만 방송계 특히 여자 조연출은 여성스러움을 억압당하는 경우가 많아요. ‘치마를 입으면 안 된다’, ‘예쁘게 꾸미고 다니지 마라’부터 ‘여자 조연출과 지방 촬영을 하러 가면 숙박비가 많이 들어서 싫다’, ‘남자 조연출이 좋다’ 등을 들으며 ‘여성’조연출로서 늘 갖는 부담감이 있었어요. ‘내가 여성으로써 연출부에 어울리지 않는다면, 그런 부담감을 안고 나는 무엇을 더 잘해야 할까? 어떻게 만회할까?’하는 또 다른 부담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나아지지 않는 고민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성차별적인 언어로 상대의 정체성에 부담을 주는 발언을 지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과정 중에 담론을 환영하며 경직되지 않는다

내가 지목받을 수도 있다

 

 “소모임에서 나왔던 행동강령들을 쭉 나열해 볼게요. 자리에 없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이에 대한 동의를 구하지 않는다. 미리 양해를 구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초반에 한다. 친해지는 것은 천천히 한다. 무용 안에서 자기 관리라는 영역이 굉장히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므로 자기 관리를 위한 규칙을 자기 자신이 정한다. 그래서 어떤 폭력이나 강압에 의해서 밖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한다. 성희롱 성폭력의 가해 지목을 받은 경우 공개 사과를 함부로 하지 않는다. 제삼자의 경우, 피해자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듣고, 그것을 기록하고 매뉴얼에 따른다. 그리고 중간에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해결될 때까지 팔로우한다. 신체에 대해 언급을 하게 될 경우에는 이것이 괜찮은지 묻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적인 기준을 공유할 때 이 기준 공유가 가지고 올 박탈감에 대해 유의한다. 과정 중에 담론을 환영하며 경직되지 않는다. 지목받을 수 있다.”

 

모르지 않기

나부터 지키기

 

“제가 스스로 정한 행동규약을 말씀드리자면 ‘모르지 않기’인데요. 지금 여기서 무용 예술자치규약을 만드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저도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다른 사람에게 가해 행동이 되는 언행을 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항상 조심스럽게 다가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사람이 누군가에게 내가 가해자라고 했을 때 너무 쉽게 그냥 ‘나는 몰랐어, 미안해’하고 넘겨버리거든요. 그래서 저 스스로 ‘모르지 않기’를 행동규약으로 적어봤습니다.”

 

무용수뿐 아니라 안무가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강령도 필요해

 

“저희 조에서는 모두가 고민된다고 했던 일상적인 부분이 있었는데요. 우리에게 있어서 외모 평가나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이 아닌 것으로 안부를 묻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건 연습이 필요하다 뭐가 있을까? 하다가 꿀팁이 하나 나왔어요. 내 얘기로 시작하는 거죠. ‘오늘 내가 이런데, 어때요? 외모 평가를 남한테 물어보지 않고 나에게서 시작하자 이런 식으로 나왔고요. 안무가의 권위의 거품을 빼기 위해서 안무가는 지시할 때 명령문을 쓰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발언권이 강한 안무가가 회식 등의 일정을 일방적으로 잡지 않는다, 등의 얘기가 있었어요. 

 

그렇지만 안무가도 고충이 있다는 것, 그래서 안무가를 보호하는 조항도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보통은 힘이 없는 무용수들을 보호하는 조항에 대해서만 많이 생각하기 나름인데 안무가 입장에서도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라서 지적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문제 될까 봐 전전긍긍하고 그래서 힘든 부분이 있다는 거죠. 그런 경우에는 자치규약 행동 강령을 만들 때 역할에 따라서 다르게 두자. 그러니까 무용수를 보호하는 조항은 당연하게 있어야 할 것이고, 안무가를 보호하는 조항도 두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어요.”

 

    

 

 

 오전부터 시작된 워크숍은 열정적인 공유와 토론 끝에 아쉽게 마무리됐다. 마스크를 쓴 채 거리를 지켜주며 조심스레 자신의 경험을 나누는 자리였다. 끝나는 순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다.

 이날 워크숍의 사회를 맡은 오롯 위드유 김윤진 안무가는 “오늘 사회를 보면서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대학 시절의 나 또한 권위주의적인 교수의 위계에 반항하는 학생이었지만, 25년이 지난 뒤 어느 순간 선생님의 역할을 하면서 은연중에 권위적인 모습들을 답습하지 않았는지 반성하게 됐다”고 말하며 “이런 주제를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자리까지 30년이 걸렸다. 내가 대학생일 때는 친구 몇 명과 비밀스레 얘기했지만, 이제는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고, ‘규약으로 만듭시다!’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은 안 바뀐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변화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눈 이야기들이 작은 목소리 같지만, 어느 곳에선 큰 울림으로 되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여러분들하고 계속 같이 함께하기를 희망한다”라고 떨리는 목소리로 심정을 전했다.

 

 오롯 위드유는 이제 세 차례의 연구모임을 앞두고 있다. 세 번째 모임은 ‘위계에 의한 성추행 판결의 의의’를 주제로 한 세미나로, 8월 20일(목) 오후 2시, 댄서스라운지에서 열리며, 현대 무용가 류00 성폭력 사건 2심 판결문을 바탕으로 권력형 성폭력을 다뤄온 전문가들의 발제를 듣고 본 판결이 무용계 및 문화예술계에 갖는 의미를 살펴볼 예정이다. 자세한 사항은 오롯 위드유 페이스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3차 세미나 참가 신청: 

http://naver.me/5vBl4X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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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카고 씨어터 스탠다드(The Chicago Theatre Standards, 약칭 ‘CTS’)는 공연 제작 환경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상황에 대한 대처, 예방책을 구체적으로 정리한 예술계 내의 자치규약이다. 한국은 2018년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에 대한 미투 선언이 시작된 후 공연예술계 종사자들이 안전하게 작업에 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 참조)

2 예술계_내_행동강령 홈페이지(http://safezoneforus.com/)에서 무용계 성평등 행동강령 전문 PDF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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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희망연대 오롯 위드유. 무용인희망연대 오롯의 분과위원회로 반성폭력 연대활동 등 성평등한 예술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