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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Y작가 스스로 어느 신문기사를 지목하여 “저의 기사입니다”라고 쓴 글이 올라왔다. 글의 내용은 기사 작성한 기자와의 많은 의견교환이 있었지만, 자신의 의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불만과 함께 그래도 할 수 없다는 코멘트를 달았다. 링크한 기사는 Y작가에게 성희롱을 당했다는 젊은 여성 예술인들의 문제제기와 그 제기된 의혹에 적절히 응해야 할 공적 시스템의 작동 미비가 주된 내용이었다. 서울문화재단의 공공예술사업 디렉터를 맡은 Y작가가 공적으로 가진 첫 번째 작가미팅에서 자신의 성적 취향을 널어놓고, 집요하게 성적인 관계를 암시하고 강권했다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무엇보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페이스북에 쓴 Y작가의 태도였다. 훗날 제대로 된 사과문을 작성하겠다고는 했지만, 그 글 자체가 대체로 무성의로 일관했다. 피해자에 대한 사과인지 아니면 자신과의 거리두기인지 모를 수준이어서 공분을 샀다.
이것이 사과문일 수가 없는 것이 Y작가는 억울해하는 티를 냈다. 자신은 예술가로서 낭만주의적 자유분방한 성을 즐기는데 뭐가 나쁘냐는 투로 읽혔다. 젊은 여성 예술인들에게 자신의 공공예술의 방향성은 갈등을 일으키는 반사회적 예술 지향이라고 했다는데, 그러한 자신의 지향성과 자기중심적으로 낭만화시킨 성적 취향을 일방적으로 섞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 그것도 초면에 만난 프리랜서 예술가들에게 그러한 발언들이 성적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무관심했다고 보인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반복했다고 당사자들이 증언하고 있는데, 그것은 거듭되는 집요한 성관계 요구였다고 한다. Y작가는 그것이 수직적 위계에 의한 권력남용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가 스스로 약속한 차후의 성찰 역시 불충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미 신문과 인터넷을 통해 다 알려진 사실관계를 다시 정리해본 것은 이 모든 사안의 배후에 “예술가들의 예술가”로서의 ‘멘토’라는 위상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Y작가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라든가 공공예술사업이라든가 기타 등등 각종 지자체와 문화재단의 공공예술 분야에서 꽤나 성과 있는 멘토로 유명하다. 사실 그가 멘토로서 유명해진 것에는 작가적 내공이 워낙 탄탄하기 때문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한 콜렉티브의 일원이며, 비엔날레급 전시에 늘상 참여하고 있던 작가이다. 게다가 이주노동자 대상의 예술작업이라든가 소수자 인권 대상의 작업을 하는 것으로도 주목받았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예술이 정치적인 것 안에서 윤리적 감각을 벼려왔기 때문이다. 장애예술, 예술인파견지원사업 그리고 문화기획학교 등 새롭게 예술의 공공적 영토를 확장하는 경계지대에 믿고 투입하는 탁월한 멘토였다는 평이다. 언맵핑된 곳에서 지도를 스스로 그려가면서 헤엄치는 물고기. 그런 그가 스스로 과도하게 낭만화시킨 성적 환상 속에서 비윤리적 폭력을 행사하면서도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처해 있었다니. 하지만 분노하기에 앞서서 당혹스러웠다. 비판에 동참하기보다는 그저 참담했다.
왜? 필자는 각종 공공예술 프로그램에서 Y작가와 함께 일한 경험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로서도 관심을 갖고 있었고, 지난번 비엔날레 작업도 흥미롭게 접했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해 다시 기억을 주섬주섬 널어놓고 정리해보는 것은 현장에서 무척 가깝게 일한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폭력이 상습적으로 반복되고 있었을 – Y작가 자신이 “경솔한 발언이 늘 있어왔다”고 인정하고, “주위분들이 늘 주의와 경고를 했었다”라고 털어놓았다 – 가능성에 대해 전혀 몰랐다는 것과 생각조차 해보지 못했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참담하다. 이는 결코 남의 일이 될 수 없다. 필자 스스로 천천히 기억을 되감기 하면서 어쩔 수 없이 시간들을 더듬어보는 것도 그러한 연유이다. 하지만 동시에 Y작가의 행위가 어떻게 보면, 미술계의 수직적 위계가 제도적으로 온존 하는 과정에서는 늘 가능상태로 상존하는 위험이라는 판단이 든다. 다시 말해서 ‘멘토’라는 제도 역시 공공적 필요성과 선의에 기대어 만들어졌지만, 그 제도의 운용상 멘토가 권력화 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은가 한다. 아이러니하지만 유능하고 탁월할수록 멘토는 권력이 되기 쉽다. 본인 스스로는 손사래 치면서 부인해도.
그러고 보면, 종종 Y작가가 그 유능함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가들에게 “틀렸다” 라고 단정하거나 “더 좋은 대안이 있다”라는 거절 못할 제안을 하는 경우도 목격되었다. 그러한 멘토의 대상이 된 기획자나 작가들의 불만을 직접 들은 적도 있었다. 그때 그러한 멘토질에 대해 필자 역시 주의와 경고를 보냈어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Y작가의 아이디어가 워낙 좋다고 판단하면서. 이 또한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고백한다. 미술평론가 안소연 씨가 말한 것처럼 주변의 침묵과 동의 하에서 성폭력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겠다. 깊이 반성합니다.
이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아직 Y작가와의 관계가 끈끈했던 많은 미술관계자들이 필자와 비슷한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즉 ‘입이 없는 것들’ 모드에 처해 있는 것.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면을 얻은 처지에 겨우 발언해야만 한다면, 멘토 제도를 폐기할 것을 제안한다. 멘토가 자신의 단안이나 정답으로 젊은 작가의 막 피어나는 아이디어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것은 성폭력 못지않은 폭력이며, 사실 성폭력과 연계되는 폭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야전의 경험 많고 다수의 집단지능 플랫폼을 거느린 멘토를 당할 수 없다. 그는 모든 것을 거의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런 그가 말하는 것이다. “나처럼 자유로워 봐.”
히치콕 영화 <로프>는 롱테이크로 유명하지만, 무엇보다 멘토의 실패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영화이다. 니체의 초인설에 영향받은 두 명의 상류계급 청년들이 자신들처럼 ‘우수한 사람들은 살인을 해도 좋다’라고 잘못 해석하고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다. 그 니체 초인설 강의를 들려준 교수는 그 감춰진 살인 현장을 방문했을 때 칭찬받기를 기다리는 두 명의 모범생 청년들 앞에서, 당혹스러워한다. “자네 덕분에 내 신념이 틀렸음을 부끄럽게 인정하네.” 진정한 멘토는 틀려야만 한다. 혹은 무지해야 한다. 다 알면 재미없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멘토가 사라진 곳. 혹자는 이즈음에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손에 들고 흔들겠지만, 필자로서는 다른 길을 제안한다. 최근 연극이나 무용에서 연출자의 벗이자 안무가의 벗으로서 작동하는 드라마투르그의 개입이다. 앞서 가지 않고 그 창작자의 반 발짝 뒤에서 귀를 기울이며 새롭게 떠오른 영감과 이야기를 불어넣는 사잇 존재. 이 제안은 좀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겠지만, 미술이야말로 그 위계적인 질서가 엄존하는 권력 장치가 되어간다면 일단 창작자가 고삐를 쥐는 드라마투르기라는 공동의 영역으로 진입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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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수. 안무비평. 미술과 공연예술의 퍼포머티브한 측면에 주목하는 비평 활동. 제1회 제주문화기획학교 읽기/쓰기 프로그램에 참여했고, 예술인파견지원사업과 장애예술 등 심의와 함께 새로운 예술 신 창발 과정에도 개입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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