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예술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호외를 발행합니다. 코로나19 전염병 위기 관련 이슈, 현장 소식, 위기 분석 등을 별도 간기 없이 발행합니다. 현장을 기록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일에 함께 하겠습니다. - 투고를 받습니다. 투고하신 원고는 [문화정책리뷰] 편집회의를 거쳐 채택될 경우, 호외 혹은 정기 발행 원고 발행합니다. (채택 여부는 편집회의 후 개별 연락드립니다.) 발행된 원고에 대해서는 소정의 고료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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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2월 퇴직금 200여만 원이 통장에 찍혔다. 그 순간 2014년 모 월간지에 기고한 글이 떠올랐다. 광주의 인문학 ‘현상’을 보편성과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기술하고 강단 밖 인문학 교육의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체계성과 지속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썼던 듯하다1). 저 200만원으로 이 일을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강단 밖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
2000년 이후 광주에서 이루어졌던 시민 인문학 교육의 흐름과 한계를 일관되게 정리하는 것은 간단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큰 시각에서 한마디로 정리해보자면 ‘명망가와 함께 하는 대형 무료강좌’였다. 국가나 지자체의 예산으로 지역 내외의 명망가들을 모시고 작게는 50석, 크게는 300석 이상의 강의실에서 특강 형태로 진행하는 방식 말이다. 인문학 간판을 걸고 좀 엉뚱하다 싶은 주제들이 진행되기도 했지만 나름 자기분야에서 최고의 업적을 쌓은 명강사들이었으리라. 하지만 이런 강의는 다소 부흥회 같은 성격이어서 듣고 있을 때는 마음속이 뜨겁지만, 등 돌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잊히기 마련이다. 기획자 입장에서도 매회 들락거리는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기획을 면밀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이끌고 가기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인문도시’ 등의 타이틀로 진행되는 국비사업은 또 다른 풍경을 제공한다. 이런 사업은 주로 민-관-학이 컨소시엄을 형성해서 추진한다. 특징이 있다면 이런 컨소시엄은 주무관청과 대학의 인프라를 활용하여 특정 기간 동안 무료 강좌를 도처에 깔아놓았다가 사업 기간이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는 점이다. 호주머니가 넉넉지 못한 시민들을 생각한다면 무료로 운영되는 고급 강좌에 무슨 이의가 있겠냐마는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그런 사업이 한 번씩 쓸고 지나갈 때마다 작은 공간에서 주민들과 함께 조용히 공부모임을 이끌어오던 단체나 활동가들은 크거나 작게, 때로는 재기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몇 년간 무료강좌에 참여한 사람들은 인문학은 당연히 공짜로 듣는 것이라는 생각에 길들여지게 마련이고, 독립 운영을 고수하던 단체들은 덕분에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무너지면서 자연스럽게 공모사업에 의존하게 된다. 좋은 기획으로 공모사업에 당선되어 사업을 펼치는 것 또한 좋은 일이지만, 공모사업이 끝나는 늦가을부터 다시 시작되는 다음 해 봄까지 공부모임은 사라진다. 휴가철을 고려한다면 한 해 3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 학습 모임이 중지되는 것이다. 주관 단체에 속한 사람은 강사료를 못 받게 하는 지침도 잘 이해가 안 가지만 수강료까지 못 받게 하는 지침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인문학 단체가 대부분 재정적 기반이 취약하고 주로 강사들로 구성되어 있는 소규모 사업장이라는 현장성을 전혀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공모사업을 하면 할수록 참가자들의 학습 효과는 반감하며 단체 및 활동가의 수입은 줄어든다.
이런 와중에 달랑 퇴직금 몇 푼 들고 인문학 관련 단체를 만들겠다고 나섰으니 그 심사가 얼마나 복잡했을까? 궁리를 한다. 여기저기 공간은 많으나 대부분 활용도가 높지는 않으니 ‘공간 연대’ 개념을 도입하자, 3년을 입문 과정으로 잡고 서양―동양―한국의 문화사상사를 각각 1년씩 다룬 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관심사 별로 소모임을 꾸리자, 정기적으로 적은 회비를 내는 회원제를 꾸리자, 큰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사람들을 꾀지 말자, 내 눈앞에서 인문혁명 따위가 일어나기를 바라면서 큰 그림 그리지 말자, 이 정도의 틀만 잡고 사람들과 함께 흘러가자, 유연하게, 유연하게, 유연하게. 돌이켜보니, 돈을 벌 수 없는 갖가지 조건들을 스스로 잘도 걸어 놓았구나. 버는 것이 없어야 망하지도 않는다는 기이한 생각을 했던 것인가.
2016년 4월, <인문학교육연구소>라는 간판을 걸고 ‘활동가를 위한 인문학’을 첫 강좌로 열었다. 많은 분들이 기꺼이 수강료를 내고 모여들었고 50석 규모의 강의실이 비좁아 출입구 바깥 복도에 보조의자를 깔아놓는 날들이 이어졌다. 참가인원이 거의 줄지 않은 상태에서 네 학기로 꾸려진 기획 강좌를 마쳤다. 종강하는 날 후원회원을 제안했고 그 자리에서 40여 명의 후원회원이 꾸려졌다. 한 해 한 해 거듭하면서 공간 연대도 늘어났고 고전어반(한문, 라틴어)을 비롯하여 독서모임, 월간지 독회, 주말 세미나와 청소년 고전반 등 주간 일정표가 빼곡할 정도로 소모임들이 운영되었다. 답사 프로젝트를 기획해 거의 1년씩 공부모임을 갖고 지중해, 베트남, 동학 답사도 다녀왔다.
재정적으로 보자면 부분적으로 공모사업에 의존하긴 했지만 회비와 참가비가 주된 수입원이었기 때문에 공모사업 일정과 무관하게 중단 없는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몇 년이 흘렀고 입문강좌와 소모임을 두루 거치면서 또 몇몇 사람들은 회원 가입을 하고 또 몇몇 사람들은 탈퇴서를 제출했다. 어떤 평가를 떠나서, 지속적으로 공부하는 회원들의 삶도 더러는 조금씩, 더러는 눈에 띄게 바뀌어 갔다.
2019년 말, 개소 5년차를 앞두고 나는 많은 생각을 한다. 인문학교육연구소와 연대하고 있는 세 군데의 공간과 거기서 각기 돌아가는 소모임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입문강좌들 ……. 인문학 모임은 지금보다 더 소규모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 꼭 강사가 있어야 하나? 자크 랑시에르가 『무지한 스승』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지적 해방’을 위해서는 강사 자리에 책 한 권 두면 되는 것 아닌가? 지적 해방이, 민중의 자기계몽이 과연 외부로부터 이루어지겠는가? 회원들은 언제까지 수(受)강료를 내면서 강의를 ‘받아야’ 하나? 수강료라고 해봐야 얼마 안 되지만 그것도 장기적으로 부담이 될 것이고, 혹시라도 급하게 사정이 안 좋아지면 공부를 멈추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인문학 학습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 작은 모임으로, 더 자치적인 형태로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닐까? ‘깃발 꽂고 불러 모으는’ 이 권위적인 모집 방식을 지금보다 더 많이 벗어나야 하는 것 아닐까? ‘찾아가는 인문학’이라는 타이틀로 출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모임과 단체들이 인문학 자체에 대한 생각을 서로 공유하면서 함께 풀뿌리처럼 뻗어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별자리(Konstellation)를 찍어가며 삶의 터전을, 그 지형·지질을 인문학적으로 바꾸어 나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코로나 이후, 더 작고 더 가깝게
2020년은 이러한 고민들을 풀어가는 한 해가 될 터였다. 이 과정에서 꼭 모셨으면 하는 강사들이 떠올랐고 예산 확보를 위해 두 가지 공모사업에 지원을 했다. 결과를 기다리던 중 코로나 바이러스 범유행이 시작되었다. 회원자치로 운영되는 작은 모임들은 계속 진행되었지만 그밖에 강좌는 모두 멈추었다. 그런 와중에 공모사업에 선정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반가운 마음에 착수계획서를 제출하고 승인을 받았지만 이내 사업 중지를 요청하는 공문이 내려왔다. 감염병 예방 수칙에 따라 일체의 개강을 멈추고 수강생 모집과 예산 집행을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상황이 좀 나아지자 두 기관에서 사업을 재개하라는 문자가 일주일 정도의 시차를 두고 왔고 며칠이 지나자 또 시차를 두고 다시 중지하라는 문자가 왔다. 나는 일을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한다. 그러면서 궁금해 한다. 하나의 감염병 상황에서 왜 공적인 지침은 제각각인가? 이 도시에는 방역당국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전달 체계가 엉망인가?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여러 기관에서 강의를 뛰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은 요새 어떻게 살까? 기왕에 편성된 예산인데 강사료를 먼저 지급하게 해주고 후속 조치를 강화하면 어땠을까? 학(이시)습(學而時習)의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일은 ‘주최’라는 이름의 기관들에 의해 좌우될 것이 아니라 우리 학습 ‘주체’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저런 민원을 제기하고 싶지만 대학의 동영상 강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신기술 익히기에도 버거운 나는 그저 울분을 삭인다.
코비드19 이후 많은 모임과 행사가 취소되었다. 확실히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나는 다른 귀를 하나 가지고 있다. 나는 그 귀로 듣는다. 사회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 크게 듣는다. 사람들의 바람. 우리는 언제 다시 가까워질 수 있느냐? 우리는 언제 다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냐? 기계의 힘을 빌려 영상강의를 제작할 수도 있을 것이고 기술이 진보했다 하니 쌍방이 소통하는 온라인 강의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대면 상황에서만 느껴지는 어떤 ‘공기’의 흐름을 한 번 느꼈던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만 고유하게 발생하는 어떤 ‘마주침’의 열기를 한 번 맛보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만남을 그리고 있다.
코로나 이후 모든 학습모임을 온라인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들었다. 나는 그에 동의하지 않는다.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 하는 문제는 학습주체가 자신의 취향과 상황에 따라서 스스로 선택할 문제이다. 만일 인문학이 삶의 근간을 다지는 활동이라면, 그래서 삶에 필수불가결한 것이라면, 대면 또는 비대면을 원하는 사람들 각각에게 적합한, 학습 상의 새로운 정상상태(New Normal)를 연구하고 제공하는 것이 바로 지금 인문학 단체들이 할 일 아니겠는가?
코로나 이후 시민 인문학 교육은 지금보다 더 작은 단위로 이루어져야 하고 더 가까운 장소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더욱 자치적으로 꾸려져야 한다. 동네에서 이루어지는 소규모 인문자치모임. 그러고 보니 고대의 어느 철학 유파가 생각난다. 격변의 시대를 살았던 에피쿠로스는 마음을 동하게 하는 모든 원인을 제거한 평정심(ataraxia)을 최선의 쾌락으로 보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자기 집의 정원에서 몇몇 벗들과 우정을 나누며 지냈던 것으로 전해진다. 바로 이 ‘에피쿠로스의 정원’이야말로 새로운 정상상태에 대한 해답이 아닌가! 다행히 이 정원은 인문학교육연구소가 코로나 이전부터 늘 가려고 했던 곳이자 이미 가고 있는 곳이다. 또 하나의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주어지겠지. 그럼 그 때까지 안녕히.
1) 원래는 “인문학이란 무엇인가―강단 밖에서”라는 제목의 글이었으나 편집과정에서 제목이 바뀌어 게재되었다. “인문 회복 다시, 강단이다”(기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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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호. 철학자. 인문학교육연구소 소장. 90년대 후반 어느 해직교수와 종로 일대의 공간들을 전전하며 시민 인문학 강좌를 꾸리기 시작한 이래로 미련하게 한 우물을 파고 있다. 2002년 (사)민예총 문예아카데미 ‘뒤풀이 전담 간사’로 본격적인 활동가 경력을 시작했고 팀장 승진 후 프로그램 기획에 참여했다. 2006년 광주광역시로 활동 영역을 옮겼고 철학교육연구센터(전남대)의 간사를 맡아 ‘교사를 위한 윤리학 강의’를 기획 및 집행했다. 한동안 독일에 체류한 뒤 다시 광주로 돌아와 청소년 인문학 교실에 매진하다가 2012년 (사)지혜학교에 철학교사로 취직했다. 입사 즉시 학교부설 철학교육연구소를 설립하여 교육과정을 설계하고 실행했지만 학교에서 월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늘 외부에서 강의를 했어야 했고 교육 방향과 관련해서도 불화가 점차 잦아지자 4년 만에 그만두었다. 위의 본문은 내가 벌어 내가 적립한 그 씁쓸한 퇴직금을 받은 이후의 이야기이다. 현재는 인문학교육연구소를 운영하며 ‘교육공간 오름’에서 청소년을 만나고 대학에 출강하며 ‘민중의 소리’ 등에 칼럼을 쓴다. 감염병 유행 이후로는 수상한 예술가들과 벗하며 시간을 벌고 있다. 스피노자의 『데카르트 철학의 원리』, 데카르트의 『성찰』, 츠바이크/프로이트의 『프로이트를 위하여』를 우리말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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