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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판데믹과 문화정책] 코로나19가 내게 준 것들

CP_NET 2020. 5. 17. 19:42

 

-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예술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호외를 발행합니다. 코로나19 전염병 위기 관련 이슈, 현장 소식, 위기 분석 등을 별도 간기 없이 발행합니다. 현장을 기록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일에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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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금요일 오후, 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창작준비금 선정결과가 발표됐으니 홈페이지에 접속해 확인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낮은 소득에 코로나로 인한 피해 확인서도 제출했으니 큰 어려움 없이 선정될 거라 낙관했다. 결과는 미선정이었다. 가장 낮은 소득 구간으로 인정돼 8점을 받았지만 제출했던 코로나 피해 확인서는 점수를 받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껴 당장 재단에 전화를 걸었지만 나 같은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었는지 통화조차 되지 않았다. 코로나19라는 역병이 창궐하고부터 빈번하게 이런 불행들을 겪고 있다.

 

 

2

 

나는 작품 활동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안 된 신진 독립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지금까지 네 편의 짧거나 조금 긴 영화를 만들었는데, 부끄럽지만 내 영화로 돈을 번 경험은 거의 없다. 몇 차례의 상영료와 저작권료. 그게 전부였다. 생계는 영화 외적인 미디어 교육이나 영상촬영과 편집 등의 아르바이트로 꾸려가고 있다. 내 또래의 창작자들도 비슷한 처지다. 영화 만드는 일을 내 정체성으로 삼고부터 매해 먹고 사는 일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어떻게든 꾸려왔고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정말 모르겠다. 하기로 했던 일들은 죄다 연기됐다. 지금쯤 하고 있어야 할 미디어 교육은 한 달이 밀렸고, 독립영화 상영회를 진행하는 일도 이번 달은 모두 취소됐다. 모든 게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일찍이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대출을 신청한 덕분에 수입 ‘0’의 상황에서도 굶어 죽지는 않았다.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액수를 늘려 대출할 걸 그랬다. 부모님께선 대출은 절대 손대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저질러버렸고, 갈수록 남의 돈 빌려 쓰는데 무뎌지는 느낌이다. 예술인 생활안정자금 대출도 지금은 사람이 너무 몰려서 심의하고 대출금 받는 데도 한참 걸린다고들 한다. 불행은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3

 

가깝게 지내는 또래 작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창작준비금 됐냐, 예술인파견사업 됐느냐는 연락이었다. 창작준비금에 미선정됐다는 나의 말에 자신도 그렇다고. 자기 주변 작가들은 파견사업에 넣었는데 다들 떨어졌다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와 남들의 불행을 주고받고선 하하하 웃어 넘겼다. 어떻게든 이 상황이 해결되겠지 낙관하는 것 외에 달리할 수 있는 일도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마냥 웃고만 있을 순 없는 건, 나를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예술인복지재단 사업에 기대고 있고, 나날이 사업에 선정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간담회에서 듣기론 연극 쪽에선 파견사업에 선정되기 위해 스터디그룹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런 사업이 없으면 한 해 생계가 궁핍해지는 나의 삶. 이런 나처럼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을 작가들의 삶.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자생력 없는 작품 활동을 계속해도 괜찮은 걸까.

 

창작준비금 미선정과 관련해 예술인복지재단과 어렵사리 통화가 연결됐다. 미선정의 사유는 코로나로 인한 피해 사실 확인서가 재단 양식과 다른 탓이었다. 내가 낸 피해 사실 확인서는 재단의 생활안정자금대출을 위한 양식이었고, 창작준비금 양식은 따로 있다고 했다. 공지사항을 제대로 살피지 않은 내 탓이었다. 2점이 모자라 떨어졌다. 불행을 만든 건 바보 같은 때문이었다.

 

 

4

 

친분이 있는 선배 감독에게 전화가 왔다. 잘 지내냐, 요즘 사는 건 어떠냐, 힘들지 않냐고 내게 물었다. 그리고는 다큐멘터리계에서 활동하는 선배들이 젊은 감독들을 위해 돈을 조금씩 모았다고, 혹시 받을 생각이 있느냐고 말했다. 사실 돈을 받는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엔 받겠다고 했다. 잠시 뒤 휴대폰에 20만원이 입금됐음을 알리는 알림이 울렸다. 고마움과 미안함, 여러 감정이 겹쳤다.

 

창작준비금만큼 큰 금액은 아니지만, 이 돈을 받고 나서 왠지 모를 안정감을 느꼈다.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하다가, 작업실을 구했다. 생활비로 쓰는 것도 좋지만 이 고마운 마음에 보답하는 길은 꾸준히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해나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하여 볕이 잘 드는 창가 자리에 내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내가 사랑하는 일들을 올해도 하고 싶다. 영화를 생각하고 찍고 만드는 일. 역병이 내게 불행을 안기고 슬픔에 빠뜨릴지라도, 주춤하다 다시금 번지는 코로나에 사람이 밉다가도, 이런 일들에 나는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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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다큐멘터리 감독. 단편 다큐멘터리 <무노조서비스>(2014)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인천문화재단의 제작지원을 받아 오이 못 먹는 사람들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