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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 판데믹과 문화정책] 잃어버린 자기만의 방

CP_NET 2020. 5. 4. 09:06

 

- [문화정책리뷰]는 문화예술계의 상황이 급박하게 전개됨에 따라 호외를 발행합니다. 코로나19 전염병 위기 관련 이슈, 현장 소식, 위기 분석 등을 별도 간기 없이 발행합니다. 현장을 기록하고 대응을 모색하는 일에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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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데서나 글을 쓰면 되지. 작가들을 유별나게 카페에 가더라. 카페가 더 시끄럽지 않아?”

 

, 시끄럽지 않아요. 왜냐면 나랑 상관없는 백색소음이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꾹 참아 버린다. 시끄러운 소음이야 가정에서 일어나는 생활소음이 단연 최고인데 그들은 모른다. 빨래 종료를 알리는 세탁기 알림음, 윗집 안마기의 진동음, 불쑥 찾아오는 초인종 소리, 오가다 만나면 인사를 건네야 하는 이웃들. 겨우 떠오른 한 줄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수많은 작가들이 작업실을 갖추거나, 자기만의 방을 갖춰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을 것이다.

 

작가에게 공간은 작업의 집중도와 집필 속력 그리고 창의력을 제공하는 곳이다. 땅값 비싼 한국에서 제 작업실을 오롯이 갖기가 어려워 궁여지책으로 카페라도 나가는 것인데.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잠든 밤이나 이른 새벽에 작업을 해야 한다. 그 마저도 가족들이 깨어나면 펜을 놓아야 한다. 남편의 출근, 아이들의 등원을 살피고 다시 책상에 앉기도 했지만 유독 집에서는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 여전히 써야 할 글들은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고 있을 뿐, 세상으로 좀처럼 나오질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몇 년 전부터 국가나 지자체에서 제공하는 창작실이 생겨났다. 대부분 무료였고, 작가뿐만 아니라 다양한 창작 관련 직군이 사용할 수 있었다. 가끔 네트워크 행사도 열렸고, 강연도 있었다. 점차 카페로 출근하는 일은 줄어들었고 창작실을 찾았다. 일반 사무실과 달리 클래식이나 재즈 음악이 흐르고, 커피를 제공해 줬다. 주머니가 가벼운 작가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공간이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는 매해 작가를 선정해 24시간 동안 상주하면서 작업할 수 있는 창작 집필실도 제공하고 있다. 입주해 사용해 보니 창작자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가 닥치면서 이런 창작실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 자료를 찾기 위해 찾았던 도서관들도 마찬가지였다. 전염력이 강한 코로나19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조치였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대한민국이 모두 사회적 거리 두기에 나섰고, 기업들은 재택근무를 시작했다. 별 수 없이 집에서 작업하기 시작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사회와는 거리가 멀어졌지만 가족과의 거리가 너무나 가까워졌다. 근무단축으로 한 달에 열흘만 출근하는 남편, 수차례 등교가 연기되었다가 온라인 개학을 한 큰 아들, 휴원 결정으로 집에서 교육방송 우리집 유치원으로 등원하는 작은 아들까지. 임시로 안방에 작업실을 만들었지만 아이들은 수시로 엄마를 외치며 불쑥불쑥 문을 열었고, 뒤돌아서면 쌓여있는 집안일을 애써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학교 선생님께 맡겼던 교육까지 도맡으려니 정신적,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보였다. 온라인 작가 커뮤니티에 엄마 작가들은 하루면 읽을 책을 삼 주나 읽고 있다는 성토글이 올라왔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그래, 회사나 상사 눈치 안 보는 것만 해도 어디야?’라며 위안을 했지만 이번 달 수입은 ‘0이었다.

 

작가 혼자 하는 소설 집필이야 양해를 구하고 마감을 좀 늦췄지만 공동 작업을 해야 하는 드라마나 영화 기획은 전화 회의로 대체했다. 몇 년간 알고 지낸 동업자들이라 전화 회의가 효율적이기도 했지만, 간혹 새로운 기획을 할 때는 어려움이 있었다.

 

작가님, 급해서 그런데 빨리 좀 써주시면 안 될까요?” 숏폼드라마인데 이미 물망에 오른 배우들이 있어서 비교적 쉬운 기획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에서 정리한 기획안도 있어 흔쾌히 수락했는데 실제 작업은 수월하지 않았다. 전화 회의로 필요한 용건만 말하다보니 수박 겉핥기식의 작업이 된 것이다. 기획이 몇 사람을 거쳐 오다 보니 사라진 단서들이 제법 많기도 했다. 직접 만나서 회의를 했다면 제작사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기 쉬웠을 텐데. 마주 앉아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보면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왔을 텐데. 아쉬운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코로나로 잃어버린 일상이 작가에게는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달았다. 타인의 삶을 엿들을 수 있었던 카페, 버스, 지하철, 그리고 식당. 이 모든 공간에서 나는 열심히 엿듣고, 열심히 훔쳐보고 있었다. 그것들이 창작의 원천이었고, 내겐 자산이었던 것이다. 일상에 빚지고 있었던 걸 새삼 깨달았다.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던 시절 동료작가들에게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었다. “결혼 전에 충무로에서 쓸데없이 커피 마시던 시간이 그리워.” 그 쓸데없는 시간동안 웃고 떠들며 만들어낸 기획안들이 공모전에 당선되고, 작품으로 완성되었다.

 

온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 두기로 표정을 잃어버렸던 대한민국이 일상을 되찾으면 나는 그 쓸데없는 시간과 자기만의 방을 되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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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현

작가. 동국대 영상대학원 문화콘텐츠학과 박사 수료. KBS라디오 드라마 <쌍둥이 남매>, 2015 한국콘텐츠진흥원 스토리공모대전 우수상 <불의 전쟁>, 저스툰 웹소설 <탐정 홍련>, 2017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필름마켓 E-IP피칭 <탐정 홍련> 뉴크리에이터상 등을 수상했다.